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인 것을 너머 보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뭔가를 본다고 할 때 과연 나는 내 시력을 이용하여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시력은 흐르는 물을 잡으려고 애쓰는 손과 같다’ (Sight is like a hand that tries to seize flowing water. P. 300). 결국 우리는 자신의 역량과 편견만큼 보는 것이고, 우리의 부족한 눈으로는 보석을 알아 보기는 힘든 것 같다.
54세의 Renee는 27년간 럭셔리 아파트의 수위(concierge)일을 해 왔다. 과부에 외모도 볼품없는 그녀가 톨스토이나 스탕달을 섭렵하고 네델란드 화가 그림에 정통하고 모짜르트를 들을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할 것이다. 아니 생각치 않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직업에 대한 우리만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있고, 우리 사고의 그 틀 안에서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와 비슷할 것이다라고 단정한다. 부유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오만한 성격에 수위인 그녀를 무시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Renee의 사유의 깊이는 부유층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문학은 그녀 삶의 전체였고, 삶이 힘들고 지칠 때 그녀의 피난처였다. 문학적 기억의 영역으로의 여행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행복했고, 문학은 고귀한 오락거리였고, 즐거움을 주는 동반자이며 기쁨을 주는 마법 같은 것이었다. 문학을 넘어 철학적 사고, 특히 Edmund Husserl의 현상학(Phenomenology)은 내가 이해하기 너무 버거웠다.
Anna Karerina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기에 Levin이 농민들과 들판의 풀을 베는 장면을 두 번 정도 언급된 것도 매우 흥미로왔다. 처음에는 낫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그 움직임이 물흐르듯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의 기쁨, 즉, 낫질의 미학(art of scything)까지 느끼게 된다. Anna Karenina의 Levin이 노동의 기쁨을 느끼듯이, Renee는 글쓰기를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을 얻고, 글쓰기는 곧 그녀를 안내하고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던 Renee의 진가를 알아본 Kakuro Ozu가 새로 이사오면서 그녀 가슴에 돌풍이 불기 시작한다. 외적으로는 단단한 성벽으로 쌓여 있지만, 내적으로는 세련되고 지적인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그녀의 고양이 이름이 Leo인걸 간파하고 Anna Karenina 책을 선물하며 둘 만의 지적 소통이 시작된다. Kakuro에게 그녀는 비밀스럽고 박식한 공주이고, 부유한 Kakuro에 비해 비천한 출신인 Renee는 고상한 야만인이 된 것 같다. 매우 교양있는 고상한 야만인(a very civilized noble savage, P.222)
오만하고 사치스런 부유한 아파트에 지적으로 탁월하고 조숙한 12살 애어른 Paloma는 자신의 생일날에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엄마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겠다고 다짐한 상태이다. Renee의 이야기와 교차되어 나타나는 그녀의 심오한 생각(profound thought)은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녀를 담당하는 정신과 의사의 가면을 통해 어른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한다. 외적으로 화려한 가면 아래 추한 내면을 가진 어른이 있다는 것에 큰 상처를 받는다.
지적 수준이 높은 Paloma의 눈에도 Renee가 평범한 수위가 아니라는걸 알게 되고, 그 둘은 나이, 상황, 환경을 뛰어 넘어 그 누구도 넘어뜨릴 수 없는 견고한 우정을 쌓게 되고, Renee는 평생 꽁꽁 숨겨 왔던 과거의 상처를 12살 소녀에게 말하고 힐링을 하게 된다. Paloma는 상처가 치료되길 원한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자살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도우며 치료해야 한다는걸 알게 된다.( If you want to heal, heal others. P. 286)
그런데, 난 작가에게 매우 서운하다. 왜 이런 결말을 통해 날 힘빠지게 하는가? Renee는 생애 처음으로 Kakuro와 편안하고 유의미한 시간를 가짐으로써 그녀 안의 껍질을 깨고 밖으로 막 나왔는데, 거리의 부랑자가 비틀거리는걸 구하려다 세탁소 차에 치어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Anna Karerina에서 Anna의 죽음은 알려진 내용이라 예상했으나 Renee의 죽음은 생각치 못했는데 너무 허탈한 생각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 그녀의 죽음을 맞이하는 Kakuro와 Paloma의 태도가 또한 인상적이다. 어디선가 피아노 선율이 들리고, Kakuro는 Renee가 좋아할 것이라고 하고 둘은 잠깐동안 멈추어 음악을 듣는다. Paloma는 그것이 우리의 삶임을 깨닫게 된다.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즉, 우리 삶에는 항상 많은 절망이 있지만 이상한 아름다운 순간도 있다는걸 깨닫는다. 그녀는 절망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할거라 다짐하게 된다.(I will be searching for those moments of always within never. Beauty, in this world. P. 320)
과연 무엇이 아름다움(Beauty)일까?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지닌 Renee는 매우 아름답다. 외적 화려함과 타인의 인정을 위해 노력하고, 내적인 비루함을 게을리한 내가 너무 부끄럽다. 철학, 음악, 미술, 문학적 지식을 자산으로 삼아 은둔 생활을 한 것 처럼 보였지만 지적으로 확장된 삶을 살았던 그녀가 아름답다. 절망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아름다운 사람과 또 다른 아름다운 상황이 그 미적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또한 그런 사람과 상황의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는 미적 안목이 내게 쌓이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