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성격과 삶 - 융의 성격 유형론으로 깊이를 더하는
김창윤 지음 / 북캠퍼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칼 융의 심리학을 대중들에게 매우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안내서로 꼽을 만하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프로이트가 이 분야의 원조인데, 그 아래 수제자로 꼽히던 아들러나 칼 융이 저마다 입장 차이로 프로이트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인 논지를 전개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고전적 논의는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새롭게 재음미되고 있지만, 그의 이론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보니 다양한 학자군과 논쟁 주제들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편이다.  아들러는 최근 몇년간 국내 출판계에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가 소개되면서 대중적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면 칼 융은 그 논의가 만만치 않다는 것과 파고들어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대중적 주목 대상이 되기에는 초기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그것이 임상적으로 도대체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도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형편이라 전문서는 꽤 출판이 되어 있지만, 권할만한 대중서는 찾기 쉽지 않다.

저자는 융에 이르는 기존 접근법이 공통적으로 멈추는 지점을 효과적으로 돌파한 것으로 보인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융의 ‘성격유형론’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개념 설명은 간단간단하게 처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복적으로 주요 개념을 소개하면서 바로 그에 상응하는 케이스를 언급하고 있어서 직관적 이해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 융의 학문세계 전반은 이부영의 <분석심리학>이란 책이 걸출하게 교과서적 개관을 제공해 준 바 있지만, 그 논의를 현실로 끌어와서 통찰을 주기에는 이미 출간된 지 너무 시간이 지난 상황이고, 임상 사례나 문화적 인용을 풍부히 접하기는 어려웠다. 이 책은 1부를 꼼꼼히 읽어내면 그 다음부터는 그 논의를 활용해서 다양한 분야와 사례에 눈을 열어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페르소나’, ‘콤플렉스’,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개성화’ 등의 개념은 하나하나가 세계와 인간을 새롭게 보게 해주는 창문의 역할을 충분히 한다. 이 책은 대중들에게 간결명료한 문체로 이 새로운 세계를 소개한다.

제2부는 1부에서 소개한 이론과 개념의 적절성을 여러 영역과 케이스를 언급하며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융의 ‘성격유형’ 논의가 일상생활에서 개인 내면, 부부간, 가족간, 직장내  갈등으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문제들을 이해하고, 풀어가는데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되는지를 폭넓게 펼쳐보여 준다.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통찰을 얻을 수 있는 대목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의 임상경험뿐 아니라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도 적용 가능한 사례를 끌어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국역사에서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사용된 사도세자, 폐비 윤씨 등의 사례가 정신의학적으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풀어내는 대목은 흥미로왔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가다보면 동서고금의 문학이 도드라지게 다루어준 캐릭터들이 어떤 면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관계성에 내재한 심리적 구조와 유형을 반영하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고, 왜 그런 캐릭터에 이끌렸는지 독자들의 마음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마 융의 심리학이 갖는 현실 적용성은 대대적으로 재발견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융의 성격유형을 차용해서 과하게 단순화시킨 MBTI 보다는, 융의 원래 논의가 더 풍성한 통찰을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제3부는 융의 저작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저자가 국내 대표적 병원에서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의사로 재직하면서 아마도 빈번하게 받았을 법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성격을 갖는 장이다. 도대체 정신병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진단하며, 어떤 처방을 내리며, 치료의 효과는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매 장마다 빼곡히 써놓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대중들의 무지, 왜곡을 차근차근 교정하는 것뿐 아니라, 종종 심리학이나 정신과 전문가들도 내보이는 헛점이나 미비함을 짚어주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쉽게 누군가를 정신질환자로 판단하고, 약이든 상담이든 입원이든 치료를 시행하면 원하는 결과를 바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저자는 그 판단의 경계와 진단의 내용, 처방의 방향이 매우 섬세하고, 사려깊은 것이어야 함을 매번 강조한다. 정신적 고통을 몸과 마음에서 제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오히려 이 책의 논의를 따르자면 그 고통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지적도 새로왔다. 그런 인식은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에 결국 달린 것일텐데, 오랜 시간 환자를 만나온 의사가 오히려 이런 철학적 접근을 칼 융의 논의를 빌어 내어놓고 있다는 것이 감명 깊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도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면 이런 논의는 더욱 널리 읽히고 알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 책의 만듦새는 좀 투박한 느낌이 없지 않은데,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알찼다. 주변에 여러 명에게 권해주었다.


정신과 의사가 되어 칼 구스타프 융을 접했다. 융의 이론은 흔히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내게는 직관적으로 상당히 명료하게 다가왔다.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해 그간 가졌던 고민을 이해하고 정리하는데도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성격유형론은 사람들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단연 으뜸이었다. 융은 프로이트와 아들러를 넘어서 인간 심리와 삶의 방향에 대한 통찰을 제시했고,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 환자를 상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심리학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치료란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는 가르침도 마음에 와닿았다. 하이데거나 노자를 비롯한 동서양 철학을 아우를 수 있다는 점도 이끌리는 부분이었다. - P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자유
이진구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일주일쯤 전에 서점 갔다가 눈에 띄길래 사서 출퇴근하며 설렁설렁 읽고 있는 책인데, 매우 도움이 된다. '일제시대 종교교육 논쟁', '신사참배 문제', '일제하와 군사정권 시대의 종교법', '성시화, 템플스테이, 땅밟기', '기독교 학교 교육', '백투 예루살렘운동', '안티기독교' 등을 쭉 다뤄주고 있다.

저자의 입장이 좀더 첨예하게 드러났더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있지만, 책은 기본적인 논의 구도와 쟁점을 드러내는데에 비중을 두고 있어서 각 주제의 핵심 논점과 근거들을 이해하는데에 유용하다. 나는 읽어가면서 대략 알고 있던 내용에 세부를 채워갈 수 있어서 매우 도움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양 자본주의 백과전서 - 주성하 기자가 전하는 진짜 북한 이야기
주성하 지음 / 북돋움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다리던 주성하 기자의 최신 북한 소개책이 드디어. 한국사회에는 이렇게 직접 실감나게 북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신뢰할만한 자료가 더 많아져야 한다. 남북관계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적극 추천할만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은 늘 읽고 싶었던 책인데, 이제사 손에 잡았다. 읽어가며 놀랜다. 이 집요한 문제의식과 해박하게 훑어내리는 스케일. 이와 더불어 같이 읽을 책은 마샬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다. 두 책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곧 '구술성'(orality)이 '문자성'(literacy)에 어떻게 먹혀버렸는지, 그 과정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다. 매혹적인 주제다.




좀더 파고들어간 책은 에릭 해블록의 <플라톤 서설>인데, 그는 여기서 그 유명한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문제를 구술성과 문자성의 대립과 전이과정의 문제로 해명한다. 시인들의 구술적 교육에서 문자에 기반한 교육과 생각의 세계로 전이하려는 시도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옹과 맥루한은 모두 현대의 미디어 시대가 다시 '이차적인 구술문화'의 흥기를 목격하는 시대로 파악한다. 이 미묘한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던 '일차적 구술문화'를 제대로 음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 읽다보면 여러가지 자극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감각을 통한 세계인식이 사실은 거꾸로 우리의 세계인식을 특정한 감각에 종속시킨다는 점과 그로 인해 우리가 결코 되찾아올 수 없는 어떤 데미지를 받는다는 문제. 다시 '야생'이라 불렀던 그 시대의 속살을 들여다 보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4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술 문자 이 책 죽여주죠 ? 읽는 내내내 감탄의 연속 ~
한국 문화는 전형적인 구술 문화에 속하죠..

희망찬샘 2016-08-15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과서의 옛이야기 파트는 읽도록 하면 안 되고 반드시 들려주어야 하고 아이들에게도 서로 이야기를 들려주게 하는 걸로 목표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구술 문학의 다양한 변화들... 정말 매혹적이에요. 처음 책, 읽어 보고 싶어지네요. 안 어렵겠죠? 어려운 책 쥐약인데... ㅎㅎ~~~
 

‘혐오’가 문제다

한국사회가 ‘혐오’ 문제로 들끓고 있다. 같은 사안을 놓고 피해와 가해의 경험과 판단이 극단적으로 갈라진다. 이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지향의 문제도 아니고, 감정의 저 아래 쪽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부당함과 이에 대한 분노를 수반하는 투쟁이 되고 있다. 타협이나 양보할 수 없어 보이는 이런 감정적인 대치에서 잠시 몸을 빼서 이성적인 토론을 해보려고 해도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피차에 동원하는 개념과 논리에 합의를 이루기 힘들고, 자신들의 경험치가 주장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근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과연 우리는 논쟁의 수렁에 빠져 같이 망할 운명인 건가?

이 글은 제한적이나마 현재의 이슈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몇 권의 책을 소개하려는 시도다. 논의가 너무 방대해지지 않기 위해서 범주를 ‘혐오’란 개념의 정체를 규명하는 노력으로 최소화했다. 즉, 어떤 주제가 왜 다른 방식이 아닌 ‘혐오’의 양상으로 제기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교양 인문학 수준에서 접근 가능한 책들을 활용하여 현재의 논의를 이해하는 나름의 가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1. ‘혐오(disgust)’란 감정에 대하여

<혐오와 수치심>,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민음사 펴냄(2015)

‘혐오’란 주제를 다루는 데 가장 도움이 될 책으로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처음으로 추천한다. 시카고대학교 교수인 저자는 고전학, 법학, 신학, 여성학 등 인문학 전반에 탄탄한 기여를 하고 있는 학자인데, 이 책은 ‘혐오’와 ‘수치심’이란 감정이 주로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는 사법체계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검토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안한다. 이 책 첫 장에 등장하는 몇 가지 사례와 그에 수반되는 질문은 ‘혐오’와 ‘수치심’이란 주제가 기존에 합의된 법적 개념 틀에 균열을 내고 있음을 잘 볼 수 있다. 레즈비언들의 성행위를 보고 이들을 살해한 남성이 자신이 혐오감에 사로잡혀 격분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으므로 처벌의 경감을 요청한다면 그것은 어떤 근거에서 타당하거나 부당한가? 범죄자에게 사회적 낙인을 찍고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하는 것은 사회의 정의감을 증가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 미국의 법체계와 사법제도가 현실의 법 감정과 어긋나는 지점을 절묘하게 지적하면서 ‘혐오’란 감정의 성찰적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혐오’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동물적 취약성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려는 성향과 관련이 된다고 보았는데, “역겨운 대상이 체내화할(즉, 먹거나 오염될) 가능성에 대한 불쾌감” (166)을 뜻하며 이런 원초적 혐오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대상에 적용되거나 문화적 작동 기제를 가짐으로써 어떤 특정한 대상을 (자연스럽게, 혹은 당연하게) 역겨운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이런 과정은 종종 혐오의 주체와 객체를 강력하게 구분하여 전자에 ‘순수’를 배당하고, 후자에 ‘부패’를 할당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적대를 형성하고 오염 가능성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정당화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어떤 특정 대상에 혐오의 감정을 같은 수준과 같은 이유로 느끼지는 않기 때문에 혐오 캠페인은 종종 설득의 근거를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나 ‘분개’와 같은 조금 더 이성적 감정으로 바꾸거나(동성애자들로 인해 ‘아이들의 성 정체성이 혼란된다’거나 ‘특권적 법과 제도를 요구한다’거나 ‘세금을 투입하게 된다’는 주장 등), 또한 대상들의 혐오스러운 측면을 극대화함으로써 혐오감을 유발(동성애를 난잡하게 묘사하고, ‘항문성교’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해외의 경우는 배변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식의 주장도 등장했다) 한다(190). 너스바움은 책에서 ‘혐오’와 ‘수치심’의 개념과 논리를 사법 논의의 다양한 주제에 적용해서 ‘외설’, ‘모욕‘, ‘낙인찍기’, ‘차별금지’, ‘증오 범죄’, ‘프라이버시’ 등의 의미와 한계까지 인상적으로 다룬다. 이 주제를 위해 참고하고 검토해야 할 주요한 논의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드문 기회다.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2014)

한편, ‘혐오’란 감정이 누구에게는 즉각적이고 강력하게 유발되는데, 어떤 이들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를 물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를 부제로 한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이 상당히 의미 있는 통찰을 준다. 그는 몇 편의 TED 강연으로 유명한 도덕심리학(moral psychology) 교수인데, 이 책은 좌파와 우파, 혹은 진보와 보수는 도덕적 판단 혹은 선호에서 작동하는 기제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꽤나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단순 요약하면, ‘도덕 판단은 직관이 우선이고, 이성적 추론은 그다음’이라는 것. 그가 잘 쓰는 비유로 하자면, 우리의 마음은 코끼리(직관) 위에 기수(이성)가 올라탄 것처럼 움직이는데, 우리 행동의 99%는 코끼리가 추동되는 방향으로 일어나고 기수는 사후적으로 그 방향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말이다. 이는 인간이 이성보다 욕망의 존재이고, 충동에 훨씬 더 깊이 격발되는 존재임을 지적하며 감정의 문제를 중시해야 한다는 여러 학자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이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도덕성을 자극하는 기반이 보수와 진보에서 달리 나타난다고 본다. 즉, 좌파의 도덕적 기반은 ‘배려(care)/피해(harm)’, ‘공평성(fairness)/부정(cheating)’이란 두 가지 패러다임에 주로 근거하고 있는 데 반해 우파의 도덕적 기반은 ‘충성심(loyalty)/배신(betrayal)’, ‘권위(authority)/전복(subversion)’, ‘고귀함(sanctity)/추함(degradation)’을 중요하게 활용한다는 것이다. 하이트는 ‘자유(liberty)/압제(oppression)’ 패러다임은 좌우파가 공유하고 있는데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런 근거의 차이가 왜 어떤 이슈에 좌파-우파가 혹은 보수-진보가 확연히 달리 반응하는지를 설명한다고 말한다. 좌파들은 우파들이 케케묵은 전통에 호소하고 있을 뿐 현대적 이성의 검토를 통과하지 못할 기준에 삶을 의존하고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우파는 좌파가 여전히 사회에서 작동하는 중요한 가치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폄하하고, 몇 가지 설명으로 마치 그런 가치들의 존재의의를 다 해체한 것처럼 구는 ‘헛똑똑이’들이라는 인상을 받는다(이런 맥락에서 미국에서 조지 W 부시의 대선 승리 이후 진보 진영에 도덕심리학적 전략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책들(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 등)이 봇물 터지듯 출판되었고, 오바마의 대선 전략은 그런 인식 변화에 기반을 두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혐오는 ‘고귀함/추함’의 정서와 맞물리는 이슈다. 동성애 문제는 이 주제와 관련한 대표적인 이슈인데, 보수우파들은 이 문제에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쉽게 격동되었지만 진보좌파들은 이를 ‘배려/피해’ 패러다임에 기반을 두어 생각해 왔기 때문에 누군가 이 문제에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다(사실 이 표현은 거꾸로 적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혐오감이 격동되는 이들이 보수에 친화성을 느끼고, 격동되지 않는 이들이 진보적 입장에 끌린다고).

우리말 사전에 ‘미워하고 싫어하다’고 풀이된 ‘혐오’란 단어는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영어 단어와 대응한다. 가장 일차적 용어는 ‘구토를 유발하는 싫은 감정’을 뜻하는 ‘disgust’이다. 마사 너스바움과 조너선 하이트의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이것이다. 반면, 일본사회의 ‘혐한류’나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 발언’ 등을 언급할 때 대응하는 단어는 ‘hate’인데, 이는 ‘증오’ 혹은 ‘적대’라고 옮기는 것이 더 낫다. 앞서 보았듯이 disgust가 거의 생리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반응에 가깝다면, hate는 그보다 훨씬 과격한 감정적 반응을 의미하지만, 이성적 판단이 포함되는 통제되는/되어야 할 감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성 혐오’에는 ‘misogyny’라는 특별한 단어가 사용된다. 앞의 단어들과 연결되거나 확장되면서 겹치는 부분이 당연히 생기지만, 이 용어는 여성멸시/여성혐오에 특화된 용어이므로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깔보는 태도인데 ‘멸시’의 의미가 강하다. 이것은 굳이 앞서 언급한 구토감이나 격렬한 적대감으로 발현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훨씬 구조화되고, 문화적 코드로 새겨져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각 단어가 감정의 서로 다른 측면을 지시한다는 것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 ‘혐오’란 단어의 의미와 용례를 지나치게 확대함으로써 생기는 오해와 혼란을 꽤 많이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여성 혐오’ 혹은 미소지니(misogyny)에 관하여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펴냄(2012)

‘여성 혐오’ 현상과 관련해서는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가 대표적인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도쿄대 사회학 교수로 퇴임한 저자는 잡지에 장기간 연재했던 원고에 기반을 두어 이 책을 펴냈는데, 무엇보다 다양한 사례와 분석을 통해 일본사회(같은 방식으로 한국사회)에 미소지니가 얼마나 창궐하고 있는지를 실감 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압권이다. 일견 ‘여성들을 좋아하는’ 호색한들이 어떻게 여성혐오를 구현하고 있는지, ‘성녀 대 창녀’의 이분법이 여성혐오에 기여하는 방식, 성 평등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지던 ‘근대’가 여전히 혹은 다른 맥락에서 여성혐오를 지속하는 문제, 어머니와 딸 사이에서 발생하는 여성혐오, 학교와 직장에서 여성혐오가 어떻게 여성의 자기혐오를 배양하는지 등은 그 자체로 여성들에게는 동감을, 남성들에게는 각성을 유발한다. 치즈코 교수는 자신의 논지를 19세기 영국 문학을 연구한 퀴어학자 이브 세지윅에게서 주요하게 끌어오는데 그의 ‘호모소셜/호모포비아/여성혐오’의 구분을 따라가다 보면, 왜 혐오 현상이 남녀 간에 비대칭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새겨볼 수 있다. 즉, 남성들의 연대(호모소셜)는 여성을 대상화하고, 객체화하는 여성혐오를 통해 남성성을 확인하는 구조이고 이 맥락에서 남성성의 상실로 여겨지는 호모포비아 역시 경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2장). 남성연대가 여성혐오와 호모포비아를 동시에 요구하는 강고한 구조인 것에 반해, 여성들의 연대는 형성되기도 쉽지 않고 훨씬 자주 남성연대의 인정을 놓고 여성들 간에 경합하는 양상이 발생하는 등 취약한 것으로 저자는 평가한다. (제16장) 그에 의하면 우리는 여전히 19세기 근대적 남성연대 체제가 장악하는 시절을 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당분간 전망이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로 논의를 마무리한다.    

나는 이 책에서 많이 배우고, 대체로 동감했다. 다만, 제목과 관련해서 벌어진 논란을 추가해 놓는 것은 필요하지 싶다. 하나는 이 책 제1장에서 잘 설명하고는 있지만, 누군가에게 ‘당신은 여성혐오 발언/행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상대가 ‘나는 여성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아하지요’ 등의 대답이 빈번히 나오는 것은 ‘혐오’란 단어를 hate로 받아들여서 ‘여성 증오/적대/학대/폭력’ 등을 연상하고,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란 답변을 하는 것이다. ‘여성 멸시’라거나 아예 ‘미소지니’라고 했으면 좀 상황이 나았을까? ‘혐오’ 혹은 ‘여성 혐오’의 의미 범주를 적절히 제한하고 일관되게 사용하지 않으면 상습적으로 오해가 발생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의 원제는 <여성 혐오: 일본의 미소지니>인데, 번역본이 제목을 <여성혐오를 혐오한다>고 함으로써 여성혐오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혐오’를 채택하는 듯한 인상을 준 부분이다. 이는 우에노 치즈코의 논지와는 모순되는 제목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결론적으로 ‘남성혐오’의 (이론적/현실적)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성혐오’를 ‘여성 증오/적대(hate)’란 뜻으로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남성을 향한 적대적 욕설이 ‘남성 증오/적대’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반문을 하게 된다. 메갈리안 등에서 구사한 ‘미러링’을 놓고 벌어진 논란은 이 대목과 연관된다.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학적 전망이 이론적으로 닫혀있기 때문에 남녀 간 비대칭성을 드러내 줄 뿐 공존이나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힘들다는 비판도 있는 모양인데, 책의 마지막 챕터에 조금 등장하는 전망이나 대안 측면에서 이견이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이 ‘여성혐오’의 구조와 사례 전반을 직설적으로 그려낸 부분은 매우 유용하고 권할 만하다. 더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

3. ‘동성애 혐오’ 혹은 ‘호모포비아(homophobia)’

<혐오에서 인류애로>, 마사 너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뿌리와이파리(2016)

‘동성애’ 자체를 다루는 책들은 상당히 많다. 다만 이 글의 관심은 동성애가 ‘혐오’를 유발하는 것으로 포착되는 메커니즘이다. 동성애에서 혐오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안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 혐오의 메커니즘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앞서 언급한 마사 너스바움은 2004년에 <혐오와 수치심>을 썼는데 2010년에 <혐오에서 인류애로>에서 이 주제를 특화해서 다루었다. 2010년 이후 미국에서는 DOMA 위헌판결을 거쳐 헌법재판소가 동성결혼을 합헌으로 선고했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은 한국의 ‘게이법조회’가 해제를 통해 보충하고 있다.

너스바움은 먼저 전작의 논지를 간략히 요약한다. 혐오감이란 인류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전시킨 자기보호 장치다. 불결한 것을 경계하는 본능적 태도는 특히 피나 타액 등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유출물에서 혐오감을 느낀다. 이런 양상을 ‘원초적 혐오’라고 한다면, 이것이 사회적 관계로 전이되는 것을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불결하거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오염의 근원으로 간주하게 되면 혐오감을 느끼고 표현하게 된다. 사회적 소수자들은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이들을 ‘냄새가 난다, 불결하다, 비열하다. 추잡하다’는 낙인찍기가 원초적 감정의 수준에서 발현된다. 이 메커니즘은 상대를 역겨운 속성으로 환원해 버리고 ‘타자는 더럽고, 나는 깨끗하다’는 이중의 ‘망상(delusion)’을 가동한다. 이 책에서 너스바움은 ‘혐오’를 동력으로 하는 정치에서 ‘인류애’로 추동되는 정치로 전환하자는 제안을 한다. 개인의 자유를 더 널리 보장하는 쪽으로 진행되어온 인류애의 정치가 강화됨으로써 그간 ‘종교, 인종, 장애’로 인한 차별과 불이익이 해소되어온 것과 같이 ‘성적 정체성/성적 지향’을 보장해주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미국의 ‘소도미법’, ‘차별금지법’, ‘동성결혼’, ‘프라이버시’ 등을 한 장씩 다루었다.

‘동성애 혐오’와 관련해서 이 책의 논지는 출판 이후 미국사회의 변화를 통해 입증되는 부분이 많고, 실제로 사법적 판단의 논리를 제공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동성애 및 동성결혼에 대한 찬반 여론은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여전히 혐오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특히 젊은 세대에서 이 사안은 더 이상 혐오 유발 사안은 아니다. 대중문화가 이를 친화적으로 다루고, 젊은 세대는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경험이 훨씬 많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법이나 사회제도는 그런 정서적 태도의 변화를 일정 시간을 두고 뒤따라가는 양상을 보인다. 물론 단순히 물리적 시간(chronos)이 지난다고 해소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고, 당사자들의 고투가 충분히 사회적 주목과 지지를 얻어내는 과정이 있었으니 기대했던 시간(kairos)이 왔을 것이다.

4. ‘혐오/증오 발언(hate speech)’의 문제

<증오하는 입>, 모로오카 야스코 지음, 조승미/이혜진 옮김, 오월의봄 펴냄(2015)

누군가에게 ‘혐오’를 느꼈다면 개인의 내면적 문제일 수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혐오 발언이나 폭력으로 표출되면 사회적 문제가 된다. 국내의 차별금지법 논의에서도 ‘혐오 발언’에 관한 대응을 놓고 ‘표현의 자유’ 옹호냐, ‘법적 규제’ 지지냐의 대립구도가 종종 등장한다. 이 논의를 재일조선인을 향한 혐오와 폭력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재특회’ 등을 필두로 한 일본 상황에서 다루는 모로오카 야스코의 <증오하는 입>에서 배울 것이 많다. 증오범죄 연구자 브라이언 레빈은 ‘증오의 피라미드’란 개념으로 ‘편견-편견에 의한 행동-차별-폭력-제노사이드’로 상황이 악화하는 메커니즘을 지적했다. 혐오발언(hate speech)은 증오범죄(hate crime)와는 다르지만 증오의 피라미드를 작동시키는데 분명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UN 등 국제기구는 제노사이드(genocide)의 배후나 기원이란 관점에서 혐오 발언을 엄격하게 경계한다. 혐오 발언이란 인종, 민족, 국적, 성별, 성적지향 등의 속성을 공유하는 소수자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표현이고, 이는 소수자를 향한 차별, 적대, 폭력의 선동이고, 표현에 의한 폭력, 공격, 박해가 된다. (84) 국제인권기준에서는 혐오 발언을 그 수위에 따라 형사 규제, 민사 규제, 사회적 규제를 가하도록 요구한다.

이 책에서는 차별규제법을 가진 영국, 독일, 캐나다, 호주 등 4개국의 정책을 살펴보고, 이 문제를 ‘표현의 자유’ 범주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미국 사례를 보고 나서 일본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논한다. 저자는 법적 규제의 남용을 우려하다가 혐오 발언에 대한 단호한 사회적 대처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일본에 미비한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인권보호법과 인권위원회 등의 제도와 기관의 설립, 형사규제보다는 민사규제에 조금 더 중점을 두되 차별행위의 입증책임을 가해자에게 두는 방안, 인권 감수성을 높이는 다양한 교육의 도입 등을 제안하는데 이는 한국 상황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내용이다.

혐오 발언 관련 국내 상황을 조금 더 첨언하자면,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현재라도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행위는 시정 요청을 할 수 있다. 물론 인권위는 시정권고 이상을 할 수는 없는 기구이므로 강제력에서는 제한이 있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더라도 모든 것을 형사처벌로 처리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고 법적 규제의 오남용은 그것대로 문제가 된다. 법률 전문가들은 차별금지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인권위원회의 설립을 통해 일정 정도 확보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사안에 따라 ‘표현의 자유’ 인정, ‘시정권고’, ‘형사처벌’ 등의 세 가지 차원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볼 때 ‘형사처벌’을 제외한 방식은 일단 가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발언과 관련하여 주요한 우려는 종교계나 교육 현장에서 나오고 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발언을 하는데 분쟁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역시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 보면 종교계에서는 외부에서 보기에 차별적 발언이라 하더라도 ‘표현의 자유’의 범주로 간주하어 보호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었다(물론 법이 시행되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판례들이 확보되는 과정에서 소송이 제기될 수는 있을 것으로 보이나, 결과적으로 종교의 자유는 보호받는 쪽으로 나오지 않겠느냐는 판단이다). 다만, 학교 현장은 우리나라 학교가 공립이든 사립이든 공적 공간이기 때문에 여기서 발생하는 혐오 발언이나 차별적 언행은 표현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 범주로 옹호될 수 있느냐를 놓고 향후 분쟁 소지가 있다.

5. ‘사람됨’의 문제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2015)

결국 ‘혐오’ 현상에는 상대가 가진 ‘사람’의 자격을 훼손하거나 박탈하려는 움직임이 일관되게 작동한다. 혐오는 직관적으로 작동하는 감정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승인을 통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 정당화 과정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사람은 관계와 사회 내에서 ‘장소성(place, position)’을 추구하며 성원권을 놓고 인정투쟁하는 존재임을 여러 층위의 논의를 통해 풀어나간다.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임을 알지만 사회적 의미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상인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를 들여다보고, 외국인과 노예 등은 무엇이 결여된 존재인지, 인격과 모욕이란 개념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정과 사랑은 어떻게 다르며, 환대의 폭은 어디까지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지, 왜 우리에게는 신성함의 자리가 필요한지 등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오염’은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이며, 그런 이유에서 여성이나 노예, 아웃카스트 등이 암묵적으로 부여된 자기 자리를 벗어나고자 시도할 때 불쾌감과 분노를 쏟아내는 ‘혐오’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혐오’는 우리가 그래도 된다고 간주하는 어떤 대상(잉여, 소수자, 비시민 등)을 향해 쏟아내는 집단적 정서인데,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회를 구성해온 원리들과 연관된다. 그간 우리는 ‘소통’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소통적 합리성’은 분명 중요한 것이나, 타자를 대하는 적절한 실천양상을 만들어내어서 ‘수행적 합리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별로 전진하지 못할 것이다. ‘혐오’에 ‘혐오’를 맞교환하며 분노의 절대량이 증가하는 상황은 이 사회를 근본에서부터 해체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몰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혐오사회’를 넘어선 ‘환대의 세상’을 그려볼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가이드북 역할을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