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 생의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
김범석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 환자도 자기 몸 상태에 대해 가족에게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두려워서였든 가족을 위한 배려였든 결과적으로는 상처가 됐을 뿐이다. 늘 '죽음'으로 오는 관계의 끝을 지켜보는 의사로서 그것이 떠나는 사람에게나 남는 사람에게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환자의 아들처럼 충격받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피를 나눈 사이라고 해도 상처는 쌓이면 곪고 후회는 깊고 아쉬움은 길다. 아니, 아마도 피를 나눈 사이라서 더 그걸것이다.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서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 아이들이 다녀가고 한 시간쯤 뒤에 환자는 숨을 거뒀다. 그제야 나는 이 환자의 늦어지던 임종이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었던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아이들이 올 때까지 버텼던 모양이었다. 뭉클한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실제로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환자가 버티면 모두가 힘들다. 환자 본인이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마냥 바라봐야만 하는 가족들도 힘겹다. 의사들도 달리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기에 안타깝다. 결국 이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모두가 편치 못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에는 차라리 이쯤에서 그냥 편하게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무슨 미련이 남아서 마지막 가는 발걸음을 저리도 데지 못할까 싶어지기도 한다. 


* 유일하게 고3 담임선생님만큼은 달랐다. 내 사정을 뻔히 아셨지만 아버지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드냐 따위의 말씀은 절대 하지 않았다. 내 개인사나 가정사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도 않았고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해주셨다. 그 대신 친구들 몰래 장학금을 연계해주셨고, 교사용으로 나온 문제집들을 몇 권씩 건네시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선생님 역시 내 나이였들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먼저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침묵'이었다. 


* 모두들 보호자와 가족들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가 오면 주치의는 나가서 보호자와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가족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면 쇼피알 연극은 끝나고 주치의는 사망을 선언할 수 있다. 환자의 저승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들고 험난했다. 가족들과 의료진은 환자에게 현대의학으로 할 수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고 혼자는 너무 힘들게 저승길로 떠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꾸 되묻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하고.


* 나는 가족들의 동의를 받아 환자의 산소 공급과 승압제 주입을 중단했고 그는 사망했다. 2018년 2월 이전이었다면 나는 살인자가 됐을 것이고, 2018년 2월 이후라면 합법적으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의료진이 된다. 행위는 같으나 불법과 합법의 경계는 애매하고 인간의 판단은 인위적이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애매할수록 현장은 혼란스럽다. 법의 모호성은 권력을 낳고 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법을 노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진정 환자를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을 따지려는 이들은 현장에 발들이지 않고 나중에 문제가 되면 법이라는 이름으로 심판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는 알 수 없는 일들이 현장에서는 늘 일어난다. 


* 아직 죽지 않은 자, '살아 있는'보다 '아직 죽지 않은'편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길고도 무겁다. 


* 먹고 자고 누워 있는 삶이라고 해도 생을 유지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효도는 이상이고 도덕은 뜬구름이지만 현실은 돈이다. 


*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 내가 목격한 마지막 뒷모습은 때로는 정리되지 않은 돈이었고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시끄럽고 혼란스럽게 뒤얽혀 고인에 대한 슬픔을 넘어 분노로, 지리멸렬함으로 끝나고는 했다. (...) 그래서 그럴까? 나느 ㄴ종종 그조차고 책상 정리를 하듯이, 집을 치우듯이 평소에 정리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흔적들을, 나의 관계들을, 나의 많은 것들을 오늘 집을 나서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살펴야 한다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고 지금의 내 흔적이 내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덜 어지르게 되고, 더 치우게 된다. 좋은 관계는 잘 가꾸게 되고 그렇지 못한 관계는 조금 더 정리하기가 쉬워진다. 홀가분하게, 덜 혼란스럽게 자주 돌아보고 자주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떠나고 난 뒤 타인의 기억에 남을 내 마지막이 어떻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해보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내가 떠난 뒤에만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 이 삶에서 드러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