문학


문학이 내게 다가온 사건은 다소 의외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시조나 번역 한시가 인쇄된 손바닥보다 작은 카드를 주면서 시작되었다. 나는 영문 모른 채 외워 나아갔다. 그 경험은 뒷날 산문보다 운문을 더 가까이하는 경향으로 자라나 지금까지도 그렇게 흘러간다. 이 경향에 세 가지 강화 요인이 더해졌다.

 

그 하나는 아버지 중학교 졸업 문집이다. 벗들이 남긴 친필 작품을 모아 만든 수제 문집이었는데 대개 유치한 사춘기 문학성이 뛰노는 시였다. 그들보다 더 유치했던 어린 나는 그 운문 리듬에 매료되었다.

 

다른 하나는 형이 끼친 감염이다. 세 살 위인 형은 나름 문학 소년으로 자작 풋 시를 써댔고, 김소월 시집을 통째로 외고 다녔다. 그가 읊조렸기에 아직도 내 귀에는 소월 시 여러 구절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정도다. 그 뒤 나는 닥치는 대로 시를 읽었다. 박인환, 신경림, 김남조, 도종환, 이생진, 이해인, 정호승, 박노해, 김기택, 이문재, 문태준, 그리고 내가 천하 시인이라 부르는 김선우···비교적 최근에는 이른바 뉴웨이브 젊은 시인들까지. 지나치게(?) 어려운 시들은 내가 공들일 데가 아니다 싶어 발길을 끊기까지 나는 옛 종로서적, 광화문 교보에 가면 가장 먼저 시 가판대 앞에 섰다. 이사할 때마다 버리고도 아직 서가에는 시집 백수십 권이 꽂혀 있다.

 

마지막 하나는 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이다. 다른 부분에서도 내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선생님이 문학의 밤에서 자작시 <마음 가는 길목>을 낭송하던 모습은 내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시 전체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마지막 딱 한 구절이 남았다. 의성어였기 때문이다: “울릴리 불릴리

 

울릴리 불릴리선생님은 전복적 영향을 내게 끼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일이었다.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한 모작 콩트 수준이었지 싶다. 50여 년 뒤에 나는 숙의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숙의 의학 소설 77편을 썼다.

 

물론 나는 그동안 수없이 시와 소설 습작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문학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시와 소설 형식을 빌려 내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지금도 거의 쉼 없이 글을 쓰지만 거의 모두 실용에 가까운 글들이다. 거기에 아주 소소한 문학성이 깃들어 있도록 마음을 기울인다. 나는 문학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문학적인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술보다는 음악이, 음악보다는 문학이 내 삶에서 미학적 동인으로 작용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내 문학적 삶에 자양분이 된 숱한 영감들이 이렇게 저렇게 친일 부역자들에게서 발원했음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서정주가 가슴에 있지 않은 한국 문학이 어디 가능하기는 한가. 문학인이 아닌 나 같은 무지렁이마저 문학 부역 서사 한 귀퉁이에 똬리 틀고 앉아 있으니, , 대체 우리는 얼마만큼 깊은 제국 심연에 빠져 있는가. 섬뜩하다. 아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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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학 부역은 서정주 같은 상징적 인물 이야기를 통해 익숙해졌다. 상식 수준을 넘어 문학 부역 전경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글을 인용한다. https://dklee.tistory.com <우리 안의 친일 문화>에 실린 문학평론가 홍기돈과 인터뷰한 글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로 전향한 문인들은 두 가지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선일체'에 동의했던 문학가들입니다. 근대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었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광수입니다. 193810월 중국 중경이 일본에 함락됐습니다. 이곳은 동방의 마드리드라고 불리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조선의용군도 싸웠던 곳이고요. 문인들은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 한창일 때 중국이 이기면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패하자 큰 충격에 휩싸인 지식인들은 중국을 비판하면서 친일로 들어섰습니다. 중국은 봉건이고 일본은 근대라고 논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면서요.

 

또 하나는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근대의 종말을 고했던 문인들입니다. 이 시기의 문인들은 근대를 비판하면서 근대 이후의 신체제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에 소설가 채만식이 있습니다. 19403월 중국 혁명의 선도자 쑨원의 양 날개로 불리던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있었습니다. 장제스는 계속 싸우자고 주장했으나, 왕징웨이는 일본과 타협안을 내고 친일 정부를 세웠지요. 이때는 프랑스 파리가 나치에 의해 함락된 시기입니다. 이 사건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파리는 근대의 정서가 싹튼 곳이었거든요. 이에 지식인들은 또 한 번 큰 충격에 빠지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식민지에서 문학을 업으로 삼은 지식인이 왜 부역할 수밖에 없었는지 큰 맥락에서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문학을 한다라고 하지 않고 업으로 삼았다라고 한 이유가 있다. 식민지에서 문학 하는일은 목숨 걸고 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 문학을 업으로 삼은자들은 이미 목숨이 아까워 부역하기로 작심한 거다. 저들이 종주국인 일본과 중국 성쇠를 기준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했다는 사실이 그 결정적 증거다. 저들은 조국이 처한 식민지 상태를 주체적으로 극복하는 데 문학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고, 거꾸로 제국 일본 승리에 붙여진 의미를 좇아 문학(인으로서 삶)을 구성했다. 저들 각자마다 곡진한 사연이 있고 부역 스펙트럼도 단순하지 않겠지만, 일제 식민 통치 진경을 경험한 상태에서 하필 문학 행위를 삶으로 선택했다면 기본적 부역 고의를 차마 부인할 수 없다.

 

서정주 이야기는 극적이면서도 전형적이다.

 

서정주의 삶과 작품은 첫 번째 시집 화사와 두 번째 시집 귀촉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화사시집에서 서정주는 <랭보의 두개골>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랭보가 돌아다니다가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너는 신 존재를 믿느냐라고 물었던 일을 비판한 시입니다. 그는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 해도 랭보는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랭보 모더니즘은 실패했지만 자기만은 꼭 이뤄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서정주는 만주, 금강산, 해인사 말사가 있는 산속까지 방랑했습니다. 더럽고 추한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는 전 세계와 맞선 모더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 시절 시 <자화상>에 나온 나는 뉘우치지 않겠다라는 말은 친일을 뉘우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속물 같은 세계를 떠나 방랑 세계로 뛰어들었던 사실을 뉘우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서정주는 화사시집이 나온 이후 모더니즘과 결별하고 친일로 들어섰습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었고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죠.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천황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상대방을 이상화합니다. 눈에 콩깍지가 쓰인 듯 한 사람을 이상 자아의 자리에 가져다 놓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대상은 점점 중요한 무엇이 됩니다. 결국 자기 자아를 지워버리지요. 특별한 상황에서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한 사람을 이상 자아 자리에 들어다 놓습니다. 이를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서정주 경우에도 그 시절 그가 흠모했던 대상이 바로 일본 천황이었으며 친일 파시즘을 찬양합니다. 그에 의해 통제받고 지시받기를 원합니다. 화사에서 귀촉도로 넘어가면서 강렬했던 자아를 없애버린 셈이지요. 어떤 문인들은 삶과 문학을 분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정주 경우를 보더라도 삶과 문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정주는 해방이 되면서는 이승만을 다시 그 자리에 놓습니다. 파시즘 체제 심미적인 무엇, 문학, 사고체계 유형이 반복됐지요. 친일을 얘기하면서 단순하게 친일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문제로 생각하지 말고 그때 만들어진 유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해야 함을 느낍니다. 친일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서정주가 지운 자아 대신 영원성 자리에 가져다 놓은 표상은 전두환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런 행태를 놓고 예술에는 천재고 정치에는 천치라는 말로 그 순진무구를 찬양하는 자도 있다. 이런 논리는 오늘날 정명훈에까지 이어지며 예술계 전가 보도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하필 왜 예술인만은 정치 천치를 자랑할까. 사실은 그 말 자체가 순수예술론이 지껄이는 신념에 찬 동어반복이다. 정치를 모른다고, 몰라야 한다고 말하는 짓이 제국주의에 부역한다, 해야 한다고 말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저들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 인식이 부역을 증강 재생산한다.

 

이런 상황에서 불어오는 탈식민주의 바람은 과연 무엇인가?

 

요즘 문학계에는 민족적인 것을 버리자는 탈식민주의이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탈식민주의는 종군위안부들이 돈을 받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은 것입니다. 한국을 말살했던 일본의 군대와 일제에 대항했던 의병을 싸잡아서 '사람을 죽인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자기중심적이었던 이들이 민족적인 것을 탈피하겠다고 해서 우리가 덩달아 그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친일인명사전만드는 일을 국회에서 막은 나라가 한국입니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뿌리부터 세워야 하는 법인데, 이런 것을 막는 세력이 있어서 문제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민족의 근간까지 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사실관계조차 규명하지 않고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구체적인 실증자료 만드는 작업이 선행된 후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탈식민주의라는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나는 스스로 부역자임을 고백하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저 뜨르르한 특권층 부역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지렁이 부역자지만 저들을 언급하면서도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또 다른 검열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탈식민주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일단 이 문제를 짚고 간다.

 

내가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주의하는 일이 과연 적절한가? 탈식민주의와 내가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보다 훨씬 더 배타적이며 잔혹한 제국주의와 부역 권력 자국 식민주의가 나날이 증강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생각은 제국주의 앞에서 과연 무엇인가?

 

문학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탈식민주의 내용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문인들이 누구며 어떤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민족적인 것을 버리자.’라는 표현을 보면서 내 생각을 분명하게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던 중에 선문대 교수 손종업이 쓴 글 <친일의 정신분석-친일문학의 해석 문제->를 읽었다.

 

손종업은 친일 논의가 이분법적으로 단순화되면 도리어 교묘한 제국 논리에 말려들 우려가 있으므로 청산 이전에 정치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성찰이 없으면 우리 안에 키워온 민족국가의 형태를 띤 또 하나의 제국또는 우리 안에 간직된 제국적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그러면 제국 또는 제국적 고리는 무엇인가?

 

손종업은 식민지지배를 위한 일제 전략을 분할통치로 요약한다. 분할통치는 일제 특유 전략이 아니라 고대 로마 때부터 있어 온 고전적 통치술이다. 그런데도 손종업이 구태여 이렇게 요약한 뜻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제국 또는 제국적 고리를 정확히 아는 데 제국 권력을 단일한 것으로 추상화하는 일은 독이 된다. 식민지인을 갈라쳐 각각 다른 방식으로 통치해 복잡한 굴절을 일으키려면 제국 자체가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수천 개의 가면을 쓴 괴이한 존재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야 거기 빙의된 식민지인이 부역하는 양상도 단일화할 수 없는 복잡한 굴절을 그리게 된다. 부역이 지닌 이 복잡한 굴절을 구체적으로 읽어내지 못하면 제대로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부역을 청산할 수 없다.

 

복잡한 굴절을 구체적으로 읽어내면 끝인가? 물론 아니다. 그다음은 무엇이고, 그러려면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 귀띔조차 하지 않은 채 손종업 글은 끝난다. 내가 손종업에게 품었던 의구심은 이 사실에서 비롯했다. 기존 친일 논의가 민족주의나 또 다른 제국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비판하고, ‘이효석에게도 저항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읽어 진짜 섬세하게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발톱을 숨기는 전술 아닐까, 운운. 물론 글 전체 맥락은 그렇지 않다고 시사한다.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렇든 아니든 나는 이제 내 말을 해야겠다.

 

손종업 같은 읽기 아닌 다른 많은 읽기 모두를 전선에 세워야 한다. 이분법적 외과적 읽기도 필수 불가결하다. 서정주가 그런 시를 쓰고 있을 때 어느 항일무장투쟁 전사는 제국 군대와 싸우다 총탄에 스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한 사람을 말하면서 항일한 사람에 대한 예의를 누락시키는 일은 그 자체로 고의적 친일 부역이다. 더군다나 오늘날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강고한 제국과 부역 권력 시스템이 작동해 복잡한 굴절을 계속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닌 현재 부역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내 말 자체가 부역 언어가 아닌지 칼같이 살피려면 칼 들고 나를 지켜보는 사람을 직시해야 한다.

 

원효 어법으로 말한다: 친일에 관해 말하는 한 모두 맞다[皆是]. 진리 전경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모두 틀리다[皆非]. 그러므로 쟁[]을 세워야 한다[立諍]. 옹골차게 입쟁하고야 쟁이 다한다[破諍]. 화쟁[和諍]이다. 화쟁을 현대 제국 언어로 Networking이라 한다. Networking이야말로 제국주의 반대말이다. 정치적 용어로 번역하면 통일전선이다.

 

진정한 통일전선은 각성한 부역자, 그러니까 제국이라는 절대 조건을 삶에서 도려낼 수 없다는 진실을 뼈에 새기고 기어이 저항 틈을 내는 역설 주체가 평등한 연대를 이룰 때 형성된다. 평등 연대를 이룬 각성한 부역자 입에서 탈식민주의라는 말이 나올 리 없다. “유행처럼 번지고있다니 상당한 힘을 받는 모양인데 나는 이 논자들은 물론 특별한 예외가 아닌 한 한국 문학계 전반을 신뢰하지 않는다. 416을 대하는 자세와 글쓰기를 보고서 굳힌 생각이다. 이들 이름을 아래 식민지 시대 부역 문인 명단과 나란히 놓아야 하지 싶다.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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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일 줄은 차마 몰랐다. 비교적 이른 시각에 아무 작정도 하지 않은 채 출발해 무심히 들어선 도봉산 도봉천 계곡은 등산객이라기보다 행락객이라 해야 할 사람들로 너무 소란스럽고 너저분했다. 산에 들어서기도 전 냇가에는 벌써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소주에, 삼겹살에 거나한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 앞을 지나 길이 끊어진 곳에 다다랐다. <출입 금지> 표를 매단 밧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밧줄을 넘어 직진했다. 물과 바위,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이 계속해서 돌아가라 윽박질렀지만 나는 그대로 앞을 향했다. 마침내 제법 높다란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가 이어주는 큰길이 눈에 들어왔다.

 

큰 계곡 길은 더욱 소란스럽고 너저분했다. 안전하게 잘 정돈된 길을 걷는데도 왜들 그렇게 스틱으로 땅을 찍어대는지, 산에 와서까지 구태여 돈 얘기를 떠들썩하게 지절거려야 하는지, 여성끼리만 있다 싶으면 미팅하자고 들이대는 놈팡이 표정은 왜 그리 게걸스러운지··· 능선 코밑에 이르러서야 고요가 깃들기 시작했다.

 

능선에 이르자마자 나는 원통사를 거치지 않고 무수천 계곡으로 바로 가는 길을 찾았다. <출입 금지> 표를 매단 밧줄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망설이지 않고 나는 그 길로 들어갔다. 물론 처음부터 길을 잃었다. 스마트폰으로 방향을 확인하며 직진했다. 이번에는 절벽에 가까운 경사와 바위 낭떠러지가 돌아가기를 강요했다.

 

되돌아오고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했다. 중심 시각으로 헤매다 비 중심 시각으로 발견한 버섯들을 사진에 담을 때, 또 때늦은 각성이 들이닥치며 안심했다. , 이들이 나를 불렀으니 갈 길도 알려주겠구나. 바위틈을 이리저리 빠져나오다 보니 길 아닌 듯하나 인기척을 간직한 소로가 나타났다. 대뜸 어디쯤인지 알아차렸다.



원통사로 올라가는 길과 갈라지는 곳에 이르러보니 길을 잃었다기보다 아예 길이 지워진 상태임이 틀림없었다. 원통사 쪽은 누가 봐도 길처럼 생겼는데 내가 내려온 계곡 꼭대기 길로 진입하는 초입은 전혀 길처럼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쉽게 들어서지 못함으로써 이곳저곳 인적이 지워진 결과였다. 길이 지닌 운명 아닐는지.

 

길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 삶도 그렇다. 누군가 먼저 살아갈 때 다른 누군가가 인기척을 듣든지 인적을 보든지 뒤따라가야 공생 서사가 형성돼간다. 먼저 사는 사람은 더불어 살 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뒤따라 사는 사람은 먼저 산 사람에게 고마워하며 그 삶을 뒤 사람에게 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살림 없이 삶은 없다.

 

이 단순한 이치가 무너질 때 길이 사라지듯 인간 공동체도 사라진다. 대한민국을 공동체라 할 수 있는가? 특권층 부역 집단이 틀어쥔 사회 모든 분야가 식민지 본성을 중첩적으로 지니고 있다. 본디 길을 찾는 일이 없는 길을 새로 내는 일과 같은 숲으로 우리는 깊숙이 들어왔다. 길 없는 숲에서 바른 방향으로 직진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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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00.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있다.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고 홀로 깨쳐 독학자 한계에 갇힌 수준에서 뚱땅거린다. 왼손으로는 화음을 오른손으로는 멜로디를, 화음은 세 손가락만 써서 친다. 악보는 C장조, A단조 이외에는 읽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 둘도 악보를 읽는다기보다 계명을 찾아 노래를 알고 나서 악보 없이 그 노래를 친다고 해야 한다. 노래만 알면 악보 없이 그냥 자동으로 손가락이 가서 멜로디와 화음을 두드려준다. 외워서 하는 동작이 아니다.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악보도 없이 능숙하게 치니까 제법 잘 친다고 속을 정도다. 모든 노래를 장조는 C, 단조는 A로 바꾸어 치므로 조에 따른 느낌 차이를 내지 못한다. 복잡하고 큰 음악은 손댈 수 없다. 여기가 끝이다.

 

이 고착 상태를 깨뜨릴 수 있을까? 딸아이가 소개한 피아노 선생님에게 사연을 이야기했다. 솔루션은 간단했다. 피아노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치는 수업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얼른 알아차렸다. 내 특수성은 고려 대상일 수 없으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이라면 거문고산조나 판소리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음악 부역 서사를 쓰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어로 엔카도 부르고, 이탈리아어로 오페라 아리아도 부르면서 정작 아리랑조차 우리 음률과 창법으로 부르지 못하는 내 현실이 새삼 뼈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민족주의 심지어 국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한의학도가 6년 내내 양의학까지 배우는 동안, 양의학도는 6년 내내 한의학을 무시하는 부조리에 관해 이야기한다. 문화는 결핍을 따라 흐른다고 누가 말했나. 한국인에게 피아노가 결핍일 때 미국인에게는 거문고가 왜 결핍이 아닐까. 거문고는 음악이 아니라는 말 이외에 답이 없다. 양의학이 한의학을 의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치와 같다. 우리가 무심코 클래식하면 신쾌동 <거문고산조> 아닌 쇼팽 <녹턴>을 떠올리는 일은 문화 다양성 현상이 아니고 식민지 부역 현상이다. 여기가 시작이다.

 

애써 배웠든 부지불식간이든 구전 동요에서 클래식까지 통속과 우아를 가로지르며 우리 감성과 이성, 심지어 의지마저 좌우하는 제국 음악이 얼마나 쉽게 어떻게 은밀히 일상으로 들어와 있는지 개인 경험만으로도 실감한다. 문제는 당최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특권층 부역 집단이 음악계를 이토록 강고하게 지배하는 한 우리 음악은 관광상품으로나 소비되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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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1. 강영철 계정식 고종익 김관 김기수 김동진 김생려 김성태 김영길 김원복 김재훈 김준영 김천애 김해송 남인수 박경호 박시춘 반야월 백년설 서영덕 손목인 안익태 이규남 이면상 이봉룡 이인범 이재호 이종태 이철 이흥렬 임동혁 장세정 전기현 조두남 조명암 조백원 최승희 최팔근 최희남 한상기 함화진 현제명 홍난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음악인은 43명으로 미술인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대중음악인까지 포함한 숫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식민 통치 선전·선동 수단으로 음악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식민 통치 초반부터 조선총독부는 음악으로 제국주의를 주입하고 민족혼을 빼앗는 여러 작업을 진행해왔다. 교과 과정에 일본 음악 교과서를 넣는가 하면, 일상 풍습에까지 이른바 황음(皇音)이 파고들도록 관리했다. 음악이 공동체 정서 형성에 기축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벌인 치밀한 통치술이었다.

 

통치 말 전쟁 정국이 되면서부터는 광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김창욱 논문 <일제 팟쇼체제기의 친일음악운동>에 따르면 1936년 부임한 제7대 총독 미나미는 강력하게 황민(皇民)화정책을 시행했는데, 그중에서도 파급 효과가 큰 음악 운동을 지속 반복적으로 벌였다: 가요정화운동, 신체제운동, 음악보국운동, 후생음악운동, 국민개창운동. 이 운동에는 조선문예회, 경성음악협회, 조선음악협회, 대화악단, 경성후생실내악단 같은 음악 단체가 동원되었고 홍난파, 현제명을 위시한 서구 음악 제1세대 인물들 대부분이 참여했다. 이들 부역 음악인은 물론 음악계를 구성하는 각종 조직과 체제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기득권 세력은 교육, 공연, 단체는 물론 미국이나 유럽 유학을 매개로 특권층 부역 인맥을 재생산하면서 오늘날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2.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본다. 요즘 아이들도 부르는지 잘 모르는데, 내 또래 사람들은 의심 없이 우리 (전래) 동요라고 알고 불렀던 이런 노래들이 죄다 일본 동요다.

 

학교 종이 땡땡땡···아침 바람 찬 바람에···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 누구십니까···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 사실을 다 자라서 어른이 되고 제국주의 공부를 하기 전까지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이렇다면 내 벗들 상황은 더하지 않을까. 그들 대부분 이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리라. 이런 현실은 우리 공동체 진실에 뚫린 구멍인가, 부역 국가 거짓이 은폐된 장벽인가. 대체 우리는 여태 뭘 하며 살아왔는가. 어디 이뿐일까. 아래 내용은 2019820일 자 한겨레신문 기사다.

 

경기도가 삼각산 솟은 아래 고을고을이 긴 역사 아로새긴 전통의 터전으로 시작되는 도 노래(도가)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은 올해,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반일감정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친일 음악가인 이흥렬이 작곡한 도 노래를 바꾸는 것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라는 이유에서다. 친일 음악가인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와 친일 음악인들이 만든 교가를 바꿔야 한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경기도는 작곡자 친일 논란을 빚은 도 노래 사용을 중단하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새로운 경기도 노래 공정한 공모전118일까지 연다고 19일 밝혔다. 이성호 경기도 문화종무과장은 새로운 도가 제정은 경기도의 친일 잔재 청산 노력의 하나로 시작됐으며 도민의 삶과 애환을 담은 경기도 대표 노래가 탄생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노래는 친일 작곡가 이흥렬의 곡이다. ‘섬집 아기등의 동요·가곡 수백 곡을 쓴 그는 일제강점기 친일 음악 단체인 대화악단경성후생악단에서 활동한 친일 인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강점기에 민족 반역, 부일 협력 등 친일반민족행위를 자행한 4,389명의 목록을 정리해 2009<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는데, 여기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애국가도 교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곡을 쓴 이가 친일 작곡가인 안익태라는 점 때문이다. 애국가는 1930년대 그가 쓴 한국환상곡’ 4악장의 일부다. 작사가는 독립운동가 안창호라는 설과 친일파 윤치호라는 설로 나뉜다. 안익태는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지만,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애국가 논란은 <친일인명사전>이 나온 뒤 꾸준히 제기되다, 최근 들어서는 정치권으로도 번지는 상황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지난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라는 제목의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일제 잔재가 남은 교가 퇴출 운동이 활발하다. 서울 구로중은 올해 초 일제 잔재 퇴출 티에프(TF)팀을 꾸려,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학교 관계자는 학부모와 동문, 학생, 교사 등이 참여해 교가를 바꾸기로 했고 내년쯤 새로운 교가를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전북도교육청은 올해 예산을 확보해 도내 학교 10곳의 교가를 교체할 방침이다. 2020년에는 학교 15곳의 교가를 추가로 바꾼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광덕고, 대동고 등 3곳이 친일 음악가가 작곡한 교가를 바꿨다. 광주일고, 숭일고, 서강고 등 11곳도 교가를 교체하고 있다. 부산시교육청은 지난 3월부터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학교 속 일제 잔재 청산지원팀을 꾸려, 교가 등 학교 속 일제 잔재를 찾아 청산하는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문제는 애국가나 교가 등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애국가 등 국가 상징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는 애국가 교체 운동이 지금보다 더 강하게 일어야 교체를 검토할 수 있다는 태도다. 차호준 행안부 의정담당관은 국민 대다수가 애국가를 국가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바꾸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애국가를 바꾸기 위한 법적 절차는 없다. 남북통일 등이 이뤄져 애국가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면 바꿀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교가 등에 남아 있는 친일 잔재 청산은 처음부터 낙인찍기가 아니라 공론화의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애국가를 부르면 안 되는 핵심적 이유는 비애국적, 반애국적이기 때문이라며 애국가와 관련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공적으로 확인하고 국민이 판단하게 해야 하는데,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권층 부역자 음악인이 만든 국가, 도가, 교가를 바꾸는 일은 사실 신문에 날 일이 아니라 그냥 당연하고 진즉 끝냈어야 할 일인데 광복 80년 다 된 지금에야 무슨 이벤트처럼 벌이는 상황이 안타깝다. 내가 다른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보는 곡절은 사실 따로 있다.

 

이미 교육 부역 서사 원석학원 성남중·고등학교 예에서 보았듯 부역 역사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하다. 일제 잔재를 없애는 사업으로 위장해 세금 지원까지 받으려고 부역 집단이 부리는 협잡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음모론이 아니다. 특권층 부역 집단 본디 행태가 그렇다. 저들은 일상을 일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 권모술수로 부와 명성을 쌓아 제 근본으로 삼는다. 부역 음악사 두 태두 인생이 그 전형이니 그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3. 홍난파는 해방 이전 식민지 부역 음악계 대부였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그는 조선인에게 대동아건설을 목표해 일본 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을 펼치자는 논리로 친일 창작활동을 벌였고, 언론 활동과 악단 활동에 앞장섰다. 그는 스스로 황도 정신을 설파하는 사도를 자처했으며, 조선총독부 각종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방송에 출연해 군국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해방 후 가족과 측근이 부풀리고 날조한 자료에 의거 민족음악가 또는 애국지사로 둔갑시켰다.

 

노동은 중앙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현제명은 홍난파와 더불어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가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총독부 관제 친일 단체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서 가장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다. 그는 1941년 홍난파가 죽자 부역 음악계 최고 권좌에 올랐다. 해방 후에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으로 국내 음악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다. 부역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도 없이 음악계 대부로 군림하면서,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 대상이지 윤리적·역사적 평가 대상이 아니라고 정당화하는 가소로운 특권을 행사했다.

 

극소수 미국 유학파였던 홍난파·현제명을 위시해 특권층 부역 음악인은 거의 예외 없이 개신교도며 일본·미국 유학파였다. 이 배경은 해방 후 음악계가 개신교·친일·친미·반공 이데올로기에 고착되는 데 공헌했다. (홍난파와 현제명 내용은 https://dklee.tistory.com <우리 안의 친일 문화>에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증거가 개신교 복음성가 속에 들어 있는 <부럽지 않네> <성경목록가>. <부럽지 않네><용감한 수병>이라는 일본 군가고, <성경목록가><철도창가>라는 관제 가요다이 문제에 관해 장신대 홍정수 교수는 정식 찬송가에서는 일본 군가가 이미 삭제되었고, 구전되는 복음성가는 강제할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두었는데 문제가 된 이상 자연스럽게 빨리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쩐지 변명처럼 들린다.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특권층 부역자 김활란이 작사한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와 주요한이 작사한 <어머니의 넓은 사랑>은 그대로 불린다. 심지어 전자에는 김활란을 미화하는 해설까지 붙여 놓았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 땅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라 일컫는 보수 교단에 속한 음악인들은 거의 모두 홍난파나 현제명이 이루어 놓은 음악 부역 전통에 진심이라 할 만하다. 이들이 하는 음악이 교회를 매개로 대중 정서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누군가는 반드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끌어안고 반제 서사를 써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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