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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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이란 언어라고 칭하며, 언어(言語)를 살펴보면 둘 다 한자어 중에 를 분리해보면 숫자 사(, 다른 한자로 )와 입 구()자를 사용한다. 네 명의 입이 모이면 말씀 언자가 생기는 원리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이 모이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의 행위이다. 왜 예전에 저녁 석()에 입 구()자가 붙으면 이름 명()이 되는 것인가? 이름을 부르는 것은 밤에 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은 어두운 밤에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이름은 언어라는 하나의 주술력이 강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름을 부르는 것이 왜 주술적인가? 생각해보면 누가 길을 걷다가 다소 불량한 행동을 한다. 그런데 뒤에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행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량한 행동을 하던 사람은 어느 순간 동작을 멈추고 자신의 신변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인간이 가진 말이란 행위는 엄청난 힘을 가지는 것이다. 말과 글에서 모두 같은 뜻을 전달할 수 있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다면, 우리 부모님이 누구야 어서 저녁 먹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문자로 저녁 먹자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말로 전달하는 게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시각은 인간의 눈으로 보고 뇌에서 판단하고, 귀는 들으면서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인간에게 말 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본질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글은 쓰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므로 생각할 틈을 주는 반면, 말은 말하는 순간 화자나 청자 모두 그 상황에 몰입한다. 글은 흔적을 남기지만, 말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대신 귀에 들리는 언어의 울림은 매우 강렬하다. 말하는 그 순간은 판단의 이성능력보단 감성의 공감능력이 중시된다.

 

방송이나 주변 토론회를 보면 패널이 참여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누군가는 매우 침착하고 논리정연하고, 다른 누군가는 논리도 없이 억지를 부리며 심지어 욕설과 큰 소리로 떠드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말하다 그 자체는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가 바로 튀어나오는 패턴으로 볼 수 있다. 김영하 작가의 <말하다>는 작가 김영하가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말은 귀로 들어야 하나, 요새는 녹음 장비가 잘 되어 있으므로, 녹음된 인터뷰 내용이 책으로 실려 기록으로 전해진다.

 

김영하 작가가 말해주는 그의 이야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라 한다. 결국 말하는 방법이나 이야기 속 내용은 그 인간의 본질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야기하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이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 이야기로 통해 다시 생각이 이어지는 반복이 이루어지면서 대화가 오고 간다. 그러니 그 인간의 본질이 대화로 통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는 어쩔 수 없다.

 

김영하의 이야기는 언어로 통해 인터뷰하는 사람의 귀로 전달된다. 아마 우리가 책을 보는 감정과 청자의 귀로 듣는 목소리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김영하 작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꾼적인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김영하 작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의 소설책이 제법 많이 나온 것도 알고 있다. 게다가 그의 소설 하나가 영화로 제작되어 조만간 나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김영하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고, 단지 그의 대화록인 <말하다>만 읽었을 뿐이다.

 

그의 사고회로는 매우 독특했고, 사고의 확장에는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뭔가 모르게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김영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저술한 밀란 쿤테라를 좋아했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간이 존재라 가벼운 깃털 같은 존재이기도 하나, 그 가벼움 속에 아주 무거운 삶이 눌러져 있다. 외과의사 토마스는 생명을 살리는 의사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 테레사 외에도 다른 여자와 성행위를 즐기는 바람둥이다. 인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인지 무겁게 다루는 것인지? 아니라면 소비에트 연방의 탱크가 체코 프라하를 밟아 넘어오던 시절, 자신이 적은 글이 신문에 기고되면서 의사에 해고되어도 그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영역은 도대체 어디에서 보여주는 것이란 말인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토마스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고, 자신의 삶에 주어진 그 자체에 무거운 집착을 보여준다. 밀란 쿤테라의 소설이라면 인간의 삶을 토마스를 통해 본다면 가볍다면 오히려 마지막 토마스의 죽음을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김영하가 밀란 쿤테라를 좋아하고, 그의 글에서 많은 영감이 왔다면 그는 밀란 쿤테라와 다른 길을 가는 것 같다. 밀란 쿤테라는 니체의 말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 공산당에서 활동한 만큼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김영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이고, 비관적 현실주의자로 선언한다. 현실에서 한국은 개인주의자로 살아가기 힘들고, 단지 집단적 이기주의 하나의 개인주의로 되어버렸다. 개인의 이기심에서 타인에게 관심도 없다가 뭔가 화제나 이익거리가 생기면 순식간에 모이는 속성, 현실에 너무 좌절하거나 혹은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것, 독자가 김영하에게 묻는다. 이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희망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수 없다. 단지 그 환경에 냉정하게 생각하고 대처하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렇게 죽음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은 단지 생물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지, 생물학을 넘어 사회학적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비관적 현실주의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어느 개인에게 주어진 삶을 바꿀 수 없다. 방관적 태도로 삶을 보는 작가라 하여 그 자체가 틀리거나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은 자신만의 개인주의 성향을 가지고 사는 건 자유다. 그러나 그 자신의 입지로 인해 타인의 삶에 큰 영향을 주면서 개인주의 성향이라 말하는 것에서 아주 모순되어 있다. 인간은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김영하의 <말하다>를 보면서 재미는 분명 있었다. 단지 마지막 페이지를 접은 후 남은 것들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개인주의 성향은 책에서 읽혀진다. 나의 이야기는 이렇고, 그 이야기를 재밌게 전달하지만, 그런다고 이 이야기는 당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책 본문에서 소설과 현실적 관계에서 그는 연결성을 배제하려 한다. 역사와 소설은 분리한다. 역사라는 사실과 소설이 문예적 세계관을 분리되면, 형식주의적 형태의 글이 탄생된다.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그의 소설을 읽은 주변 사람과 이야기해보면 확실히 느낌이 온다.

 

영화로 제작되면 아주 재미있겠지만, 막상 영화관을 나오면 무엇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겉의 세계는 화려한 꽃다발이라면 꽃 안에 숨겨진 달콤한 꿀은 없는 느낌이다. 글을 쓰는 것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자유라고 한다.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말을 하더라도 글을 적어 힘들게 손가락을 아프게 하고, 책상에서 불편하게 앉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책에서 그런 의미심장한 전달과 더불어 책 안의 내용이 서로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말하는 것은 순간적이나, 글은 지속적인 것이다. 예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다산 선생이 강진에 유배 오면서 남양주에 식구들의 안위가 무척 걱정되었을 것이다. 외로운 귀양살이 중 다산 선생은 집에서 비보를 접한다. 자신의 막내아들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아직 4~5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다산의 아들이 죽었지만, 다산은 아들에 대한 죽음을 애도하며 기록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없었다면 그 아들은 살아있었다는 사실조차 후대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고 세상에서 사라져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사리일 수 있다. 하지만 태어난 순간,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만큼 나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몸부림을 친다. 정체성이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주변에게 알리는 하나의 방법이다. 김영하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 인간에게 남은 최후의 자유이고, 그 글을 쓰게 만드는 생각의 확장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의 재산이다. 인간이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나라는 존재를 다시 돌아보고 그 자신이 어떤 세상에 살아가며,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돌아볼 수 없다.

 

그러면 김영하 작가의 개인적 성향과 자아성찰 세계가 모순을 일으킨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고 또 하나의 부정이 되어 간다. 변증법이란 반드시 어느 한쪽만 옳다고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인간은 내가 누군가 영향을 받고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을 하는 것은 그 영향을 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말하다>를 읽으면서 사고와 표현의 확장을 동반하면 거기에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변증법적 관계 역시 동반한다. 말을 하는 화자는 언제나 옳은 말만 논리적인 주장만 하지 않는다.

 

내 서평을 읽으면 누군가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말과 언어는 무슨 관계이고,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내용과 소설은 좋다는 것이야? 나쁘다는 것이야? 작가가 마음에 드는 것이야 들지 않은 것이야? 솔직히 말하여 김영하의 <말하다>는 재미있는 책이지만, 좋은 책은 아니다. 김영하의 이야기들은 재미있고 새로운 생각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말이나, 한편으로 현실적 상황과 조우하면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딱 무엇이 맞거나 틀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말하는 것이란 모두에게 맞는 이야기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가장 중요하고 조심할 부분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 점이다. 어느 관점을 두고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고 당연하다. 무게의 중심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무게에 자신의 의식과 판단조차 같이 침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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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5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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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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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7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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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8 09: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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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체험 : 나는 103호 환자 천재들의 생각법
사회적기업 인문학카페 지음, 샤크언니 그림, 임시혁 글 / 인문학카페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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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3호 환자>라는 서적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철학이란 개념이 얼마나 익숙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철학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것이라 여기고 멀리 하려 한다. 물론 철학을 진짜 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 책에서 처음에 니체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칸트로 끝이 난다. 중간에 플라톤과 프로이트, 마르크스도 등장하지만, 그런 이름들을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이름이 가진 하나의 의미로도 벅차지만, 그들이 저술한 책을 보는 그 자체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책을 상당히 쉬운 방식으로 개념을 전파했다. 인간이란 지식과 경험 그리고 몸의 지식이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충분히 상기시킬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단지 왜 나는 103호의 환자이었을까? 103호에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다. 단지 환자라는 대상이 바로 어린이병동에 입원한 사람이란 점이다. 어린이란 존재란 곧 배움을 받아야 할 대상이고, 배움으로 통해 사회적인 가치와 삶의 방식을 익혀간다.

 

주인공은 아무런 기억도 없고,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라면 나이와 국적조차 모른다. 이름을 본다면 백인이 맞겠지만, 그래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서 어디서 자란지도 모른다. 곧 자신의 이성은 존재해도 이성이란 하나의 관념을 좌우할 수 있는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선험적 판단이 가능하다. 인간은 자신의 사회적, 지리적, 환경적 속성에 따라 경험을 가지고 그것은 자신의 판단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로크가 말한 백지설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인간은 자신의 요건이 선천적인 요인보다 후천적인 요인이 클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지 않았으나,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의 모든 불평등과 사회적 갈등은 인간의 후천적인 영향에 의해 기인된다고 말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본다면 알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선험적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할 것이나, 경험과 주변여건에 따라 다르게 되고, 곧 그것은 윤리와 논리를 지배하는 하나의 방해로 된다. 그러나 철학이란 모든 게 하나의 답만 옳은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과 시선 그리고 그 너머의 해답을 알려줄 뿐이다.

 

답을 제공하는 점에서 이 책에서 주인공 중에 하나인 바덴 박사와 같이 굳이 정신의학과 전공자나 혹은 철학도, 인문학자가 아니어도 철학을 말할 수 있다. 철학(哲學)이란 사리를 밝히는 학문이고, 서양철학의 시작점인 플라톤은 철학이란 필로소피아(philosophia)란 단어를 스승 소크라테스로 통해 밝힌다. 철학은 신을 사랑하는 학문이고,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지혜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지혜와 지식은 조금 다르다.

 

이 책에서 지식을 몸과 경험 등으로 쌓을 수 있겠지만, 지혜는 지식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지식에 철학적 사고를 집어넣어야 지혜가 탄생한다. 옛날 우리 어른들도 보면 그렇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 못해도 많은 일들을 슬기롭게 처리한다. 철학이란 우리 인간사를 슬기롭게 처리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철학이 어렵고 복잡해진 이유는 과거와 달리 현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세상이 많이 변화하고, 좁은 세계가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인간이 보던 우주조차 더 넓어지게 되었다. 종교와 과학, 윤리와 논리가 계속 변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철학을 알아가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한 사회와 세상 더 나아가서 우리 안에 있거나 혹은 없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철학은 돈은 되지 않으나, 철학이 없다면 인간에게 인간이란 이름을 부여할 수 없다. 왜 철학을 배우는가? 라는 말보단 왜 우리는 철학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인간이고, 언젠가 죽을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이 소중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먼저 생각하고, 그 나라는 존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스스로 지키기 위한 길인 것이다.

 

그런데 철학을 할 때 왜 유명한 철학자로 통해 보는가? 인간사고방식은 누구든지 자신이 가진 생각이 타인에게 확인할 수 있지만, 자신이 사고할 수 없던 지식과 지혜를 타인으로 통해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나 존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 예비지식 내지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그 지식과 지혜의 습득은 쉽지가 않다. 1권에서 어린이의 새 생명에 대한 찬양에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지 않으면 길을 열 수 없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쉽지 않은 책이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저편> 등을 읽으면 과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게 바로 이때까지 내가 접하지 못한 영역을 접촉하고, 그 경험으로 통해 새로운 것을 마주하고 배워간다는 것이다. 철학함이란 결국 계속 배우는 인간이고, 배움으로 통해 늘 새로운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을 그런 식으로 진행하면 모두가 지칠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과학적 사고,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한 마르크스의 경우, <자본> 전 권을 읽기 위해선 몇 개월을 고생해야 한다. 헤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책에 접근한다면 어느 일반인들이 철학에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인가? 철학은 처음에 쉽게 간단히 접근하는 편이 좋다. 만일 조금 더 깊은 성찰과 현실에 대한 존재성을 탐구하고 싶다면 더 높은 책을 읽는 게 좋다.

 

배를 타면 나침반이 필요하듯이, 학문 역시 나침반이 필요하다. 더구나 철학을 알아갈 때 기존 자신이 가진 가치관으로 접근할 수 없다. <나는 103호 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때까지 가진 고정관념에서 조금이라도 더 벗어나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103호 환자보단 바덴 의사처럼 되고 싶어 한다. 물론 자신은 바덴 의사와 같이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103호 환자만이 철학적 연구대상으로 지정하지 않는다.

 

103호실 환자를 치료하는 바덴 박사조차 하나의 대상으로 놓는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과 같이 정언명령, 인간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하나의 목적으로 대해야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수 없는 것처럼, 바덴 박사는 병원비나 기타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나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위해 103호 환자에게 호의를 보낸다. 생각해보면 바덴 박사가 하는 행동은 자신의 이기심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여러 임상조건을 연구하여 다양한 증세를 파악하여 세미나에 발표한다면 자신의 입지 이상으로 의학발전에 큰 발전을 줄 수 있다.

 

이 책에는 없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처럼, 경제라는 것은 어떤 재원과 서비스를 필요할 사람이나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 모두 좋은 이익을 줄 수 있는 게 나라가 부유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아마 마지막 파트에서 애덤 스미스의 생각처럼 모두가 좋아지는 결론이었다면, 칸트의 논리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 행동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는 개인의 선택이나, 그 선택적 기로에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는 철학적 사고는 필수적이다. 세상은 나만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타인의 존재가 있기에 자아라는 존재가 인식하는 것처럼, 한 번은 우리 스스로 103호 환자는 아니더라도 102호나 104호 환자 정도 되어보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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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 조선의 사대부 5
김강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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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다시 작성한 시간이 너무 오래 된 것 같다. 그동안 글을 올릴 수도 없었고, 글을 올리기 위해 책 1권조차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동안 말기 암으로 고생하다 결국 다시 넘어올 수 없는 머나먼 세계로 떠나갔다. 아버지와의 지난 추억을 생각하면,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배를 타는 선원이고, 집에 있는 시간이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112달 중에 1~2개월 정도, 집에 온다고 해도 여유는 없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업무를 해야 했고, 집에 가만히 쉬는 게 아니라 오래된 집을 수리하기에 바빴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에 유대감이 다른 집안의 아이들보다 크지 않았다. 어느 정도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20대 후반 회사에 취업하면서이다. 그때는 배도 멀리는 가지 않았고, 집에 자주 왔으며, 나도 하사 군복무를 마친 후라 집에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생 고생만 하신 분이다. 어린 시절은 추위와 배고픔, 청장년은 배만 탔고, 노년은 그동안에 고생한 삶에 의해 암으로 마감했다.

 

이런 아버지이기에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와 추억은 별로 없다. 단지 예전에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삶을 살았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가족의 내력만 자주 들었다. 기억나는 일화 중에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 친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 유산 중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고, 오로지 집안의 족보만 가져갔다. 어린 시절 집에 족보가 있었는데, 한지로 된 책이 3권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가난한 농부의 자식이고, 농부로 살아왔기에 한자를 제대로 읽지는 못한다.

 

아버지도 배운 것이 없지만, 그래도 혼자 독학하여 한자를 어느 정도 읽으시고, 집안의 족보를 이야기해주었다. 집안 제사를 지내면 나는 8대조 할아버지를 시작하여 증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지낸다. 시제를 올리면 할아버지의 이름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족보를 읽어야 했다. 아버지나 형도 요새 같은 시대에 무슨 조상의 덕을 보겠냐고 하나, 그래도 아버지는 족보를 챙기시던 분이었다.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집안의 족보, 즉 자신이란 존재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정체성이 유일한 끈이고, 그 끈은 나와 형, 그리고 형의 아이까지 이어진 것이다.

 

제사를 지내면서 제일 먼저 가는 8대조 할아버지(그 이상의 할아버지는 큰댁에서 먼저 제사를 가져가므로)는 조선시대 벼슬을 했다. 첨지(僉知),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정삼품 무관이었고, 통정대부라는 직책이 주어진다. 아마 대략 영조시대 정도인 것 같은데, 무덤을 보면 묏자리는 정말 좋으나, 그렇게 권력이나 재산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비석이나 묘비는 없고, 단지 봉만 존재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시대 붕당계열에서 남인(南人)에 속했다. 남인은 정조대왕 이후 거의 몰락했으며, 남인 지식인들이 천주교와 많은 연루된 관계로 정치적으로 박해를 당한 일도 많다.

 

아버지 말로는 천주교 박해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경우 다산 정약용의 제자나 주변인들이 화를 당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우리 집안도 끼여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해사옥과 황사영백서가 일어날 때 당시 우리 할아버지와 조금 먼 친척분이 관아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 시대 양반이 뭐고, 상놈이 무엇인가에서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 역사가 있다는 것은 버려서 안 될 기록이다. 그것은 한국이 그동안 가진 역사이란 점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과거의 기록과 역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나의 가계를 알아가는 것은 과거를 보는 것도 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나에겐 아무 것도 남긴 것도 없이 그저 고생만 하다 저승으로 가신 아버지가 그나마 그분께서 마음속으로 지켜오던 것을 계속 유지시켜주는 가교에 불가하다. 이런 내 모습이 고지식하다 여겨도,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조선시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그런 것을 볼 이유는 없다.

 

한국에 태어난 이상 한국인이란 점과 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멀어질 수 없다. 또한 한국 이전에 조선이란 국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사대부가 통치하던 국가가 어떤 곳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태 문치를 내세웠지만, 나름 조선도 무예를 중시한 점이 의외였다. 내가 집안의 내력을 다시 돌아본 계기도 그런 점이다. 양반(兩班)은 문관인 동반(東班), 무관이 서반(西班)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시대 무관의 이름보다 문관의 이름을 많이 알지만, 무관이 문관을 하고, 문관이 무관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아버지와 아들의 직급이나 업무에서 문무를 오고가는 것이 많았다.

 

조선역사를 보면 600년이다. 600년 동안 유지한 단일 국가는 세계에 내놓아도 좀처럼 없다. 물론 고조선 역사가 2,000년이란 말도 있지만, 그래도 600년이란 역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이다. 어리석고 잔인하고 교만한 양반사대부가 많은 점은 확실하나,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관들이 직접 목숨 걸고 전쟁에서 싸우고, 문관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의예지를 지켰다. 대신 그런 집안의 가족들은 큰 화를 당했고, 그런 가족들의 후손들까지 그 여파가 닿기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흔히 아는 인물인 서애 류성룡이 나온다. 류성룡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극복한 명재상이고,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뛰어난 책략가이다. 그러나 선조와 반대 당파의 논쟁으로 고향인 안동으로 은거하게 되었고, 친구인 이순신도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병법이나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의 침입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 명종 때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재상이면 동고 이준경이 직접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무찔렀는데, 그는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탄수 이연경의 사촌동생이었다. 이준경이 전남 연안에서 적을 칠 때 우연히 우리 집안의 어른도 계셨다. 그 당시의 할아버지의 동생, 만호(萬戶)라는 무관을 지녔고, 이준경의 막하에서 무장을 맡으며, 왜구를 소탕했다. 그리고 만호를 지낸 분의 형인 나의 직계 할아버지는 본래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시작한 무관이었고, 나중에 순천부사로 부임했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순천부사를 지낸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는 문과 급제하여 현감을 맡았고, 당상관인 통정대부까지 이르렀다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대부분 할아버지들이 문관일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관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개국 전에는 군기소윤(軍器少尹, 군수를 관리하는 참모)을 하신 분이 있었고 그분의 형은 대호군(大護軍, 수도방위를 책임지는 참모)으로 무관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으로 넘어가자, 군기소윤의 아들이 무관 창신교위(彰信校尉), 그 창신교위 아들이 진위장군(振威將軍)과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을 맡았다. 무관이면서도 사간원에서 언론을 맡은 사간을 맡은 것이다. 문무를 동시에 수행했던 것이다. 그 다음은 무관이 아닌 문관 중 하급관리인 참봉, 그 다음은 현감, 그 다음에 순천부사를 지낸 분이었다. 그 다음은 진사로 성균관에서 학업을 하시다 정암 조광조를 따르는 이유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후 몇 십년 뒤 영의정 동고 이준경의 천거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이 되신 분이 계셨다.

 

어모장군의 동생은 만호를 지냈고, 어모장군의 아들은 무관 훈련원 사정(司正)을 맡다가 훈련원정과 북청군을 지키다 변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분이 명종 때 무관으로 임관하여 광해군 2년 때 돌아가셨는데, 나이가 70세가 넘은 노장이니 조선시대 이 나이에 변방에서 근무해서 운명했다면 순국하신 것과 것이다. 이때까지 보면 순수 문관은 2분이고, 나머지는 다들 무관을 맡았다. 변방에서 순국하신 분의 아들은 동몽교관(童蒙敎官,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이였고, 그 다음은 가선대부 좌승지이었다.

 

좌승지를 하신 분의 아들은 벼슬하지 않았지만 그분의 아들이 중추부첨지사를 맡게 되어 벼슬하지 않은 분이 증 동부승지로 되었다. 이 뒤로는 벼슬한 분은 없고, 마을에서 훈장선생을 하신 분은 계셨지만, 남인세력이었기에 그대로 몰락양반이 되었다. 몰락한 양반의 가계가 지금까지 거의 200년을 안고 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 증조부나 고조부조차 가난한 농부로 살아야했던 운명은 조선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위에 말한 것처럼 조상의 덕을 본 게 없다면서 형은 집안내력에 신경 쓰지 않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집안내력을 소상히 나에게 말해 주었다. <문무를 갖춘 양반의 나라>를 읽은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음날에 읽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나와 형이다. 어떻게 보자면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지만, 그래도 아버지만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다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20세기를 걸쳐 21세기 대한민국은 물질만능주의 사회이다. 민주주의라고 해도 돈에 따라 인생의 굴곡이 달라진다. 그래서 돈이 넉넉지 못한 한 개인이 이런 피폐한 세상에 살려면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난감하다. 조상을 잘 안다고 해도 돈이 나오거나 출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살아있는 현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농공상이 얼마나 심각한 폐단이 있었는지 알고, 개혁론자 사대부들이 천민들도 능력이 되면 벼슬을 줘야 한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고 몰락한 사례도 많았다.

 

지금도 사회적 문제가 만연하고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배워야 하고, 무엇을 찾아 배워야 하는가? 결국은 역사를 알아야 한다. 개인가족이 지닌 역사와 국가가 지닌 역사의 규모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 개인가족이 전승해온 기록에서 당시 살아간 인간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문무를 갖춘 양반은 필요했다. 비겁하지만, 문자를 알아야 지식을 찾고, 지식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난 과거가 멀다 하지만, 우리도 먼 미래 후예들에게 단지 과거의 존재일 뿐이다. 과거라는 이유로 우리가 앞을 것을 모두 부정하면, 먼 미래의 주인공 역시 우리를 부정할 뿐이다. 존재의 부정성은 곧 다시 자신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정체성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어떤 존재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미궁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 티베트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한 한 예술가를 보았다. 티베트의 흙을 가지고 와서 티베트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마을공터에 뿌려주었다.

 

티베트의 유민들은 그 흙을 기리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언젠가 다시 돌아가기를 약속했다. 예술가 본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지 옛날이고, 어머니 역시 노년에 이르렀다. 과거가 좋든 말든 그 과거 자체는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선택이다. 그래야 어떤 삶을 살아갈 건지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양반의 사회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문제가 심각했다. 그래도 병자호란 이후 근 270년 정도를 유지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섞어도 나라가 굴러간 점에서 그 근원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후로 갈수록 무예를 소홀해지면서 일제에 조선이란 나라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도 삼면이 바다고, 북한과 러시아, 일본, 중국, 미국 등 수많은 나라와 접한 이 환경에서 우리나라가 문무를 고르게 가지지 못한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반면교사, 온고지신이란 단어는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하면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켜온 집안의 내력을 생각했다. 조선개국 아래 할아버지 9분이 계속 벼슬자리에 올랐으며,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도 삶의 흔적을 발견했다.

 

인간의 진정한 죽음은 육신이 다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인지는 각자의 가치관마다 다르지만, 아버지의 삶을 내가 기억하고 싶다면, 그 이전의 사람도 기억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앞에 살았던 자들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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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5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6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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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6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이라는 어떤 것인가? 사실 생각해보자면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귀찮고, 미개한 존재이고, 정치인들이 본다면 분명 나라의 주인이나 오히려 그들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부분 서민은 프롤레타리아로 살아가지만,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라는 의식은 없이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혁명에서 시민혁명이 일으킬 때 주요한 계급이 쁘디 부르주아였다. 그런 점에서 소시민은 자신이 쁘디 부르주아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오히려 프랑스대혁명 때 머리가 아닌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내뿜은 사람들은 배고픔에 허덕이는 프롤레타리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은 가혹하다. 그 혹독하고 기구한 인생은 나는 잘 알고 있다. 아니 알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였지만, 노동자라는 계급의식보단 그저 사회적으로 소외받아온 존재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고, 그 아들은 시골을 나와 도시로 나와 배고픔과 서러움 속에서 살아왔다.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고기잡이배에서 일했고, 거기서 받은 생선을 당시 이모부 집으로 가지고 와서 시장에 내팔도록 했다. 잠수하다가 귀 안의 고막이 터지고, 배를 타게 되면서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오히려 한국 밖에서 있던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는 색맹이었다. 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거기다가 평발이다. 월남전에 가서 돈을 벌려고 했지만, 평발이라 가지 못했고, 색맹 특성상 운전이나 여러 가지 직업을 선택할 수 없었다. 처음에 생선 잡이 선원에서 어느 순간 화물을 실고 다니는 마도로스가 되었다. 외국에 다니면 해적에게 붙잡힌 적도 있고, 배에서 병에 걸려 3일 동안 계속 먹지도 못한 채 고통에 괴로워했다. 처음에 정규직에 일하다 정년 후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가혹한 노동환경에 저렴한 월급, 거기다가 퇴직금조차 받지 못하고, 산업재해로 내려도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지역차별을 당했으니, 가난으로 시작된 배고픔과 추위, 학력이 낮은 것과 지역이 다른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인간은 선천적 불평등과 사회적 도덕적 불평등이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런 불평등 2가지 모두 당한 셈이다. 평생 그렇게 일만 하고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신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2017217일 금요일 오후 1048분 사망신고가 내렸다. 아버지는 작년부터 담도암으로 고생했고, 수술을 받았지만, 암의 재발 및 전이가 되어 복막 전체에 암세포가 퍼졌다.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폐에 염증이 생겨 폐렴증세를 앓다가 결국 심장이 정지되어 그 힘든 인생의 막을 내렸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난 사람치고 키도 크고 어깨도 넓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 편이나 가난하여 중학교만 마치고 생계전선을 뛰어들었다.

 

어릴 적, 배고파서 잠이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배고픈 상태서 무거운 지게를 지니 등이 펴지지 않은 이야기, 추위에 발이 얼어 동창에 걸린 이야기 등등 아버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추억보단 아픈 기억만 내게 이야기해줬다. 경남지역에 살면서 내가 노무현재단 마크를 차에 붙이고 타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게 기억난다. 내가 지역차별이 심한 지역에서 누군가 해를 당할까봐 그런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 살아오면서 힘들게 사신 분이 강자의 논리에 의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온다.

 

내가 마르크스, 루소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이미 옆에서 많이 봤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자, 특히 배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선원들은 그 열악한 환경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 몸으로 확인했다. 작업안전사고로 대퇴부 뼈가 금이 가고, 용접하다 전기에 감전되고, 더운 기관실 열기 때문에 화상도 입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다보니 심장과 신장이 나빠지고, 결국 암이 발병하는 이유 역시 유전자 요인보단 환경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마지막 모습까지 계속 지켜봤다. 처음에 고통에 괴로워하다 수술 후 좋아진 것처럼 보이더니 다시 재발하여 밥도 드시지 못한 모습을 말이다. 끝내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조차 되지 않아 호스피스병동까지 이송되었다. 이송되기 전 선망증세로 며칠 동안 난동을 피우다가 다시 정신이 온 것 같더니 또 다시 선망증세로 이어진 후에 의식을 상실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진통제와 몰핀이 들어가도 몸부림을 계속 치고 또 쳤다. 그러더니 어제부터 의식을 잃다가 오늘 밤,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머니 곁으로 갔다.

 

아버지가 맑은 정신에 나와 대화한 것은 결혼에 대한 부분이고, 아버지가 나라는 사람을 알아본 것은 13일 월요일 낮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나보고 병신이란 말이었고, 아버지가 마지막을 의식을 가진 것은 13일 저녁 늦은 시간 내 조카를 보고 이름을 부른 것이고, 아버지가 선망증세에서 제대로 부른 단어는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심장이 정지하고, 입에 가려진 호흡기를 떼니 아주 평안한 표정이었다. 꿈에서 할머니를 만났던 모양이다. 다른 사망자처럼 온몸에서 체액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계속 드시지도 못하고 몸무게가 계속 줄어 뼈와 살이 붙을 수준이니 너무 깨끗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죽음을 보면서 또한 아버지 같이 병을 앓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대학병원 2인실에서 6인실로 갈 때 확실히 병실의 위생이나 쾌적함 등 여러 환경적인 요소가 좋지 못했고, 좁은 병실에서 그나마 남은 자리마저 보호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불편했는가? 그렇게 몸이 상할 정도로 일하고, 병원에서도 편한 안정도 취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건 요양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올 때 맑은 공기와 탁 트인 전경이 마음에 드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7일만 가고, 나머지 3일은 고통의 몸부림에 나머지 2일은 의식 없이 돌아갔다.

 

아버지 죽음에서 고통의 몸부림을 치는 모습과 괜히 나를 보면서 욕을 하고 멸시하는 모습에 고통 없이 운명하시길 바랐다. 자아의 의식이 없는 인간에게 과연 인간이란 이름을 가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버지가 다시 깨어나지 못한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알아보고 가지 못한 것이 슬펐다. 적어도 인간답게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말이다.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서 이재용의 구속사태까지 이어졌다. 삼성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암으로 죽고 투병 중인데, 오히려 진실은 가려지고 그들의 죽음을 조롱하는 사회에 안타까움만 더해간다.

 

인간의 죽음에 경로와 과정 그리고 마지막은 다르지만, 적어도 부조리와 모순, 삶의 애한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져 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그동안 삶을 보자면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 개인이 살아가는 구조는 세상의 부조리로 조장된 삶이다. 아버지가 고모와 삼촌들이 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암에 걸린 다치면서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스트레스에 화병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말이다. 아버지 같은 노동자들은 노동능력이 상실하는 50대 이후부터 온갖 잔병들이 찾아온다. 왜 그런 것일까? 이런 이야기는 <자본>에도 나오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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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8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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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2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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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리미티드 에디션 - 도서(소설) + 500피스 직소퍼즐
신카이 마코토 지음, 박미정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1) 신카이 마코토 감독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이름을 대면 딱하고 생각나는 작품들은 <초속 5>이다. 어릴 적 서로 좋아하던 사람들이 결국 서로 재회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아련한 작품이다. 작품명처럼 초속 5로 내려오는 것은 벚꽃의 낙화(落花)이다. 높은 나무 위의 벚꽃 하나가 바람에 날려 계속 이동하여 결국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멀어져 버린 것이다. 그의 로맨스적인 감각은 언제나 좋지만은 않다. <별의 목소리>에서 지구와 떨어질수록 소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친구와의 메시지를 늦게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막이 내린다.

 

하지만 그 믿음이란 솔직히 말하여 이룰 수 없는 믿음, 결코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어느 목적에 있다고 해도 그 목적 자체에 도달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착하지 않는 서사이다. 서사의 결론은 뭐든지 마무리가 되어야 하는 점이고, 그 서사의 마무리라는 종점에서 새로운 서사가 탄생한다. 서사 자체가 끝이 나도 이어지지 않는 서사,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은 그래 왔다. 모든 작품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초속 5>에서 엇갈리는 2사람 속에서 계속 더 많은 시간이 스쳐가는 것이다.

 

작품 속에 반영된 인물의 설정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충돌의 재회 대신 미끄럼의 회피로 이어진 것이다. 끝이 나지 않는 고민을 안고 말이다. 작품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서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영상미학은 감독과 작가의 마인드를 반영해줄 수밖에 없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은 항상 빛과 하늘의 영상미를 강조하다. 붉은 노을에 강렬한 햇빛 한줄기가 비추더니 어느 순간 지고 마는 장면, 그렇게 어둡지 않은 검정색을 띠는 파란하늘에 별빛이 흘러간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보여준 하늘의 이미지는 사실 게임에서도 보여준다.

 

2) 애니메이션 영상미학(映像美學)적 관점

샤프트 회사에서 만든 <ef>라는 애니메이션은 원래 게임을 기반으로 만든 작품이고, 그 게임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제작스텝을 맡는다. 애니메이션은 신보 아키유키라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주도로 만들었지만, 그 감독 역시 게임의 원래 감각을 살려 하늘의 색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하늘의 색에서 중요한 점은 영상에서 여백공간의 설정이다. 가령 영화라는 실사영상에서 배우나 소품, 배경 등을 촬영할 때 공간의 설정 중 인물과 소품은 존재성을 가진 유형의 존재이다. 하지만 뒤에 보이는 하늘이나 빈 공간들은 무형의 존재, 즉 죽어버린 세계이다. 살아있는 세계의 존재와 죽어있는 세계의 이중적 결합에서 영화는 삶과 죽음, 유형과 무형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 영상은 다르다. 빈 공간인 하늘, 심지어 땅과 바다마저 그들이 원하는 색으로 입힌다. 하늘이란 공간이 영화처럼 죽어버린 공간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축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온 애니메이션 세계는 파생실재의 영화와 다른 미학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공간의 설정에서 자연 그 자체로 통해 연출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무대세트장이 있어도 결국 표현의 한계성이 오고, 최근 영화들은 컴퓨터 애니메이션 그래픽 차용으로 영화의 연출을 극복한다.

 

현실부재라는 속성인 애니메이션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존재로 등장하나, 이에 반해 실사영화는 파생실재(Hyper real)라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가상으로 만들어가는 세계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반 리얼리티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영상에 등장하는 존재들이 현실에 존재했던 자가 아니다. 그런다고 실사영상에 등장하는 인물이 현실에 있다고 해도 그 인물 그 자체는 아니다. 리얼리티를 부여해도 결국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로 흘러갈 뿐이다. 대신 리얼리티를 부여한 점에서 현실의 세계들을 차용하여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른바 키치적 요소나 일상생활 등을 말이다.

 

애니메이션 세계는 이런 키치적 요소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최근 애니메이션에도 현실에서 등장하는 물건이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화면만 애니메이션이지 실사영상에서 보여주는 인간생활하고 큰 차이점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실사영상에서 담을 수 없는 미세한 장면과 디테일한 연출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은 전형적으로 이런 요소를 잘 반영했다. 공간적 설정에서 현실의 배경과 현실의 물건, 심지어 현실 속의 여성들이 즐기는 인증사진 촬영장면도 집어넣었다.

 

3) 현실적 감각과 비현실적 감각 속의 <너의 이름은>

<너의 이름을>을 보면 상당히 현실적 요소가 강하다. 도시나 시골의 배경이나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 심지어 코토하의 아버지가 본래 신관일족의 데릴사위였으나, 코토하의 어머니 별세 후 정치계에 뛰어들었고, 토목건설업자와 결탁하여 선거에서 이기려고 하는 장면에서 상당히 현실적인 세계관을 반영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최근 인구가 감소하고, 토목건설사업은 도시 쪽에 실시했으나, 도시의 개발은 결국 포화로 이어지고 나머지 공간은 시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츠하의 아버지가 보여준 선거 전략도 그러하나, 농촌경제구조에서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은 미츠하의 가정생활에서 갈등이 되고, 마을사람들과 학교급우들 사이에서 갈등으로 이어진다. 도쿄에 살아가는 타키는 전형적인 고교생이다. 하지만 집안에 어머니가 없다. 미츠하는 어머니는 안계시고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에 반해 타키는 아버지와 단 둘이서 살아가지만, 나름 잘 지내는 부자관계를 보여준다. 타키는 자신의 집에 여자가 없기에 그리고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미인 상사가 있기에 그녀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인물의 설정도 그렇고, 배경의 설정 역시 현실적 감각을 잘 살렸다. 하지만 이에 반해 비현실적 요소도 강했다. 신카이 마토코 감독이 주술적인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차용한 것은 나도 이번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존재성은 비가역적 존재이다. 비가역적이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으며, 한 번 지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어 그것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역사라는 시간적 축척은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로 이어진다. 서사의 흐름에서 비가역적 시간을 뒤트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하고자 하는 제작자의 의도는 단순히 바라볼 게 아닌 점이다. 시간을 비트는 것은 비현실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20세기 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을 다시 오타쿠 앞에 내놓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서구의 이성중심 가치관을 부정 혹은 보완, 추가 등 다른 가치관으로 이어진 사상이다. 모더니즘 사상은 어떤 하나의 큰 서사 내지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인 가치로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로 판단할 수 없다. 대신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성은 가치관과 시야는 다르다면 최소한의 윤리성을 배제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윤리성을 배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본처럼 군국주의 망령이나 독일의 네오나치 사상이 대두하게 만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누구나 자신을 대변을 할 수 있지만, 그 대변의 논조에 이성과 윤리성이 부재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망각한 점이다. 다행히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그런 점을 버리지 않았다.

 

4) 후쿠시마 발전소 비극

일본의 많은 작품을 보면 극우적인 요소가 많으며, 과거로 돌아가 2차 세계대전을 바꾸어 세계 권력을 바꾸거나, 미래공상 세계에서 우주를 누비는 모험가로 등장해 식민지 건설에 대한 무의식적인 욕망을 표출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런 극우성향보단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서 맞선다. 이토모리라는 마을은 지구를 지나간 혜성 파편 하나로 완전히 파괴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일본 후쿠시마 발전소 폭발로 상처 받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후쿠시마 발전소의 비극은 일본정부의 무능, 기업들의 이기심, 그리고 국민들의 무관심에 의해 만들어진 학살극이다. 발전소 폭발 후 제대로 처리하기보단 오히려 보도통제하려는 정경유착의 일본, 국민들은 그런 피해를 두고 무관심하게 반응한다. 정말 몰라서 혹은 관심이 없기보단 일본인들의 특유의 반응성이다. 일본에서 분위기라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이른바 공기(空氣)를 읽으라는 말이 종종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분위기를 읽는 것은 뭔가 좋지 않은 상황이 놓일 때 거기에 동조하거나 경망히 행동하지 않고, 조용히 눈치를 보며 스쳐가듯이 피해가라는 의미이다.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관여하지 않아 자신들만 피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집단이기주의적 발상이 숨겨있다. 일본에서 이른바 이지메 문화가 있다. 학교에서 학생 1명이 왕따가 되면 그를 괴롭히는 사람도 있지만, 주변에선 그것을 보지 않은 것처럼 무시하거나 방관한다. 거기에 엮이는 순간, 추가로 엮이는 사람에게도 큰 곤혹을 치르게 한다. 학교라는 것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일본사회는 기성세대의 세상이다. 기성세대는 학교 안보다 더 심하게 모순되어 있다. 공기를 읽어야 하는 일본에서 이 영화는 후쿠시마 발전소 사건 이후, 재난이란 사태에서 상황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운석이 떨어지자 마치 거대한 폭탄이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보여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드러내서 치유해야 한다. 정신적 상처는 담고만 있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드러나서 감정으로 표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작품에서 운석에 의한 재해를 영상으로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한국인과 달리 일본인에게 그 장면은 매우 거슬린 장면이었을 것이다. 운명에 의해 파괴된 마을과 증발된 사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그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갈 수는 없다.

 

5) 부분적 세카이계

20세기 전후로 일본은 세카이계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작품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고, <최종병기 그녀> 등이 있다. 세카이계의 특징은 세계를 멸망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세카이계 특성은 모든 세상이 망하는 것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에 인간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며, 감정적이게 되며, 각자의 마음에 이끌리게 된다. 윤리성보단 개인성에 치중하게 되는 마련이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 세카이계 요소를 담고 있지만, 모든 것의 멸망이 아니라 단지 미츠하가 살아가는 마을의 멸망이다. 부분적으로 세카이계 요소를 집어넣은 것이다.

 

작품은 연애와 드라마적 요소, 세카이계 요소를 다중적으로 집어넣는다. 세카이계가 되어 여기서 망하는 것보다 망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서사의 방향을 다르게 제시한다. 지구의 멸망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미국이란 나라가 세계를 구한다는 속성이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지구의 위기가 터지고 도쿄에서 출동한 특공대원들의 활약으로 지구는 위기에서 모면하는 이야기가 많다. 위기의 순간 누가 가장 강한 나라이냐를 두고 미국은 할리우드 실사영화로 일본은 애니메이션으로 종종 보여주곤 한다.

 

자신들이 주도가 되려면 어느 누군가가 강력한 영웅이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위기를 넘어 지구의 평화는 지켰다는 전형적인 영웅서사는 안 봐도 비디오란 말을 듣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왜 일본 특수촬영 장르가 몇 십 년동 안 인기를 잃고 있지 않은가? 왜 할리우드 교과서적 작품이 계속 나오고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가?). 그러나 <너의 이름은>에서 그런 점을 다르게 표현한다. 영웅이 아닌 일개 학생들이 서로 상대방을 보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을 살리는 것도 목적이 있다.

 

6)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비신카이 마코토적인 요소

하지만 이토모리 마을주민들이 몰살되면 미츠하와 타키는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지구의 특공대원이 되는 게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된 자들을 죽음에서 도망치게 해주는 것이다. 자연적 재앙이나 인위적인 재난은 어떻게든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런 남은 수단은 대피시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전 세계는 망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망할 수 있다. 대신 이 위기를 벗어나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세카이계적 요소에 비세카이계적인 요소를 반영한 것이다. 누군가 이 작품을 두고 신카이 마토코의 감독의 비신카이 마토코적 요소를 반영했다고 한다.

 

작품을 보여주듯이 거대한 운명 앞에 행동하는 인물들은 세상의 운명을 바꾸지 못해도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 자체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으로 위기를 모면해준 것은 미츠하가 만든 술이다. 미츠하가 만든 술을 신의 재단이 있는 곳에 바치고, 그 술을 마신 타키는 시간의 결계를 뛰어넘는다. 황혼이 오는 저녁, 낮도 밤도 아닌 시간, 그 시간의 틈에 저승과 이승이 순간적으로 경계성이 무너지고, 그것을 이용하여 두 사람은 이때까지 서로 인지하지 못한 자신들의 존재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방법은 과학성이 아니라 주술성에 의지했다는 점이고, 일본 무녀가 보여주는 주술적 요소는 전형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때까지 신카이 마코는 실사는 아니라 실사적 요소, 과학적 근거 등을 잘 반영했다. <별의 목소리>에서 조종사로 된 소녀가 멀리 지구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메일을 보낼 때 우주의 거리와 시간개념이 나오고, 우주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봇 그 자체는 현재 없는 기술력이라고 해도 우주라는 공간에선 하나의 법칙을 제시한 점이다.

 

또한 신카이 마코토는 연인적 관계를 충돌적으로 부딪히는 게 아니라 엇갈리는 길을 택하는 쪽이 많았다. 엇갈리게 되면 계속 시간에 지남에 따라 만날 수 없고, 만나는 것으로 서사가 끝이 되어야 하나, 또 다른 서사조차 이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서사를 선택한 것이다. 스포일러성이 있으나 <너의 이름은> 마지막에서 미츠하와 타키는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아련함에 의해 마주하게 되고 그리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마지막은 너의 이름은? 하는 대사가 나온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도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름을 서로 찾아다니며 방황하던 이들이 다시 재회하여 서로의 이름을 알아가고, 이름을 알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는 점이다. 남녀의 존재성을 알아가는 것은 연애를 의미하며, 그들의 연예관계를 맺으며 다시 러브스토리로 이어질 것이란 또 다른 서사성을 관객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작품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7) 재회의 상징과 한국관객

그들이 처음 각인할 때는 미츠하가 중학생이고, 타키가 고교생이었을 때이다. 시간적으로 이들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지 않았다. 무려 3년의 틈이 있었으며, 3년 후 타키의 몸에 미츠하가 살았고, 3년 전의 미츠하의 몸에 타키가 살았다. 이들은 아직 어린 학생, 즉 어른이 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만난 것은 타키가 이토모리에 간지 7년 정도 흐른 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여 일을 해야 하는 어른이다. 어른이 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있었던 아픈 기억과 상처를 해결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타키와 미츠하는 서로를 찾아 헤매는 것은 분명하나, 그들 마음속에 가려진 지난날의 상처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찾아낸 것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지난 과거 아픈 기억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공유한 그 누군가와의 동질화하는 것이다. 관객들이 그것도 한국의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나름 재미있었다는 것은 연애적 발상이나 사실은 연애 이상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너의 이름은>을 관람한 관객을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른바 오타쿠 계열만 아니라 영화나 영상물을 좋아하는 평론가 및 애호가, 그리고 일반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인들도 <너의 이름은>을 보고 좋은 반응이 나왔다. 연애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나는 작품을 보면서 한국영화 중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체인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감>이다. <체인지>는 우연히 번개를 맞은 두 남녀 학생이 서로 몸이 바뀌었고, 서로 알아가는 도중 마지막에 다시 번개를 맞아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 한다. <동감>2000년의 20세 남대생과 1979년의 20세 여대생의 교감으로 시작한다. 서로는 같은 학교에 다니나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다. 만나기로 한 날에 남자는 비만 맞고, 여자는 시위현장을 진압하던 경찰에 의해 봉변을 당한다.

 

1979년은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하던 시절이고, 2000년은 군사정권과 거의 멀어진 시기였다. 구식 무전기로 통해 서로의 목소리를 들은 남녀는 이룰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체인지><동감>을 직접 관람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의 모티브나 소재를 본다면 유사한 교착점이 보인다. 그래도 다른 점은 <체인지>는 같은 공간과 시간에 존재했었고, <동감>은 공간은 같으나 시간이 달랐다. 그래서 아마추어 무전기로 연락하던 2남여는 서로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강의실 옆에서 청년을 지나치는 여교수의 모습으로 끝날 뿐이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연애만인지 연애 이외에도 다른 것인지에 따라 관람자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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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7-01-14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고 계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 공부에 열중하느라 서재에 잘 들어오지 못하네요(이건 변명 ㅋ 사실 공부도 제대로 안 하면서 서재에 못 들어오고 있어요 ㅋ 이쿠)

아!!! 역시나 이 아름다운 글...읽으며 막히지 않는 물 흐르는 것 같으 문장의 흐름과 내용의 풍성함에....침을 흘리며 읽게 되네요.

정말 이 영화 보고 싶어지네요 훗. 만화애니비평님이 글 쓴 것 중에는 안 읽고 안 보고 싶은 것이 없어요. 리뷰만 읽고 느꼈을 때 약간의 느낌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향도 나는 것 같아요.

일본의 원전사고나, 우리의 세월호나 참으로 어딜가나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은 그 모양과 매커니즘은 매우 흡사하구나 생각이 들어요. 리뷰를 읽다가 아! 일본도 원전사고가 있었지 하며 느꼈네요.

전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란 책을 사 볼려구요. 두꺼우니 틈틈히 읽으면 좋을 것 같고, 공부하다 보면 자꾸 책을 사고 싶어지는 병이 도지는데 이 책을 사면 볼 때마다 그 욕구가 사라질 것 같아요 ㅋㅋㅋ

새해도 더 좋은 글 부탁드려요. 읽으니 스트레스 사라짐. 감사해요 좋은 글 ㅎ

만화애니비평 2017-01-15 10:20   좋아요 0 | URL
루쉰님 새해 복마니~~~
열공도 좋지만 감기도 조심해야 합니다 후후후

그런데 제 글에서 침이라니..아이고..ㅎㅎㅎ 모니터 망가집니다....무라카미 하루키 느낌이 드는 이유는 하루키가 일본의 전공투시대의 향수를 비틀어버린 글귀라 그런 가봅니다. 이 작품도 은근히 비틀어서 보여주는 스타일이다보니 그렇죠...

다카시 서재라 ....님 책만 읽는 것 아닌가요...ㅎㅎ
조금은 환기를 해서 마음을 즐겁게 우후후

stella.K 2017-01-15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거의 한편의 논문 같군요.
저도 지금까지 세 편 정도 본 것 같은데
신카이 마코토는 영상은 좋은데 스토리가 영 시원치 않아
굳이 봐 지지는 않더군요.
소설도 그닥 좋으려나 싶어요.
영화는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는 느낌인데
애니는 아직 그런 인식이 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만화애니비평 2017-01-15 10:18   좋아요 1 | URL
신카이 감독 서사는 조금 시원치 않게 흘러가는 게 특징입니다. 목소리도 뭔가 모르게 잠겨 있다는 느낌이 강하죠..
영화는 시나리오 즉 서사성이 좋으면 작품이 되는 것이죠. 애니는 영화보단 서사성이 더 좋을 수도 아니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영상미적 감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죠.

리뷰가 논문 같은 것은..아마 제가 애니메이션 논문을 3편을 투고하여 학회지에 실렸기에 그런 조류가 들지 않았나 싶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