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은 이 책은 한 주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주 오랜만에 한글 독서를 하며 편안하긴 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평소 생활화하던 원서가 그리워 하루에 두 권의 다른 책을 읽으며 이 책을 아껴 읽곤 했다. 영국에서 팟캐스트로 운영되던 ‘철학 한입’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원서 제목(Women of Ideas)이 암시하는 것은 철학하는 여성들로서, 각기 다른 여성 철학자들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며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구조된 피해자에게는 불평등을 감별하고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그들에겐 경험으로 인해 생긴 그 인식적 특권을 제 2의 피해자를 막기위해 사용해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 내가 그 피해자라면 나는 책임의식을 갖고, 불이익을 감수하며 용기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그 피해라는 것의 범위도 매우 다양하기에 나 역시, 과거 어느 시점에선가 크고 작은 언어적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적 집단에 몸담고 있을 때, 제 3의 다른 피해자를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맞고 틀리다는 도덕적 판단도 매우 어렵다. 때와 상황에 따라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 없기에 도덕적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이유로 회색 영역 안으로 들어갈 때 누군가 도덕적 실망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도덕적 실망이란 자신에게는 불가능하고 과거의 어떤 사람을 향한 것이므로 일종의 비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누군가 나를 향해 도덕적 실망을 할 수도 있다. 즉 원치 않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남을 향한 도덕적 실망도 조심해야겠다. 내가 무슨 권리로 남을 향해 비난과 비판의 화살을 쏠 자격이 된단 말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양이란 개념에 대한 정의가 매우 신선했다. 흔히 생각하는 엘리트주의자들의 예의 바름, 존중 및 정중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양이란, 대화를 나눌 때 최소한의 미덕으로, 힘겨운 자기 주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가장 별로인 상대와 한 공간에 머무르며 계속해서 함께 하겠다는 의지이며, 의견 차이는 여전히 달갑지 않아도 칼보다 말로 싸우는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 밀의 ‘어느 누구도 반대자를 침묵시킬 권리는 없다’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살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에게 세련된 교양이 필요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만 어울리는 것은, 관용이 절실히 요구되는 민주사회에서 재앙이며 오히려, 의견이 불일치 할 때 빛이 발한다는 대목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동안 죽 재앙을 일으키는 행위를 해 왔단 말인가? 나와 너무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불편해서 싫었다. 비슷한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이를 재앙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내 사고의 폭이 넓지 못하고 새롭고 다른 것에 포용력이 깊지 못한 것일까?
신뢰의 개념도 신선하다. 신뢰의 기본이 되는 약속 실천이 언제나 중요한 것은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실천만을 강조한다면 필수 도덕이 결여되어 있어도 신뢰할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내 능력과 한계를 이해하고 할 수 있는 일과 부담되는 일을 구별하여,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거절이 특권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와 관련된 개념이 신뢰이며, 신뢰는 내 행동을 생각하게 하고 거절을 쉽게 하며, 거절이 이기적 행위가 아니라 상대에게 도움이 되며, 그것이 오히려 궁극적으로 상대의 신뢰를 얻는 방법이 된다.
자유롭게 행동하는 주체가 되려면 나 자신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철학자 Seneca, Marcus Aurelius 처럼 자기 수양이라는 사회적 관행을 통해 오히려 자유롭게 행동하는 주체가 되었다. 만약에 자기 행동의 주체가 되지 못할 경우, 감시에 중점을 둔 체제 속에 살면서 감시를 내면화하여 스스로에게 특정 질서를 부과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감시, 규율, 관행 자체를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옳다, 그르다의 기준, 우리가 기대하는 기준의 절대성이 어쩌면 우연에 지나지 않기에, 진실을 안다거나 어떤 규범적 기준이 옳다고 지나치게 확신해서도 안된다고 표현도 충격적이다. 인간은 무엇에 기대어 판단을 해야 하는가?
철학이 가진 두 얼굴이 ‘오만과 겸손’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내가 가진 근본적인 믿음에 툭 질문을 던지고는 틀렸다고 다시 생각하라고 한다. 심사숙고해도 답을 못찾으니 길을 보여 달라 질문하니, 철학 스스로도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 틀리거나 잘못 인지하고 있는 것 일수도 있다고 꼬리를 내린다.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부분에서 격하게 공감했고, 내가 그동안 회의적이었던 부분을 잘 긁어주었다 생각했다. 책 속의 책도 많아서, 다음에 꼭 읽어 보고 싶은 충동을 갖게 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나서 이 철학적 담론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해 진다. 도덕적 실망을 보류하며, 정반대의 색깔을 마주해도 세련된 교양을 갖추고 상대를 침묵시키지 않을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