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역사 - 죽음은 어떻게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켰는가?
앤드루 도이그 지음, 석혜미 옮김 / 브론스테인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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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팅턴병이나 파킨슨병과 마찬가지로 알츠하이며병은 단백질이 응집되는 질병이다. 원래는 정상 작동하던 단백질이 뭉쳐지면서 독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디에서 단백질이 뭉쳐서 어떤 세포를 훼손하느냐에 따라 증상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근육을 통제하는 뇌세포가 손상되면 파킨슨병이 된다. 알츠하이머병은 뇌의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해마)에서 시작한다. 


* 인간이 사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협동이다. 하지만 사냥에 실패하는 일은 매우 잦았고 큰 사냥감을 잡는 데 성공해도 작은 집단이 먹기에는 너무 많았다. 그래서 축제의 형태로 이웃과 전리품을 나누는 풍습은 서로 이득이었다. (...) 협동 행위는 수천 세대 동안 이어져왔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정의와 공정의 감각이 생겼다. 실제로 인간은 수치심과 죄의식이라는 감정으로 나쁜 행동에 대해 스스로를 벌한다. 이 감정은 너무나 강력해서 심지어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 거울을 보면서 '이 사람이 나를 죽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해보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합친 것보다 나 한 사람이 나에게 더 위험하다. 인간은 유일하게 스스로 삶을 끝내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고 폭력을 쓰는 종으로 알려져 있다.


* 자살 충동은 대부분 순간적이다.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 하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는 자살이 왜 나쁜 것인가? 내 몸을 원하는 대로 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이 문제에 대한 공리주의적 답변이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자신의 고통을 끝낼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모두에게 장기적인 고통을 초래한다. 자살이 유발하는 고통의 총량으로 보았을 때 자살의 순 영향은 매우 부정적이다. 안타깝게도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은 대부분 아무도 본인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본인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고 오해하며, 사라지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거라고 느낀다.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도 쉽게 하지 못한다. 이런 잘못된 믿음이 스스로를 해치게 만든다. 


* 전염병은 주요 사망원인이 됐다. 전염병에 승리를 거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시고 중요한 아이디어들 덕분이었다. (...) 중요한 아이디어의 첫 번째는 바로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다. (...) 의료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고의 혁명은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유기체가 질병의 주요 원인'이라는 세균유래설이다. 세균유래설은 왜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몸을 씻고, 옷을 빨고, 생활공간을 청소하고, 신선한 음식을 먹고, 멸균 상태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  과학은 현대 인간이 역사상 가장 건강하고 풍족하게 사는 중요한 이유다. 


* 가장 중요한 변화는 치매로 인한 사망률이 엄청나게 높아진 것이다. (...) 알츠하이머병은 현재 세계에서 경제 자원을 가장 많이 소모하는 질병이다. (...) 앞으로도 몸은 움직일 수 있으나 정신은 정상이 아닌 노령 인구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 전염병과 기는 등의 재앙에 대처하려면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알릴 수 있어야 한다. 농사가 실패하거나 새로운 질병이 나타나면 전 세계가 알아야 한다. 어느 정부나 무능력해 보이기 싫어서 이웃 국가에 경고하는 대신 문제를 부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겠지만, 문제가 엄청난 재앙으로 커지기 전에 빨리 대응하려면 숨겨서는 안 된다. 언론의 책임도 있다. 일부 정치인을 편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변호하지 말고, 문제를 공정하게 보도해야 한다. 


* 인간은 대단한 파괴자다. 지구상에 땅을 대부분 인간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며 다른 종을 위해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몇 종 안 되는 생물(벼, 닭 등)을 퍼뜨리고 나머지를 멸종으로 몰고 간다. 인간이 왜 환경 피해를 초래하는지 생각해보면 결국은 인구가 너무 많아서다. 인구를 줄여 환경 피해를 멈추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재앙이 일어나는 것이다. (...) 나머지 방법은 인간이 지구에 주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다. 


* 새로운 의학의 혁신이 일어나 인간이 죽는 방식이 달라질까 하는 질문은 흥미롭다. 현재의 사망 원인이 극복되어 출산 합병증, 홍역, 흑사병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 사망 원인의 변천사를 다루는 책을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의학을 주로 논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료를 찾을수록 인류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한 방법은 의료가 아니었다. 법률, 정책, 공학, 통계, 경제학이 발전했을 때, 또는 의욕과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사회의 저항을 이겨내고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실현했을 때 진보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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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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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으로~

죽음을 근사하게 표현했네...


저자의 죽음의 장소는 비록 병원이었으나

숨결이 바람이 된다는 표현처럼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묘사 되었다. 


의미없는 연명치료는 스스로 거부했고

온전한 정신세계의 유지를 원했던 그는 

삶을 사랑했지만 죽음도 수용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던 듯 하다.



옮긴이는 

"칼라니티의 죽음이 너무나도 아쉬운 것은 그가 가나안 땅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막상 그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그는 가나안 땅을 밟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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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 홀로 죽어도 외롭지 않다
우에노 치즈코 지음, 송경원 옮김 / 어른의시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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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사는 노인이 집에서 홀로 죽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서서히 몸이 약해져 걸을 수 없으면 그대로 집에서 죽게 된다. 하지만 고독사라는 건 그 전부터 고독하게 살던 사람의 얘기다. 혼자 살아도 고독하지 않으면 고독사가 아니다. 그래서 '집에서 홀로 맞는 죽음'이다. 


* 임종을 지킨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 곁에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때까지의 모든 시간이 임종의 과정이다. 최선을 다해 과정을 겪은 사람들은 "내가 집에 없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각오는 되어 있다"고 말한다. 


* 지금의 가정임종은 누구나 자기 집에서 죽었던 옛날과는 전혀 다르다. 과거 가족들이 도맡았던 간병은 의료 수준이 낮아서 거동을 못하는 환자는 쉽게 욕창이 생겼다. 위생 수준이나 영양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욕청은 점점 악화되었고 거기에 잡균이 들어가서 감염증으로 사망하기도 햇다. 집에서 하는 간병이 길게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간병 부담이 커진 것은 간병 수준이 올라가고 기간도 길어지고부터이다. 바꿔말하자면 간병이 꼭 필요한 중증 상태가 되어도 수준 높은 간병으로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간병력이 있는 가족과 같이 살면 당연한듯이 집에서 환자를 돌보았다. 그 간병자원은 바로 며느리이다. 시부모의 간병은 자연히 며느리에게 맡겨졌다. 싫든 좋든 울며 겨져먹기로 며느리들은그 일을 해왔다. "'선택할 수 없는 간병'은 강제노동이다"라고 말한 것은 평소 거침없기로 남 못잖은 나일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쉽게도 아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메리 데일리가 한 말인데 그녀의 말대로 강제노동은 강제수용소에만 있지 않다. 가족 내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며느리들이 간병자원으로 쓰이는 일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히구치씨는 간병력으로서의 며느리는 이미 '절멸한 종'이라고 선언햇다. 


* 병원은 환자보다 의료인의 사정에 맞춰 만들어졌다. 환자는 회복하고 싶은 간절함과 기간한정이라는 조건에 매달려 어떻게든 병원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 병원에 입원하면 내 생활은 모두 병이 되어 버린다. 집에 있으면 병운 잔지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될 뿐이다.


* 집과 가깝거나 교통편이 편리한 조건 좋은 보육원이 있어도 몇몇 곳을 더 돌아보고서 자기 마음에 드는 보육원에 아이를 맡긴다. 보육원에 대해서는 질을 중요시 한다. 

그런데 노인시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몇 군데를 비교하면서 질을 따져 보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간병 부담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다, 시설에 맡기고서 안심하고 싶다는 가족의 이기심이 엿보인다. 시설이 누구를 안심시키기 위해 있는 것인지 내가 깊은 의문을 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지만, 지금의 노인들에게는 자기 소유의 집이 있다. 게다가 주택도 남아돈다. 동거가족만 없다면 나가 달라는 말을 들을 일도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자택에서 그대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시설을 늘릴 필요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너무 많이 지어 버린 탓에 앞으로 유지관리비가 들어갈 일만 남았다. 


* 긍정적으로 보자면 싱글인 시바타 씨는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죽기 직전까지 '가정호스피스'를 실현했다. 죽기 이틀 전 익숙한 환경을 떠나 미지의 공간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니, 인간의 생활은 오늘처럼 내일이 이어지는 관성의 선물이다. 그것을 순식간에 바꾸려면 큰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  시바타 씨를 보면서 집에서 홀로 죽는 데에는 '확고한 의사는 필요 없다. 그저 하루하루 우물쭈물 조심조심 지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시바타 씨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죽어가는 사람은 죽는 순간에 '생명의 배턴'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 준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숨을 거두는 순간에 함께 한 사람은 그 생명의 힘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한 나라들의 노인복지 역사를 더듬어보면 노인복지는 간병이 필요한 세대의 요구가 아니라 간병을 하는 세대의 요구에 의해 추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 젊은이들이 "부모님이 쓰러지셔서 모시고 살려고 합니다만"이라든가, "본가에 들어가서 부모님 간병을 해야 할까요?"라고 상담을 해올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그러지 말라고 말한다. 의사를 결정하는 사령탑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간병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다. 만약 가까이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모 집 근처에서 따로 사는 것을 권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집에 간병이 필요한 노인이 있으면 집은 간병일을 하는 직장이 되고 만다. 심지어 숨 한 번 돌릴 틈도 없는 365일 24시간 근무체재이다. (...) 그렇지 않아도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가족간병이다. (...)  가족이 따로 산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니다. 파트타임 가족이 뭐가 큰 문제가 될 것인가. 


* 당신의 노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 당신 자신 뿐이다. 부모도 형제도 아니다. 그리고 자식으로서 가장 큰 효도는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이 안 계셔도 나는 잘 살 테니까 안심하고 먼저 가세요'라는 것이다. 부모가 먼저 죽는 게 순서니까.


* 그래서 나는 부모에게 같이 살자고 하는 자식의 제안을 '악마의 속삭임'이라 부르는 한편, 부모에게는 설령 거기에 '노'라고 대답하더라고 자식 신세는 안 진다는 밉살스러운 말은 하지 말라고 조언해왔다. 여차할 때는 부탁하는 게 좋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게 노후니까.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여주고 온 마음을 다해 길러줬는데 부모가 곤경에 빠지면 손을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자식의 생활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는 게 조건이다. 



*부모가 먼저 죽는 게 일반적인 순서다. 아버지, 어머니. 안심하고 먼저 가세요. 저는 부모님이 안 계셔도 잘 지낼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복지가 있는 게 아닐까?


* 튜브영양을 할지 말지, 인공호흡기를 달지 말지 어느 한 쪽을 편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때그때 망설이고 휘둘리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다. 만약 그런 가족이 없다면 주위 사람이 본인과 함께 망설이고 고민학 생각하면 된다. 나는 살고 죽는 데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나 태어나는 방식도 선택할 수 없었듯이 죽을 때나 죽는 방식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넘어선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 아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며 서로를 비난하는 가족에게 오가사와라 씨는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본인은 평온하게 떠났다는 뜻이겠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 (...) 자신이 연구한 대로는 흘러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 퀴블로 로스도 죽음 앞에서 버둥거리며 발버둥을 치는 한 명의 인간이구나 하고.


*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다만 언제 어떤 식으로 죽는지는 모른다. 살고 싶어 버둥버둥 발버둥 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죽는 방식을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죽음은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임종기에 대한 연구에서 내가 얻은 큰 성과는 이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일은 자신의 의지를 뛰어넘는다. 그것을 컨트롤하려는 마음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손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의 일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 그리고 나를 비롯해 가족이 있는 사람도 가족이 없는 사람도 많은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종교가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저세상을 구원으로 여길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일은 이 세상에서 해결하고 싶다는 것이 내가 품고 있는 실천적인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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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3-07-10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보봐르의 노년과 장 켈레비치의 죽음을 번갈아 읽느라 정신이 없네요^^

Grace 2023-07-17 11:22   좋아요 0 | URL
보봐르의 노년과 장 켈레비치의 죽음??
아이구 궁금하네요.
그들의 노년과 죽음이 어떠한지 필리아 님의 서재에 가봐야겠어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 건강하게 살다 가장 편안하게 죽는 법
우에노 지즈코 지음, 이주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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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죽을 수 있다는 발상이 대단하다.


일본의 간병보험이란 것이 우리나라의 노인장기요양보험과 비슷한 듯 한데

자리보전 하게 되면 우리나라의 경우 과연 노인장기요양보험만으로 충족이 될지는 의심스럽다.


먼저 주변에서 그냥 둘 것 같지가 않다.

요양원 내지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올 것이고,

자리보전 하고 있는 어르신 댁에 기꺼이 서비스를 들어갈 요양보호사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요양원 내지 요양병원으로 들어가면 그냥 죽게 두는 것 같지는 않더라.

명이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명줄을 이어갈 수 있을 때까지 이어가는 경우를 본다.

이런 경우 <김범석>교수는 과연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가를 말한다.

<김현아>교수는 죽음은 치료해야 하는 질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연사>를 들어본 적이 언젠가부터는 없다.

나는 과연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최소한의 자연사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몇일 전 엄마로부터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외할아버지가 7살 정도였을 때던가, 지나던 스님인지, 노인인지, 

할아버지를 보고 이 아이는 71살에 죽을거라는 이야기를 했단다.

그 당시는 70대까지 산다면 장수한다는 이야기를 듣던 시절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셨을게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정말 71살에 폐암 진단을 받으셨다.

대구에 살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그길로 일체의 치료는 거부하고 시골로 가셨고, 약 6개월여 뒤에 돌아가셨단다. 


이 이야기를 듣는데 과연 너무나 훌륭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생전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해지면서 죽음을 대하셨던 그 분의 태도에 존경심마저 일었다.

살아 생전에는 외할머니께 어찌나 막 대하셨던지, 그래서 외할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시대상을 너무나 함축적으로 잘 나타낸 제목이다. 

일본의 간병보험이나 우리나라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정말로 명줄만 이어주는 최선의 병원치료를 벗어나서 <자연사>나, 저자가 말하는 <재택사>를 향해 실질적인 역할을 다하는 제도로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1인 수급자 가정, 

장기요양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에는 어떤 외로움, 고독, 방치, 단절, 무기력, 경제적 빈곤, 고독사  등등 기본적으로 슬픔을 내포하고 있고, 이는 내가 보아 온 그런 어르신들의 삶의 모습이 경험화 되어 진실인 듯 내게 각인 되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노후에 싱글이어도 불행하지 않다", 본 적도 없는 저자가 바로 옆에서 이 말을 씩씩하게 내게 해주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벌써 내 고정관념에 변화가 왔다는 의미인 듯 싶다. 



목차의 소 제목 중 함축된 몇 개를 옮긴다. 


노후에는 혼자가 가장 행복하다

혼자는 외롭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자식에게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부담만 남기자

병원에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

시설에서 죽기 원하는 노인은 없다

간병 서비스가 있는 한 고독사할 일은 없다

마지막 순간, 누가 꼭 옆에 있어야 할까?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미리미리 하자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쁘죠?

피난처를 원하는 것은 환자의 가족

혼자 사는 치매 환자의 상태가 좋은 이유

가족의 각오만 있다면 치매여도 혼자 살 수 있어요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은 살면 안 되나요?

마지막까지 망설이면 돼요





<김현아>교수의 책과 강의를 통해 참 훌륭한 여자구나, 했는데 이 책의 저자도 같은 생각이 올라온다, 참 훌륭한 여자다, 훌륭한 사람이다. 

(남자의 경우는 그저 훌륭하다, 라는 표현으로 나오는데 여자의 경우는 꼭 여자를 붙여서 훌륭한 여자다, 라는 말로 나오니, 얄궂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이다를 덧붙여 본다)









* 비틀비틀 -> 비실비실 -> 쓰러짐, 즉 간병이 필요한 시기가 올 것이다. 


*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 , 노후에 싱글이어도 불행하지 않다


* 그렇다면 노인의 상태가 위급해 보이거나 죽어가는 현장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절대로 119는 부르지 마라. (...)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죽음은 평온하게 서서히 진행된다. 의료진이나 간병인이 '슬슬 때가 됐네요'라고 하면 그 예측은 거의 맞다. 119를 부르고 마치 화재 현장처럼 난리가 나는 죽음은 피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병원사가 절대 바람직한 죽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 병원에 있으면서 행복한 노인은 없다. 병원은 애초에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니까.


* 시설이 잘 맞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솔직히 시설과 데이 서비스에는 모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집단생활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세가와 가즈오씨는 치매 전문의로 치매 환자는 낮에 돌보는 데이 케어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치매에 걸렸을 때 데이 서비스에 가보더니 하루 만에 싫어졌다고 한다. 역시나 그렇다. 에이 케어는 주로 가족이 권한다. 노인이 집에 있는 게 싫기 때문이다. 


* 싱글은 혼자 살고 혼자 나이를 먹으며 혼자 간병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 날, 혼자 죽는다. 이게 그렇게 특별한 일인가? 나도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데 죽을 때만 갑자기 온 친척과 지인에 둘러싸인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하다. 


* 나는 이제 작별 인사와 감사의 말은 상대의 귀가 들릴 때, 들을 수 있는 곳에서 몇 번이고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고 '엄마의 자식이라서 행복했어요'라며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아프기 전에 말해주는 게 좋다. (...) 죽고 난 후에 장례식에서 아무리 훌륭한 조사를 읽는들 죽은 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쁜가. 이런 죽음을 고독사라고 부르기 싫어서 그냥 속 시원하게 '재택사'라는 말을 만들어버렸다. (...) 고독사를 없애자는 캠페인은 사후에 빨리 발견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사후에 빨리 발견되는 게 아니라 살아생전에 고립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 지금의 치매약은 진행을 늦출 뿐, 치료 약은 아니다. 또 어떤 이는 나이를 먹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할아버지가 노망이 났다'로 끝났는데 '치매'라는 진단명이 붙자마자 환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 인지 능력이 쇠퇴하지 않도록 '두뇌체조' 등을 열심히 지도하는 데이 서비스도 있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하든 다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설마 그 분이?'라고 생각할 만큼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호기심이 강했던 학자 선배들이 치매 환자가 되는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치매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 하세가와 가즈오 씨가 치매에 걸렸다고 공표할 정도니까 말이다. (...) 그렇다면 나도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두는 게 좋다. 그리고 치매에 안 걸리려고 쓸데없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치매에 걸렸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응 방안을 생각해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이상한 환경 안에서는 이상한 반응이 정상이다' (...) 속아서 시설에 들어온 치매 고령자가 집에 가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게 과연 '이상행동'일까? 그건 당연하고도 필사적인 호소다. 그래서 기노시타 씨는 치매를 병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예방도 무의미하다. 두뇌체조 따위를 해봤자 예방 효과도 없고 재미조차 없다. 나는 치매 예방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 (...) 치매는 무섭고 난처한 병이라며 공포심을 조장하는 보도도 너무 많다. '조기 발견, 조기 절망'이라는 말도 들린다. (...) 같은 증상이 있어도 치매에 걸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보다는 이런 데이터가 늘어날수록 치매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고방식이 널리 퍼질까 봐 걱정스럽다. (...) 매일 조깅하고 호기심이 강하며 친구가 많은데도 치매에 걸린 사람을 나는 몇 명이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치매 진단 검사인 '하세가와 치매 척도'를 만든 의사 하세가와 가즈오씨도 치매에 걸렸다고 공개한 마당이다. 


* 치매에 걸리면 안락사를 시켜달라는 사람도 있는데 치매에 걸린 정도로는 죽을 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 치매 전문의 야마자키 히데키 씨는 '치매 환자는 무엇을 할 수 있나?'가 아니라 '치매 환자와 무엇을 할 수 있나?'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치매에 걸리거나 말거나 '함께' 울고 웃으면서, 가능한 한 많이 웃으면서 살아가면 된다. 


* "우리 모두 나중에는 치매에 걸립니다. 그 사실을 전제로 치매에 '걸려도' 되는 게 아니라 치매에 '걸려서' 좋은 사회, 또한 이를 전제로 '치매에 대비하는' 사회로 가야 합니다." 

장애인을 위한 유니버셜 디자인처럼 치매 환자가 살기 좋은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살기 좋은 사회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중도 장애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 중도 장애 안에 불편한 몸 뿐만 아니라 불편한 머리와 마음,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존재한다면 치매 케어가 가야 할 방향은 장애인 케어와 똑같다. 사회의 배리어프리와 마음의 배리어프리를 지향해야 한다. 가능하면 나 자신이 치매에 걸리기 전에 말이다. 


* 사전 지시서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자신의 일관성은 잃었는데 동일성을 추구하는 것은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게 월권행위를 하는 것은 아닐까?


* 그런데다 아버지는 절망하고 나약해진 암 환자였다. 어떤 날은 하루라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더니 다음 날에는 재활 병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가족들이 온 사방을 뒤져 재활 병원을 찾아오면 그때는 또 '이제 됐다'며 변덕을 부렸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흔들리는 마음에 실컷 휘둘렸다. 간병 선배였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하게 죽는 모습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감동적이기는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심한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발버둥 치며 죽는 모습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각오도 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마치 롤로코스터를 탄 것처럼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 그 기복에 휘둘리는 게 가족의 역할이다. 

아버지의 간병 이후로 나는 건강할 때 써둔 본인 의사 같은 것은 믿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일단 결정한 것은 끝까지 관철하는 게 훌륭하다는 생각도 버리게 되었다. 


* 혼자 사는 것은 고립이 아니고 혼자 죽어도 고독사가 아니다. 그래서 재택사 라는 새로운 말도 만들었다.


* 늙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사망률 100%이다. 5명 중 1명이 치매에 걸린다고 한다. 간병 없이 살겠다며 열심히 운동하고 치매를 예방한다고 두뇌체조에 매달리기보다는 간병이 필요해져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 안심하고 치매에 걸릴 수 있는 사회, 장애가 있어도 죽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리 아직 너무나 많다. 

당신도 함께 싸워준다면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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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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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 환자도 자기 몸 상태에 대해 가족에게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두려워서였든 가족을 위한 배려였든 결과적으로는 상처가 됐을 뿐이다. 늘 '죽음'으로 오는 관계의 끝을 지켜보는 의사로서 그것이 떠나는 사람에게나 남는 사람에게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환자의 아들처럼 충격받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피를 나눈 사이라고 해도 상처는 쌓이면 곪고 후회는 깊고 아쉬움은 길다. 아니, 아마도 피를 나눈 사이라서 더 그걸것이다.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 아이들이 다녀가고 한 시간쯤 뒤에 환자는 숨을 거뒀다. 그제야 나는 이 환자의 늦어지던 임종이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었던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아이들이 올 때까지 버텼던 모양이었다. 뭉클한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실제로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환자가 버티면 모두가 힘들다. 환자 본인이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마냥 바라봐야만 하는 가족들도 힘겹다. 의사들도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에 안타깝다. 결국 이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모두가 편치 못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에는 차라리 이쯤에서 그냥 편하게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무슨 미련이 남아서 마지막 가는 발걸음을 저리도 데지 못할까 싶어지기도 한다. 


* 유일하게 고3 담임선생님만큼은 달랐다. 내 사정을 뻔히 아셨지만 아버지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드냐 따위의 말씀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내 개인사나 가정사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도 않았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해주셨다. 그 대신 친구들 몰래 장학금을 연계해주셨고, 교사용으로 나온 문제집들을 몇 권씩 건네시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선생님 역시 내 나이였들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먼저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침묵'이었다. 


* 모두들 보호자와 가족들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가 오면 주치의는 나가서 보호자와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가족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쇼피알 연극은 끝나고 주치의는 사망을 선언할 수 있다. 환자의 저승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고 험난했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혼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 나는 가족들의 동의를 받아 환자의 산소 공급과 승압제 주입을 중단했고 그는 사망했다. 2018년 2월 이전이었다면 나는 살인자가 됐을 것이고, 2018년 2월 이후라면 합법적으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의료진이 된다. 행위는 같으나 불법과 합법의 경계는 애매하고 인간의 판단은 인위적이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애매할수록 현장은 혼란스럽다. 법의 모호성은 권력을 낳고 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법을 노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진정 환자를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을 따지려는 이들은 현장에 발들이지 않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법이라는 이름으로 심판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현장에서는 늘 일어난다. 


* 아직 죽지 않은 자, '살아 있는'보다 '아직 죽지 않은'편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길고도 무겁다. 


* 먹고 자고 누워 있는 삶이라고 해도 생을 유지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효도는 이상이고 도덕은 뜬구름이지만 현실은 돈이다. 


*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 내가 목격한 마지막 뒷모습은 때로는 정리되지 않은 돈이었고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시끄럽고 혼란스럽게 뒤얽혀 고인에 대한 슬픔을 넘어 분노로, 지리멸렬함으로 끝나고는 했다. (...) 그래서 그럴까? 나느 ㄴ종종 그조차고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 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떠나고 난 뒤 타인의 기억에 남을 내 마지막이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내가 떠난 뒤에만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 이 삶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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