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ㅣ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평점 :
신이 모세에게 준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그 장소, 네가 40년 동안 지겹도록 다녔던 먼지 나고 더러운 그 장소가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의 전환이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네가 서 있는 그 곳’의 의미를 지닌 ‘마콤maqom’을 거룩한 장소, 천상의 장소라고 여겼다. ‘신과 만나는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삶의 장소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장비 역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난 40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였다. 신은 우리에게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224-225쪽)
본문 내용과 같은 메시지의 제 글, 『중용416』 한 대목을 인용하겠습니다.
인막불음사야 선능지미야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사람이 마시고 먹지 않음이 없으나 그 맛을 아는 경우가 드물다.
·······
5.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시고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단순히 생명 유지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구태여 맛을 거론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분위기대로라면 맛과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마시고 먹을 때 그 음식의 맛을 알고, 모르는 것은 대체 어떤 맥락에서 중용의 도를 설명하는 핵심 사례가 되는 것일까요? 아마도 맛에 탐닉하는 자들과 맛조차 모른 채 허겁지겁, 또는 딴 생각에 사로잡혀 마시고 먹는 자들의 극단을 염두에 두면서 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자들은 자체 생명인 음식의 고유한 향미를 넘어선 즐거움을 탐하므로 중용을 어겼습니다. ‘아랫것’들은 맛은커녕 연명에 급급하여 생명인 음식의 가치로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음식의 형태로 마주선 생명과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수운 최제우의 사상에 동의함으로 말하건대, 음식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하늘을 기르는[양천養天] 거룩한 사건이 마시고 먹는 것입니다. 이런 어법대로라면 음식의 맛을 아는 것은 바로 그 거룩함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마시고 먹는 사건의 거룩함은 유미주의와 실용주의를 가로지르는 경계에서 피는 꽃입니다.
6. 마시고 먹는 일상의 사소한(!) 일을 예시하신 공자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길고 깊게 수런거릴 일 없습니다. 중용 자체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그렇고, 그 평범함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공간이 바로 사소한 일상이니까 그렇습니다. ‘사소함은 과소평가된 위대함’이란 사실을 간파한 통찰이 숨 쉬고 있습니다.
마시고 먹는 일은 관통과 흡수로 요약되는 중용의 본령이 가장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는 장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놀이와 잠, 대화, 성性, 호흡 등도 동일한 중용 도량道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이런 일상의 거룩함에 터 잡지 않은 가치,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 사상, 종교 따위의 이른바 거룩함은 죄다 뜬 구름일 따름입니다. 그야말로 사소한 예 하나로 대소大小, 성속聖俗 이분법이 즉각 사망 처리됩니다. 지우知愚, 현불초賢不肖 이분법은 더 이상 숨 쉴 수 없습니다.
7. 이치와 달리 현실 세상은 수직이분법의 세상입니다. 공자의 절망, 중용의 좌절은 바로 세상을 둘로 갈라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소수 집단이 권력, 돈, 지식을 독식한 데서 연유합니다. 그들의 독단은 언제나 도를 넘어섭니다. 공자의 앞에서도 그러하고, 오늘 우리 앞에서도 그러합니다.
국민은 죽어나가는데 연일 웃는 얼굴 아니면 짐짓 엄숙한 얼굴로 대문짝만 하게 신문,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도리어 국민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숭배든, 복종이든, 희생이든, 표든·······대놓고 함부로 취합니다. 음식 맛 아닌 제 입맛에 맞추어 거리낌 없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독식사회를 구축해 갑니다. 걸핏하면 편향, 변덕, 무지를 들먹이며 ‘아랫것’을 꾸짖습니다. 자신들만 중용의 도를 실천한다고 스스로 속이면서 바로 이 순간도 세상을 위아래로 갈라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특별한’ 무리들은 매판·독재·분단고착을 통해 나라를 망치고 도를 망칩니다. 이들에 맞서 자주·민주·통일을 이루려면 어리석다, 모자라다 낙인찍힌 사람들, 평범한 변방의 사람들이 사소한 일상에서 삶의 감각을 되찾아야 합니다. 모국어 맞춤법은 틀리면서 영어 몰입 교육 운운하는 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모국어 구사 거의 전부가 비문이면서 5개 국어 한다고 떠드는 자에게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매일 마시고 먹는 음식의 맛부터 제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혁명입니다. _『중용』제4장 <특별함이 도를 망친다>
40대 중반에 늦깎이로 한의대를 갔습니다. 한의대 교수에게도 재학생에게도 제가 이상해 보였을 테지만 제게는 한의대가 참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끈 것은 많은 학생들이 『우주변화의 원리』란 책을 끼고 다니며 열심히 읽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문사회과학적 기본 소양을 갖춘 저로서는 도무지 수긍하기 어려운 풍경이었습니다. 나이 어린 선배들에게 왜 읽는지, 대체 이해는 하는지 물어봤습니다. 제대로 된 대답은 그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대체로 그들은 그들의 선생이나 선배들이 특별한 책이라 했기 때문에 막연히 뭔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읽고 또 읽는 상태였습니다. 물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어느 날 그 책은 사라지고 맙니다. 아마 지금도 그 책은 유령처럼 한의대를 배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특별하다는 것’의 정체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해 아래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특별하다는 것’, 그러니까 특별하다고 금 그어 구분한 것이 있을 뿐입니다. 구분하는 순간 그 속은 텅 비고 맙니다. 한사코 비의秘義로 감추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깨달음도 구원도 일상의 평범한 삶, 그 한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설혹 특별한 장소, 특별한 방편이 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깨달음도 구원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특별하다고 금 그어 구분한 인간들이 저지른 패악 때문에 지구촌의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가장 작은 사람들 200만이 거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그저 작은 촛불이 하나 들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작은 촛불을 든 작은 사람들의 웃음어린 함성은 저 비웃음을 단박에 날려버렸습니다. 작은 사람들이 서 있었던 그 광화문이야말로 거룩한 곳입니다. 작은 사람들이 들고 있던 촛불이야말로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작은 사람들이 곧 신입니다. 작은 촛불이 곧 이적이며 기사입니다.
축제가 끝난 고요한 월요일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작은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손에는 촛불 대신 침이 들려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이 질문이 제 마음을 울리는 찰나마다 제 손의 침은 촛불이 됩니다. 촛불이 되는 찰나마다 저는 신입니다. 찰나마다 신으로서 저는 그대와 다시 만납니다.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특별한 곳의 특별한 한 사람을 지키려 삼청동을 향하는 좁은 골목길까지
차벽을 치고 병력을 깔아 놓은 '식민지 순사' 집단.
저들이 지키는 것은 한 범죄자와 매판독재체제다.
여기 촛불을 든 이 평범한 사람들은 거룩한 신으로서 함께 공화국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