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경 이들은 감나무다. 몇 종류 과일을 먹고 그 씨를 그냥 쓰레기봉투에 던져넣기가 죄스러워 빈 화분 흙 속에 묻었는데 어느 순간 싹 난 광경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어떤 친구가 홍시 씨를 머리에 인 채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알았다. 이들은 주어진 조건을 따라 지상을 살고 있다. 감나무임에도 영락없는 초본식물, 그러니까 풀 자태를 취하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자아낸다. 경이롭다가도 송구스럽다. 가만히 들여다보다 나지막이 소리 내어 말을 건넨다: 부끄럽습니다. 고맙습니다. 듣습니다. 한 말씀. 꼭 똑.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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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어느 비건이 한 이 말을 <시사인>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2초 정도 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남이 모르거나 가닿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 알거나 가닿을 때 짓는 표정과 자신이 모르는 줄 모르면서 남이 아는 얘기를 할 때 짓는 표정은 아마도 같거나 적어도 비슷하지 싶다.

 

저 말은 얼굴이 대체 뭘까를 화자가 진지하게 생각해본 뒤에 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육식하는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비범해 보이는 저 말도 피상적일 가능성이 작지 않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얼굴이 있고,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다는 통속한 상식만으로 비범해 보이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과연 식물 또는 그 이전 생명체에게는 얼굴이 없을까? 동물이 지니는 얼굴을 기준으로 삼으면 딱 잘라 그렇다고 대답하는 데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대체로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며 무엇에 쓰이는지 상식으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는 아무나 생각할 수 없어서 문제가 아연 어려워진다.

 

동물과 식물은 각각 다른 원리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 동물은 기관 중심 시스템이다. 이동하는 생명체로서 선택하고 집중하는 데에 비교 우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얼굴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식물은 모듈 분산 시스템이다. 이동하기 힘든 생명체로서 모든 조건을 견디며 생명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얼굴 유무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동물 중심주의, 그러니까 종 편견에 해당한다. 얼핏 들어도, 정색하고 들어도 얼굴 없는 생명체를 낮게 평가하는 배음이 들려온다. 진실은 그 반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무지 상태다. 전방위·전천후 생존 솔루션을 구축한 식물이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다. 모든 곳이 얼굴이니까.

 

여기에 반대할 수 있는 관용을 베푼다. 반박을 기대한다. 일단 다음 이야기를 더 하겠다. 얼굴이란 과연 무엇인가? 얼굴 전문가는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전문가가 일제히 놓치고 있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얼굴이 생식기라는 진실이다. 이 진실을 놓친 실패 또한 종 편견에서 발원한다. 좁은 의미 생식기가 얼굴에서 멀찌막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이다.

 

식물 생식기는 이와 다르다. 꽃은 인간 미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식을 위해 아름답게 핀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꽃이라 부르는 부위는 꽃잎, 암술, 수술, 꽃가루, (변형된) 꽃받침 모두를 포함한다. 이 통칭하는 꽃은 생식기와 얼굴을 함께 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식물은 좁은 의미 얼굴도 지니고 있다. 그 얼굴은 곰팡이 얼굴 버섯에서 왔다.

 

버섯이라면 인간은 우선 식품으로 표상할 뿐 별달리 생각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봐야 항암 효과 운운, 그리고 송로버섯 운운. 버섯은 곰팡이 생식기다. 곰팡이는 지구 생태계를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설계한 창조자다. 이 창조자에게서 버섯이 왔고, 식물 꽃이 왔고, 동물 얼굴과 성기가 왔다. 인간은 버섯이 인간 성기를 닮았다며 무식하게 킥킥댄다.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간다. 비건은 버섯을 먹는가? 버섯을 식물이라고 생각하고 생각 없이 먹고 있음이 틀림없다. 버섯은 식물이 아니다. 곰팡이가 식물이 아니니 당연하다. 구태여 따진다면 버섯은 본성에서 동물 쪽으로 기울어진다. 생김새와 질감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동물 본성이 여기서 발원한 진실에 무지해서 인간은 뒤집힌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마지막으로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고 있는 태도를 전복해야 한다. 먹는 행위는 자체로서 먹이가 되는 생명과 소통하는 제의이기도 하다. 제의란 인간 본성에 가닿는 행위다. 거룩하다. 거룩한 만큼 신난다. 얼굴 있네, 없네, 논의 따위가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야 한다. 먹는 행위를 도구화하는 주제에 감히 동물을 먹는다고 비난하는 우월감은 참으로 가소롭다.

 

비건이 동물을 먹지 않아서 뭐라는 거 아니다. 식물과 식물 이전 생명을 함부로먹기 때문에 시비한다. 동물권을 말하려면 식물권이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한다고 다툰다. 동물 존중하는 일과 식물 성찰 없이 먹는 일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톺는다. 부분 지식은 오류다. 관통하는 지식이 지혜를 낳는다. 스러지는 순간까지 관통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정색하고 다시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얼굴이 있다. 얼굴은 생식기니까. 생식은 생명 궁극 본성이니까. 궁극 본성을 펼쳐내는 지성소를 두고 동물 중심주의가 자랑스레 지절거리는 소리를 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화급하다. 이렇게나마 외친다면 귀엽게 봐주기로 한다: 식물과 그 이전 생명을 위해 우리 동물 먹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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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1990년대 후반 나는 한의대 입학을 위한 수능 공부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절에서 한 적이 있다.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요사채 속인들이 울력에 동원되는 일은 오래 묵인된 관습이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부분 공부하러 들어온 사람들인데 승려들이 그런 배려 없이 일을 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런 사건이 느닷없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면서 이따금 예불도 이끌고 요사채 있는 속인들과 족구도 하면서 안면을 튼 객승이 하나 있었다. 평소 자기가 두 바퀴 구른경지에 도달했다고 큰소리치던 자였다. 점심 식사 마치고 어느 처사 방에 모여 차 한잔하고 있는데 종무소 총무가 와서 법당 잡역 좀 도와달라 청했다.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그 객승이 나타나더니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모두 어안이벙벙해하는데, 사람들 눈길이 내게로 쏠렸다. 내가 그 객승보다 한참이나 연배가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조용히 사람들을 이끌고 법당으로 이동해 일을 마쳤다. 돌아오면서 한 청년에게 일렀다. “아까 그 스님한테 말 전해라. 나한테 사과하라고.” 청년이 돌아와 말했다. “사과할 테니 스님 방으로 오시래요.” 내가 답했다. “사과할 사람이 와야지 받을 사람이 가는 법은 없다.”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노기등등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한껏 겸손한 표정으로 죄송하다고 했다. 내가 불교 신도였다면 그가 내게 사과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는 평소에 불자들이 뵙기를 청하면 삼배를 요구했다고 말기에 말이다.

 

이 시건방진 객승은 계를 받고 속가에 갔을 때 어머니한테 삼배를 받았다고 했다. 그가 과연 예외적 인물일까. 무슨. 계를 받아 정식 승려가 되면 부처님 가문 사람이 되므로 속인과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승려가 얼마나 될까. 이런 특권의식은 비단 불승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개신교 목사도, 천주교 신부도 본질이 같다. 이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성찰하지 않는 데에는 이런 오만이 자리 잡고 있다. 도덕과 윤리, 심지어 법 위에 있다고 믿는다. 부처나 하느님 법을 따르지, 세속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지 않던가. 초월자와 합일시키는 이 오만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고 정신병 일종이다. 전광훈 입에서 튀어나온 하나님도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말은 웃자고 하는 수사가 아니다. 저들은 무도덕 경지에서 논다.

 

특권층 부역자로서 목사, 신부, 승려가 무슨 부역 행위를 저질렀으며, 사과하지 않고 역사를 왜곡했는지 비교적 소상하게 살폈다. 앞으로도 이 역사는 전복되지 않고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거대 통속 종교 프레임을 깨뜨리지 않는 한 변화를 기대하는 일은 난센스다. 프레임을 그러면 누가 깨뜨리는가? 목사, 신부, 승려는 할 수 없다. 초월적 기득권에 올라탄 특권층이기 때문이다. 각성한 평신도 부역자가 의문을 품음으로써 변혁은 시작된다. 가령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기도 올리고 있는 또 다른 평신도에게 묻는다: 대한불교조계종이 1941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총독부 승인을 얻어 부역승들이 창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총독부가 승인했다면 그 종헌과 조직 성격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하십니까? 해방되면서 종단을 자진 해체하고 대중 의지를 물어 재창종했어야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단도직입으로 답할 수 있는 평신도는 거의 없으리라 본다. 이 불모지에서 누군가가 첫발자국을 떼어야 한다. 각성한 평신도 부역자 하나가 어렵사리 또 하나와 손잡을 때 비로소 네트워킹이 열린다. 나아가 비인간 주체와 더불어 일궈내는 네트워킹이 열린다. 이 나지막한 영성 연대만이 제국주의와 부역 식민주의 종교 흑역사 뿌리를 뽑아낼 수 있다. 모두 그린 샤먼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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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산은 한양도성 주산이고, 자하(창의)문 고개를 경계로 서쪽에 인왕산이 있다. 인왕산은 조선왕조 수호 산으로 불교 금강신 이름을 붙였고, 무악재 고개를 경계로 서쪽에 안산이 있다. 조선을 개국할 무렵 한때 이 안산을 주산으로 하여 도읍하려 했다고 한다. 그랬더라면 지금 연세대학교가 있는 자리에 궁궐이 들어서고 이를 중심으로 한양도성이 조성되었을 터이다. 풍수적으로 그만큼 좋다는 뜻일 텐데 풍수 잘 모르는 나로서는 걷기 좋은 숲이 확실하다는 말 정도만 할 수 있다. 다른 경로로 다섯 번 걸었는데 모두 좋았다. 산 무서워하는 아내와 함께 오면 딱 알맞겠다고 이번에도 생각했다.

 

안산은 생긴 모양이 말안장()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을 파자하면 혁명과 안정이라는 뜻이 나온다. 혁명해서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지닌 패거리가 이 산을 끼고 돌며 더불어 놀았을 법하다. 마치 도봉천 계곡 일대에서 놀았던 기호 노론 패거리처럼 말이다. 시대 배경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한양도성 주산이 될 수도 있었던 산에 그런 야심을 새겨넣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서인이라면 말이다. 맞다. 서인이 그랬다.

 

이번에 안산으로 향한 까닭은 요즘 내가 계속해왔던 바로 그 제의 때문이다. 물론 현 부역 세력 뿌리인 서인과 안산에 얽힌 서사가 대상이다. 지도 보며 예정했던 바와 달리 미우관과 평화학사 사이 연대동문길을 따라 연세대학교 교정 동쪽에서 진입해 안산으로 향한다. 조금 가다 왼쪽으로 돌면서 왼쪽을 보니 제법 울창한 숲이 나타난다. 나는 직감적으로 청송대라고 알아차린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연대에 강의하러 드나들면서 말로만 들었던 그 청송대를 30년 만에 뜻하지 않게 들어간다. 다양한 버섯들과 인사하며 이리저리 거닐다가 아주 조그만 도랑물을 발견한다. 호젓한 곳 택해서 정화 신목 버드나무 가지를 삼가 심는다. 간절하게 기도한다. 안산과 그 앞 벌판에 육중하게 자리 잡은 이 학교 숲이 정화 네트워킹을 고요한 함성으로 펼쳐주기를.



숲길은 연대 교정에서 안산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처음 얼마간 계속되는 소나무 숲이 참 아름다웠다. 내가 택한 길이 안산 서북 사면 쪽이기도 하지만 장마철이어서 촉촉한 분위기가 알맞게 배어 있었다. 주로 작디작은 버섯들이 곳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천천히 가장 긴 경로를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수시로 길을 놓쳤지만 작은 산에 워낙 많은 길을 낸 터라 금세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길이 막혔다 포기한 순간 나타난 쪽문을 통해 다시 연세대학교 교정으로 돌아왔다.

 

백양로를 그리며 길 따라 걷다 보니 하나둘 기억이 살아났다. 물론 백양로는 위치만 같을 뿐 대부분 생경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학교 측에서 교수·학생 의견을 무시하고 역사와 생태를 뒷전 한 채 재창조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백양로라는 이름이 발원한 백양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다고 하겠지만 은행나무가 마치 남의 집에 들어온 불청객처럼 엉거주춤하다는 내 느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천억 원이란 돈이 어디서 나와 이런 토목을 벌였을까. 140년 전통 영역을 싸구려 영화 세트장처럼 테라포밍한 이 살풍경이 식민지 공학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단골 음식점에 앉아 국수를 시킨다. 먼저 막걸리부터 달래 한 잔 그득 따른다. 벌컥벌컥 소리 내어 마신다. 영혼이 발하는 신음을 목이 내는 소리로 바꾸니 답답함이 조금은 풀린다. 중첩 식민지 쌍것으로 태어나 똑 이와 같은 그림을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내가 뜬금없이 무섭다. 찰나마다 더 새로워지고 순간마다 더 즐거워지는 중독 제국에서 나는 좀비로 살고 있지 않은지 와락 겁난다. 가족과 약속한 장소로 향하는데 자꾸 목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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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부역 서사

 

1. 통속 불교에는 아예 사회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색공불이(色空不二)’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를 읊조리며 제국에 부역하고 독재에 부복하는 일에 기탄없고 성찰 없다.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만 눈독 들이는 사판승은 그렇다 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는 선승조차 군홧발이 절 앞마당을 더럽힐 때 자기 청정을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유지한 불교 조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생제도는 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사실 이런 문제는 모든 종교에 두루 통한다. 하필 불교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논리적 근거는 없지만 이 땅에 가장 먼저 들어온 고등종교로서 그동안 호국불교를 자부하며 쌓아온 전통은 일제 부역 논리 앞에서 무엇이란 말인가. 지킬 나라가 일본제국인가. 제국이 식민지 종교 따위가 지킬 대상인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으니 더는 빈말을 말아야겠다. 그저 부석암 주지 임혜봉이 기독교사상 20118월호에 게재한 글 전문이나 인용한다.

 

불교계의 친일은 한일합병조약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최취허(崔就墟) 스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에 노력한 일본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에게 감사장을 주었다. 승려의 입성 해금 문제는 다른 학자가 이미 지적했듯이 갑오경장(1896) 등 당시의 사회적 개혁 분위기로 볼 때 일본 승려의 활동이 아니었더라도 조만간 해결될 문제였다. 최취허는 1911년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도 일왕과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식민 통치를 성덕명정’(聖德明政)이라 찬양하였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직후 친일한 승려로는 이회광(李晦光, 1862-1933) 스님이 있다. 그는 병합 직후인 1910106,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조약을 조인하였다. 나라가 강제로 일본에 병합된 지 45일 만에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에 복속시킨 것이다. 이회광은 당시 조선 승려들로부터 매종역조’(賣宗易祖: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꿈)의 망동이라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일합병조약 초창기에 아직 일제의 친일이 강요되기 전 한국 승려가 행한 대표적인 친일 행적은 두 가지를 열거할 수 있다. 첫째는 총독부가 191111월 사찰령을 반포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일왕 메이지(明治)가 죽었을 때(1912730)이다.

 

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하자 30대 본산의 하나인 강화도 전등사의 주지 김지순(金之淳)은 사찰령 시행은 메이지(明治) 일왕의 강은홍택(降恩鴻澤)”이라는 내용의 성은(聖恩)으로 사법(寺法)인가라는 글을 <조선불교월보> 10(191211월호, 2~4)에 발표하였다. 이는 한국 승려가 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일본 메이지 일왕의 성스러운 은혜라고 찬양한 것이다.

 

일왕 메이지가 죽었을 때도 자진해서 친일한 승려가 있었다. 1912730, 일왕 메이지가 죽자, 서울 봉원사의 주지 이보담 스님은 메이지의 위패를 법당에 봉안하고 절 안의 스님 60여 명을 독려해서 독경하였으며, 장례일에는 추도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49재까지 지내주었다. 이때 이회광 스님과 양평 용문사의 주지 김용태 스님도 메이지를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처럼 합병 초기에 자진하여 친일한 한국 승려들은 극소수이다.

 

일제가 조선 민족의 황민화(皇民化:日本化) 운동을 전개한 것은 제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재임: 1931.7~1936.7)이다. 우가키는 만주사변(1931.9)과 그 결과로 성립된 만주국(1932.3)을 토대로 대륙을 침략하려는 일본 군부의 야망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식민지 조선에 황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심전(心田)개발운동이었다. 우가키가 주창한 심전개발운동은 조선 민족의 순량화(順良化)와 일본화(日本化) 작업의 일환이었다.

 

불교계는 이 운동의 심전이란 명칭이 불경에서 유래하였다 하여 호감을 표시하고 일부 승려들이 적극 호응하였다.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한 승려는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본산 주지 5명과 학승 2명이었다. 즉 용주사 주지 강대련, 봉은사 주지 강성인, 범어사 주지 오리산(吳梨山), 화엄사 주지 정병헌, 월정사 주지 이종욱 스님 등과 <불교시보>의 발행인 김태흡(법명 대은) 및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 권상로(權相老) 스님이었다. 특히 김태흡과 권상로는 심전개발 관련 강연과 저술로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불교계의 친일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일전쟁(1937.7)이 시작되면서부터 일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계에도 노골적인 친일을 강요하였다. 더구나 중앙교무원의 주요 임원 스님들이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불교계 전체가 친일 대열에 휩쓸려 들어갔다. 중일전쟁 초기 불교계의 친일 행위로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열거할 수 있다.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의 31본사 주지 대표 이종욱(월정사 주지)과 전국 본사 31개 사찰은 1937725일과 812, 전 조선의 말사(末寺)와 포교소는 811회 오전 5시를 기하여 일제히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을 봉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전 조선의 31개 본사와 136개의 말사의 승려 7천 명이 일본군의 승리와 일본의 국위선양을 위한 기원제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724일에는 교무원의 재무 이사 황금봉 스님이 조선군사후원연맹 결성식에 참석하였다. 이 연맹은 후방의 임전 체제 확립을 위해 만든 단체인데 불교계도 참석하여 일본군을 후원하는 일에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총독부에서 중일전쟁과 관련된 전국 순회 시국강연반을 결성하여 193786일부터 2차에 나누어 13도 각처를 순회 강연했는데 강사는 1차에 22, 2차에 59명이 동원되었다. 전국 시국 강연회에는 권상로가 조선 불교계의 대표 연사로 1차는 경북지방, 2차는 함경북도 지방을 순회 강연하였다.

 

조선 불교계에서는 독자적인 시국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85일 서울 개운사에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 법요를 한 후 박성권, 김경주, 김영수 스님이 시국 관련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86일에는 부민관(훗날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국기요배 등 일본식 국민의례를 한 후 이종욱 스님의 사회로 시국에 대해 의미심장한 개회사를 하고, 권상로와 김태흡(대은), 두 친일 학승이 열변을 토하여 23백여 청중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1개월째인 193788일부터는 이종욱, 임석진, 황금봉 등 조선 불교계의 주요 간부 스님들은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부대의 환송을 나갔다. 이날 이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중일전쟁에 출정하는 일본군 파견부대의 환송 행사에 참석하였다.

 

중앙교무원은 일본군 부대의 송영과 아울러 전국 사찰에서 국방헌금과 위문금도 거두게 하였다.

1937831일 현재 교무원이 집계한 본사별 시국 대처 보고 일람에 의하면 각 본사에서는 725일과 81일에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 법요를 거행했다. 여기에 참석한 인원은 3,000명이었고, 시국 강연을 한 곳은 위봉사(87), 은해사(87), 성불사(726) 등이었다. 이때 거두어진 국방헌금은 누계 59860, 위문금은 합계 75124전이었고, 일본군 전사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낸 본사는 성불사(819), 영명사(永明寺, 822), 법흥사 그리고 사리원의 고산사(高山寺)등이었다.

 

19379월 중 조선 사찰에서 헌납한 국방헌금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등사 본·말사에서 156, 은해사 본·말사에서 11350, 중앙불교전문학교 직원 일동이 16, 서울 각황사에서 27, 성불사 본·말사에서 4269, 해인사에서 100, 해인사 소속 암자인 삼선암에서 250, 약수암에서 5원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이어 김천 직지사에서 12, 남원 실상사에서 465, 선산 대둔사에서 12, 산청 새동포교당에서 740, 안동 포교당에서 13350전과 금가락지 1개와 천인침(千人針) 1매를, 철원 심원사에서 17235, 강릉포교당 30, 진주읍성외 불교부인회에서 105원 등을 헌금하여 합계 97788전이었고, 누계는 무려 354819전에 이르렀다. 이후 조선 불교계의 국방헌금은 19458,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불교계에서 193712월 중국 화북지역에서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는 북지(北支:북중국)황군위문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중앙교무원에서는 이종욱의 주도로 전국 사찰에서 경비를 조달하여 북지황군위문사로 최영환(최범술의 식민지 시대 이름), 이동석(선암사 승려), 박윤진(서울 흥국사 승려) 세 스님을 선발하였다. 이 세 스님은 모두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엘리트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젊은데다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황군위문사 세 스님은 출발 전에 총독부, 용산의 일본군사령부 등에 가서 인사를 하고 음악가 문학준과 윤건영, 이종태, 그리고 총독부 직원 1명 등 모두 7명이 19371222일 서울에서 출발해 한 달 동안에 화북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하고 1938118일 돌아왔다.

 

193871,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창립총회가 부민관에서 열렸고, 이어서 정동연맹봉고제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서울에 있던 최고의 일본 신사)에서 개최되었다. 31본사 주지 대표 이종욱 스님은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을 대표하여 두 곳의 행사에 모두 참석했다. 이종욱 스님이 주도하는 중앙교무원에서는 정동연맹의 회원 단체로서 연중 세 번 네 번 실시되는 총후(후방) 보국 강조 주간에 전 조선 사찰이 그 실시 요항을 잘 따르고 협력하도록 지도하였다.

 

불교계의 가장 이채로운 친일행각의 하나가 탁발 보국이다. 탁발은 발우에 음식을 얻어 식사를 해결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불교 전래의 독특한 전통이다. 그런데 불교 고유의 탁발이 친일하는 데까지 이용되는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속칭 탁발 보국으로 불린 이 기이한 친일 행적은 중일전쟁 2년째에 접어든 1939년 초 황해도의 본산 성불사에서 시작되어 19416월까지 3년 동안 전후 여섯 차례나 실행되었다. 실례를 들면 황해도의 대본산 성불사에서는 본·말사 주지와 승려들은 1939년 신년을 맞이하여 부처님 앞에 일본군 전몰장병 영령을 위한 천도제를 지내고, 황군(일본군) 무운장구 기원식을 3일간 봉행하였다. 그리고 각 사찰의 주지와 대중 스님들이 탁발보국대를 조직하여 관내를 순회 탁발하여 모은 총액 17992전을 관내 경찰서, 신문사 지국에 전달, 헌납하여 일본군을 위한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그 외 탁발 보국을 한 곳은 함남 흥남포교당에서 1939775일 동안 탁발한 3135전을 흥남경찰서에 국방헌금으로 내놓았다. 또 부산사원연합회의 탁발보국대(1939112, 6715), 직지사의 탁발보국(194011, 2백 원), 함북 경원군 월명사(19412, 50) 등지에서 탁발로 모금한 돈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다.

 

중앙교무원에서는 총독부에서 만든 <황국신민의 서사>를 모든 불교도가 외우도록 하였다. 김태흡 스님이 발간하는 <불교시보>에서는 193811일 자로 발행된 제30호부터 게재하였고, 중앙교무원의 기관지 <불교>에서는 19391월호(19)부터 <황국신민의 서사>를 꼬박꼬박 실었다.

 

1940년은 중일전쟁 4년째이자 일본에 있어선 황기(皇紀) 26백 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은 황기 2600년을 대대적으로 경축하였는데 조선 불교계도 이에 호응하였다. 그래서 기관지 <불교> 20(19401월호)의 첫머리에 발행인 김삼도 스님이 우영(宇英)이란 필명으로 황기 1600년을 맞이하여라는 친일 권두언을 실어 군국 일본제국에 충성을 바쳤다. 내용은 일본식 황도불교(皇道佛敎)’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진제’(: 진리의 명제)라고 표현하는 곡학아세의 친일 곡필을 하기도 하였다.

 

황기 2600년에 즈음하여 대은(김태흡) 스님이 발간하는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불교시보>도 대대적으로 친일 기사를 1면에 게재했다. <불교시보> 194011일자 1면에는 일본 천황 부부의 사진과 함께 흥아성업건설의 신춘, 천은 사해팔굉에 보점이란 제하에 황기 2600년을 맞이하여 일본 천황과 황실의 만수무강과 번영을 기원하며, 아울러 중일전쟁에 승리하여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며 부르짖고 있다.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란 친일 일색의 연두사까지 실었다.

 

일본은 국민과 식민지 백성 등에게 일본의 우월함을 강조하여 중일전쟁에 승리하고자 19401110일과 11일 도쿄 궁성에서 황기 2600년의 기념식을 거국적으로 개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일본, 조선, 대만 등지의 각계각층의 대표 약5만 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조선 불교계에서는 31본사 주지 중 각 도를 대표하는 9명이 도쿄로 건너가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총독부의 인가로 194151,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하였다. 종정은 오대산 상원사의 조실 한암 선사가 추대되었고,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은 월정사 주지 이종욱(지암)이 히로다 쇼이꾸(廣田鐘郁)란 창씨명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종정 사서(司書)는 교무원 상임이사 허영호(창씨명 德光允), 재무부장은 통도사 주지 박원찬(창씨명 新井圓讚), 교무부장은 송광사 주지 임석진(창씨명 林原吉), 서무부장은 묘향산 보현사 주지 김법룡(창씨명 香川法龍)이 취임하였다. 종무총장 히로다 쇼이꾸(이종욱)와 교무, 서무, 재무부장은 <불교> 31(1941121)에 취임사를 발표하고 집무를 시작하였다. <불교> 31집의 서두는 조선불교 조계종의 출범에 따른 이들의 사진과 함께 친일 권두언과 취임사로 장식하였다. 이들은 자축 권두언에서 재출발신체제를 부르짖었다. 이들이 말하는 재출발은 친일불교로서의 재출발이었고 신체제는 일본의 결전체제에 적극 호응하는 총후보국체제로서의 신체제였다.

 

조선불교 조계종이 출범한 그해(1941) 128, 일본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을 도발하였다. 이에 조계종 종무총장 이종욱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바로 그날, 소식을 듣자마자 전 조선 15백여 개의 사찰에 1215일부터 태평양전쟁 연전연승을 위하여 기도 법회를 열어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도드리라는 통첩을 발하였다. 조선불교 조계종의 총본사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서는 솔선수범하여 1223일부터 황군(일본군) 전승 기도회를 열어 승려와 신도 2백여 명이 궁성요배 등 친일 의례를 시작으로 기도 법회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불교 조계종은 <불교> 32집의 신년호(194211)신년을 맞이하는 전시의 각오라는 제목의 친일 시사문을 게재하여 불교도들에게 전시의 각오를 다지도록 독려했다.

 

한편 조선불교 조계종은 두 번째 종회인 19411117일 일본군에 군용기 한 대를 헌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사찰의 스님과 신도들에게 헌납기금 53천 원을 각 본·말사별로 할당하여 징수하였다. 이렇게 거의 강제적으로 모금한 5만 원은 비행기 대금으로, 3천 원은 국방헌금으로 일본 군부에 헌납하였다. 헌납식은 1942131일 거행하였다. 이날 일본군의 특별 배려로 조선불교호로 명명된 구칠식(九七式) 전투기 1대를 용산의 일본군사령부에서 종무총장 이종욱 등 조선 승려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헌납식을 봉행했다. 불교계의 비행기 헌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묘향산 보현사와 통도사, 그리고 경남 각 사찰에서 각각 비행기 한 대씩을 헌납하였고, 조선불교 조계종에서 2차로 비행기 한 대를 헌납하였다. 이로써 조선 불교계에서는 태평양전쟁 기간 모두 군용기 5대를 일본에 헌납하였다. 보현사, 통도사 등에서 헌납한 비행기 대금은 8만 원씩이었는데 이 금액은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면 쌀 45백 가마니값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면서 종래의 전시체제를 한층 강화하고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하 총력연맹)으로 재출발시켰다. 총력연맹은 1941128일 일본 천황이 미·영에 선전포고한 것을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이라 하여 떠받들었고, 종교계에는 태평양전쟁 필승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봉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계에서는 매월 8, 전국 각 사암에서 대동아전쟁필승기원법요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조선불교 조계종은 총력연맹의 전시체제에 협력하여 황민 정신의 앙양, 징병·학병의 독려와 후원, 증산, 국방헌금과 공출, 군인 원호 등 총후 총력 운동을 전개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의 전시체제에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승려들은 중앙교무원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간부 스님들과 31본사의 주지들이었다. 이런 연유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승려들도 중앙교무원과 조선불교 조계종의 주요 임원들과 19377월 중일전쟁 이후 본사 주지로 재직한 스님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친일 활동을 한 권상로와 김동화 스님, 그리고 기관지 <불교>를 친일 성향으로 편집한 김삼도와 장도환, <불교시보>를 친일 신문으로 발간한 김태흡 스님, 복지황군위문사였던 이동석, 박윤진, 최영환(최범술) 등의 친일 행적도 두드러지게 많았다.

 

중일전쟁 이후 불교계의 최고 친일 거두로는 이종욱(지암) 스님을 첫손가락에 꼽고, 조선불교 조계종의 서무부장 김법룡, 재무부장 박원찬, 교무부장 임석진(기산) 스님의 친일 행적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일제 초·중기의 승려로는 이회광과 강대련 스님이 친일 행적을 많이 남겼다. 이들 중 두 승려의 친일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종욱(1884-1969)은 월정사 재직 승려로 3·1운동 때는 이탁(李鐸) 등과 함께 ‘27결사대의 일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한성임시정부에 불교계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의 의원(강원도 대표)이 되었으며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에 관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런데 이종욱은 1923년부터 월정사 부채 정리에 공을 세워 월정사 주지가 되었고, 중앙교무원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산 주지 대표가 되어 조선불교 조계종의 총본산 태고사를 건립하고, 종무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종욱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친일로 전향하여 본격적으로 친일하였다. 그는 월정사 부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총독부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차츰 친일 성향을 드러냈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에는 항일 투사에서 친일 거두로 변신하였다.

 

이종욱이 남긴 친일 행적으로는 11편의 친일 시사문이 <불교>지와 <불교시보>에 게재되었고, 조선임전부국단·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의 친일 단체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국방헌금, 군용기 헌납,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 일본군 위문 등에 앞장섰고, 일제의 조선인 징병제 시행과 학병 권유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 사찰의 범종 및 기타 금속류 공출에도 적극 나서 일본군의 무기 제조에 필요한 범종, 바라, 경종, 촛대, 향로, 다기 등 절 안의 모든 금속을 일본 군부에 공출·헌납하는데 앞장섰다.

 

불가사의한 것은 변절한 친일파였던 이종욱이 광복 후인 1977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인 국민장을 서훈받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이종욱 등 선항일 후친일의 인사 19명의 건국훈장이 취소되긴 했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의 서훈 심사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권상로(1879-1965)는 문경 김용사 출신의 승려로 <조선불교월보><불교>(1924.7-1933.8)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고,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수였으며 해방 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최고의 문필가이자 뛰어난 학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일전쟁 이후 친일 시국 강연의 주요 강사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할 것을 부르짖었고, 승려들에게도 일본군에 지원할 것을 권유하였다. 권상로는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참사라는 직함의 간부가 되어 많은 친일 강연을 하였고, 또한 광적인 친일 논설을 많이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권상로의 친일불교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단행본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한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만상회, 1943)를 간행한 일일 것이다. 일본에 충성할 것을 주창한 이 책자는 그의 많은 친일 시사문과 함께 근래에 발간된 그의 방대한 유고집 외경당전서10권 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이처럼 많은 친일을 저질렀음에도 단 한 번의 참회도 없이 광복 후 동국대학교의 총장이 되고,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으며(1962), 불교 승려로서 진실한 포살과 자자(불교식 참회 의식)도 없이 1965년 입적하였다.

 

이상으로 식민지 시대 불교계의 친일 행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일제의 식민지 기간에 우리나라 불교계는 불교도와 민족에게 숱한 친일 악업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식민지 시대 한국 불교사는 암울하였고, 해방 후에도 그때 배출된 대처승들로 인하여 1954년 이래 비구승들의 정화 운동으로 많은 분규를 겪었다. 이제 한국불교는 식민지 시대의 친일불교를 청산하고 중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국과 민족에게 참회의 삼천 배를 올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 출발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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