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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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많은 소재가 되는 것이 영조와 정조의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는 사도세자라는 비운의 왕세자가 한에 맺혀있기 때문이다. 당시 급박한 상황들을 현대사회의 영상이나 이야기로 드러내려면 우선 그 기록이 필요하다. 모티브가 되는 역사적 사실에 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러티브가 완결된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를 읽어보자 조금 나는 당혹스럽게 느꼈다. 기본적으로 나는 사도세자가 붕당정치에서 심각한 피해를 본 군주의 후예라는 점을 안다.

 

그런 점에서 예전에 본 <사도>라는 영화처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전과 갇힐 때 그리고 그가 죽은 후 정조가 즉위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생일에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정조가 들고 있는 부채는 사도세자가 가지고 있던 부채이고, 부채를 들고 춤을 정조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무척 흐뭇하게 웃고 있다. 영화에서 혜경궁 홍씨는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주변 대신들이 맺어진 상황에서 큰 실의를 겪는 것으로 나온다. 마지막으로 왕세손 정조가 사도세자로 인해 폐위 내지 화를 당하지 않게 위해 사도의 형 아래로 입적을 올린다.

 

그녀는 정조가 생사에 대해 무척이나 고민하고, 부군의 죽음에 통곡하는 여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관점이나 권력성이 달린 문제였다. 정조가 처음 등관하여 정사를 볼 때 노론의 암살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암살의 주모자는 홍인한 외 여러 일가들이고, 홍인한의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동생이다. 형의 사위 아들을 왜 죽이려 했는가? 그런데 그들은 풍산 홍씨 혜경궁의 친족들이다. <역린>이란 영화를 보면 영조의 마지막 아내인 정순황후와 혜경궁 홍씨와 기 싸움을 보여준다.

 

나이가 자신보다 어린 정순황후가 혜경궁 홍씨는 항상 공손하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잘못 생각한 점이 있다. 정순황후는 지독한 노론 일당의 후예이고, 혜경궁 홍씨 역시 자신의 가족들이 남편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어도 수수방관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노론 일파의 2사람이 적보단 오히려 동지에 가까웠다. 1804년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가족들이 역모를 저지른 것에 대해 사면 받으려고 정조에게 부탁을 했다.

 

<한중록>이란 책도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정조 그리고 순조에게 변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자신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아무런 관계는 없고, 단지 힘없이 자신의 부군을 잃어버린 것처럼 또는 사도세자가 미친 광인이 되어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적기도 했다. 그런 방식이 만들어진 <한중록>이라면 영화 <사도>는 그야말로 혜경궁 홍씨의 기억으로 조작되어진 작품이 된 것이다. 물론 감독이 어느 관점인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사도>는 인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예법이 중요한가라는 딜레마를 두고 영조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도는 황후의 자식이 아니라 후궁의 자식이다. 사도세자의 생모가 사도의 죽음 앞에 무력하게 좌절하나, 사실 <영조실록>을 정리한 내용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기여한 사람은 그의 생모와 아내이다. <한중록>과 영화 <사도>의 주변인물은 자신들이 가한 죄를 보여준 게 아니라 오히려 감정적으로 사도의 죽음을 애도한 것처럼 보여준다. 실록의 기록이나 정조가 남긴 자료나, 하다못해 노론이 아닌 소론이나 남인이 증언되는 자료에서도 그 기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족이 왕의 세자와 세손을 죽이려 했고, 실제 사도는 죽었다. 그런 점에서 역모로 풍산홍씨 일족 스물 명 넘는 사람이 죽고, 멸문을 당했다. 그런데도 그 죄에서 복귀시키기 원하는 혜경궁 홍씨가 그 모든 원흉의 조력자인 것이다. <정조실록>에서 정조가 역모사건을 다루면서 혜경궁 홍씨의 일족을 처단해야 할 때 그녀는 식사를 하지 않고, 정조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이 나온다. 실록은 사실을 기록하지만, 사실도 사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때 그 순간 일어난 일이나 나온 말들은 거짓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주워 담은 후 사관의 사견을 넣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관의 기록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심지어 노론의 사관 신료가 영조 옆에서 사도를 엄하게 대할 때 붙어있고, 홍씨 집안의 위선을 드러낸다. 사도가 죽을 때 뒤주를 내어놓은 것은 홍봉한이고, 사도가 죽을 때 배 위에서 놀고 있는 사람도 홍봉한이다. 사도에게 정조를 지켜달라고 했지만, 그 정조마저 나중에 불편한 것을 느끼던 홍봉한과 홍인한이다. 사도세자가 왜 그렇게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을까? 책을 보면서 놀란 점은 택군이란 단어이다. 왕은 왕족과 대신의 합의가 아니라 대신들의 권력을 위해 선택된 점이다. 그런 점이 세도정치에서 철종과 고종황제가 그러하다.

 

택군되지 못한 왕은 그들에게 위험한 존재이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사도는 문학적 지식과 소양이 깊었지만, 힘이 장사였고 아주 훌륭한 용장이었다. 태조 이성계부터 조선의 군주는 뛰어난 무장이고, 태종 이방원과 효종대왕과 헌종 역시 뛰어난 무장이었다. 사도는 건장한 장정도 들기 힘든 청룡도를 들고 수십 합을 말 위에서 휘두르고, 활을 쏠 때 명궁 중에 명궁이었다. 사도의 기운을 받아 정조 역시 명궁인 점에서 무장의 혈기가 흘렀고, 영조처럼 다혈질이 아니라 차분하여 군왕의 자질이 뛰어났다.

 

바로 이런 점이고, 경종의 독살설과 소론과 남인을 배제한 노론정치가들에게 매우 곤란한 존재이다. 조선 르네상스 정조시대, 정약용과 채제공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때 간신들을 축출할 때 쉽게 하지 못했던 것은 노론이 묻은 권력구조가 깊게 뿌리박힌 것이다. 책에서 사도는 백호 윤휴의 건의에 따라 북벌론을 제기한 효종을 이은 최후의 왕족이었다. 게다가 사도가 분조하여 지방에 나갈 때 많은 백성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원했고, 왕가의 행렬에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궁궐 안의 이야기는 쉽게 내놓지 못하나, 궁궐 밖의 백성들은 다 안다. 사도가 어진 임금이 될 것이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탐관오리에게 큰 벌을 내릴 것을 말이다. 사도의 죽음과 정조즉위 후 사도의 이장행렬에서 많은 백성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정조는 자신이 왕좌에 오르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공표한다. 정조가 만든 세상, 정조가 꿈꾼 세상은 사도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런 사도가 역사 속에는 미치광이 내지 문제 많은 세자로 등장한다. 사도에 대해 내가 접해본 것은 다산 정약용을 알아가면서이다.

 

정약용은 정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이나, 한편으로 아버지 정재원은 사도의 죽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다. 아버지의 영향에서 남인이던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죽음이 이미 자신의 집안에서부터 비극이란 점을 알았고, 사도세자가 머문 자리에 기리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란 바로 정조와 정약용처럼 군주의 나라, 군주는 백성을 사람을 임금이어야 했다. 정암 조광조 이후 소학(小學)이 매우 중요한 학문이 되었다. 소학의 가르침에서 작은 것을 실천하고, 그 작은 것이 모여 크고 큰 거대한 조류로 이어진다. 그 작은 실천에서 백성의 괴로움이 비록 소리가 작게 들리고, 사소한 일이라도 군주에게는 큰 고민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그렇게 하기엔 주변이 너무 힘들었다. 고독한 철장 안의 새는 억지로 미치광이가 되어야 했고, 때로는 치명적인 병을 앓아도 영조 아래서 엎드린 채 며칠을 보내야 했다. 권력의 암투 속에서 생명의 불꽃이 꺼진 사도나, 역사의 기록에도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애도하고, 항의하는 자들까지 반역의 무리가 되어야 했다. 사도의 아들 정조가 죽자, 노론은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키고 남인의 많은 신료들을 사형 내지 귀양을 보냈다. 남인이 후에 등용되어도 언제나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정약용의 책은 일제강점기 때도 함부로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사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조선시대 권력의 독점화가 결국 현실의 한국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의 축척된 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돌아보는 것이고, 현재는 과거의 시간이 축척된 하나의 과정이고, 미래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축척되어 만들어지는 현재진행형이다. 역사를 다시 본다는 것은 지나간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또 다른 서사로 등장한다. 개인은 사라져도 개인이 속한 사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먼 미래의 내 후예들에게 물려줄 세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은 우리에게 답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으나, 내놓지 않은 순간 우리는 역사의 죄인 내지 방조자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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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0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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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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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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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이 중국명이고, 작가가 적은 내용도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한참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이다. 그런데 출판사를 보면 원래 출판된 곳은 프랑스이고, 게다가 파리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기에 프랑스에서 발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책 속에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바보들의 축제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인들과 엘리트들을 모조리 뒤집고, 중국의 유교문화를 파괴한다는 명제도 좋았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 스스로 계몽할 수 있게 해주는 칸트의 계몽의식이 더욱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계몽이란 단어는 단지 기존의 관념을 억지로 다른 관념으로 바꾸어주는 하나의 폭력적 행위에 불과하다. 계몽이란 단어가 하는 행동에서 진실로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졌는가? 중국의 문화대혁명도 그러하거니와 프랑스대혁명에도 조금 문제가 있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혁명이란 것은 기존의 체계를 모조리 바꾸어도 그곳에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 즉 삶에 대한 원초적인 요소까지 어렵다. 현대사회에서도 내가 가장 멍청한 슬로건으로 보는 것이 자기들의 세상, 사상을 외치는 자들이다.

 

새로운 사상과 세상을 말하고 글로 적는 것은 좋다. 문제는 인간의 생활에서 혁명이나 전쟁, 심지어 더러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도 그 시대 사람에게 먹을 빵이 필요하고, 추우면 연료가 필요하다. 게다가 아프면 의사와 약사가 필요하다. 세상의 기본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 가장 멍청한 짓은 바로 의사들이나 과학자들, 교사들에 대한 억압과 분서갱유질이었다. 물론 지식인들이나 엘리트가 부패하면 그 나라는 완전히 망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행동이 더 치밀하고 교활하여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나라는 심한 문제에 빠진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에서 그 이유가 나온다. 의사가 잡혀가면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도 해결하기 어렵고, 소수의 의사가 다양한 환자를 돌봐야 한다. 주인공 친구가 노동갱생을 위해 끌려온 산자락에서 만난 어여쁜 소녀가 임신하자, 임신중절수술을 맡은 의사는 내과, 외과, 정형외과 등 다양한 진료과목을 요일마다 다르게 진료했다.

 

책이 있으면 반동군자이고, 책을 읽어본 사람은 반혁명분자이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부제는 문화적 빈곤에 시달렸다. 인간들은 이야기하기 위해 생각하는 존재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 후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주인공과 친구의 모습에서 인간은 결론적으로 즐거움을 찾는 존재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독재라는 슬로건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름을 들어도 그들이 어떤 행동과 말을 했는지 일반인들은 전혀 모른다.

 

아니 심지어 그들의 얼굴조차 모른다. 주인공이 우연히 숨겨온 책을 떨어뜨리자 동네 건달은 그 책의 표지에 나온 사람이 카를 마르크스인지 레닌인지 스탈린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무식한 세상에 문자를 알고 이야기를 안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향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단순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만, 한편으로 다른 재미를 원한다. 발자크가 나온 이유는 2친구가 다른 친구인 안경잡이로부터 받은 책이 발자크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안경잡이가 숨겨둔 책은 발자크만 아니라 스탕달, 루소(신 엘로이즈를 안다면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위고, 뒤마 등 많은 저명한 작가의 서적들이었다. 보통 중국인들 그것도 산골짜기에 살아가던 문맹인들에게 그저 사치스럽고 때로는 반동의 세계일뿐이다. 이 책들이 이야기는 주인공 친구로 통해 바느질 소녀를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주는 길이 되어주었다. 관능적이고 달콤한 이야기 속에 사랑과 열정이 넘치는 낭만으로 가득했다.

 

낭만이 원래 혁명의 힘인데, 오히려 낭만이 혁명으로부터 죽음을 당하는 아이러니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옮긴이의 후기를 보면 분명 어둡고 위험한 시대지만, 책 속의 내용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고, 엉뚱한 모습도 종종 등장한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은 대단한 인물이기보단 그저 삶의 한편에서 종종 보이는 인간유형이다. 인간이 어떤 위기에 닥친 상황에서도 어떻게도 삶의 묘미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현실의 조건은 여전히 암울하니, 즐거움이 되는 것은 비현실적인 세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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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2-25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말이네요..한해도 좋은 포스팅 글로 만났습니다..
며칠 남지 않았지만 마무리 잘 하시고
또 새해에도 더 알찬 리뷰 기대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6-12-26 09:40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도 좋은 연말 보내시고, 내년에는 꼭 박과 최가 국민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기원합시다!!
 
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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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지고 있다. 아침하늘을 바라보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입김이 구름이 되어 흐르고, 밤하늘을 바라보면 맑고도 어두운 세계가 끝없이 펼쳐진다. 이런 광경을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름다운 것인가? 아니면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으로 가득한 것인가? 겨울은 여러모로 희비가 엇갈리는 계절이다. 추운겨울 하얀 눈이 내리며 도시에 크리스마스 캐럴 송이 흘러가지만, 한편으로 추위와 배고픔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계절이다. 낭만이란 감정은 여유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낭만을 느끼기보단 낭만주의자가 원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추운 겨울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좋은 계절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여유가 있을 시간도 길지 않다. 짧은 여유를 위해 아득바득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가끔 생각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위로해주고 때로는 질책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지금 생각한다. 겨울이란 계절이 12월 입구에 다가선 현재가 아니라 마음속에도 존재한다고 말이다. 오랜 그룹사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이 만든 곡으로 <언제나 겨울>이 있다.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겨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겨울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늘 겨울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겨울만 존재하는 세상에 그 계절이 그 세상에선 겨울로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겨울이 아닌 때를 알기에 겨울을 아는 것이다. 세상에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다면, 이상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끔 우리 스스로 위로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의 겨울에 갇혀 자신의 마음이 얼어붙은 사실조차 잊어버릴 때도 있기 때문이다. 제페토 시인, 인터넷 뉴스기사에 덧글로 시()를 남기는 기류 시인이다. 인터넷 공간에 머물기에 그의 시에 울려진 언어의 미는 늘 딱딱한 세계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존재다.

 

하지만 그가 남기는 시는 매우 아프고, 쓰라리며, 때로는 따스하고도 아련하다. 제페토 시인이 이때까지 남겼던 글들을 모아 시집을 냈다. 시를 평소 잘 읽지 않은 나라도 읽고 싶은 시였기 때문이다. 시집 제목은 <그 쇳물 쓰지 마라>, 여러 기사에 달린 시들 중에서 이 시가 아마 가장 인상이 깊고, 허무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추석을 앞두고 어느 청년이 용광로에서 작업 중 낙하되어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빠졌다. 1600가 넘는 고온, 이미 그의 육체는 세상 어디에도 드러낼 수 없었다.

 

뜨거운 화염은 그의 육체를 모조리 갉아먹어 남은 것은 원통한 이름뿐이었다. 그 쇳물을 돈을 위해 쓰지 말고, 오로지 그의 모습을 닮은 동상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위로를 해주라고 말하는 제페토, 시집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제목부터 이미 슬픈 우리의 현실이었다. 장애인, 독거노인, 불치병에 걸린 어린아이, 치매로 죽어가는 아내를 죽이고 자살한 할아버지, 가난 속에 배고픔에 쓰러져간 작가 등 많은 슬픈 사연들이 속속히 시로 운율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타인의 고통에 무디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많다. 너무 슬퍼서 너무 기뻐서 너무 피곤해서도 가능하다. 하지만 눈물의 이유는 우리 모두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흐르지 생각보단 내 자신의 인간적인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인간적이란 무엇일까?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고, 감성을 지닌 존재다. 동물에겐 본능적인 이성과 감정밖에 없다. 그들이 판단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이성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단순히 지금 느끼는 상태 그 자체가 감정만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그 이상의 이성을 지니고 있지만, 때로는 동물보다 못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이성과 감성에서 무엇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감성이라 말하겠다.

 

감성이 없는 이성은 오로지 논리고, 그 논리는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이성능력으로 발달할 것이다. 마음이 없는 이성은 차가운 얼음과 같은 벽이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모른 채 주머니 속 지갑만 가득하게 채워줄 욕망을 바란다. 욕망으로 넘치는 세상, 욕망 이외엔 아무 것도 없는 세상, 그것은 우리가 동물보다 더 동물 같은 존재로 바꾼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쉬고, 졸음이 오면 수면을 취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충분한 것들이 들어와도 여전히 남을 것을 빼앗으려 하고, 남의 수면시간까지 빼앗아 착취한다.

 

어째 보면 제목 <그 쇳물 쓰지 마라>에서, 만일 그 청년이 안전장비가 충분했다면, 안전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그런 변을 당했을까? 이런 기사를 보고 우리는 하나의 가십거리 이야기로 스쳐지나간다. 사실 그 가족들은 얼마나 슬프고 친구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물론 타인의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타인이라 해도 그래도 그들도 살아있는 생명이고,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인간이다. 나의 마음을 죽이는 세계에 나를 위로해주는 책이 필요하다.

 

위로는 단순히 그 사람의 기분만 맞추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상처도 때로는 건들어야 하고, 그 사람이 일부러 외면하는 눈앞의 현실을 마주보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약은 아픈 곳을 아프지 않게 하는 진통제이지, 그 자체로 치료해주는 처방전은 아니다. 진심의 눈물이 메말라 가는 세상, 비록 눈에 눈물이 흐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마음의 눈물을 다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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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1 1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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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6-12-11 15:43   좋아요 2 | URL
전에 예비군 훈련 중 예비군 동대장의 말에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에게 보상이 어쩌고, 유공자 어쩌고 했는데, 그게 김기춘의 공작임을 밝혀지었죠..참 너무한 세상입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그러면 그럴 말을 할 수 있을런지

또 다른 일화입니다. 제가 삼성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을 때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겪은 암과 각종 질병으로 수십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삼성에 가서 돈 많이 벌면 좋겠다는 회사직원, 게다가 그 죽은 사람이 아주 극히 일부라는 말을 듣고 아..진짜 무서운세상이구나 느꼈지요..만일 자기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다 산업재해로 불치병으로 쓰러지면 어떻게 할건지..기만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2016-12-11 2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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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미러링 - 혐오의 시대와 메갈리아 신드롬 바로보기
박가분 지음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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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개념을 어디에 두고 말해야 좋은가에서 참으로 난감할 때가 많다정의라는 개념이 그 사회와 시대적 특성상황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도덕적 관념즉 사회적 통념이란 의미에 치중한다과거 조선시대 군왕과 사대부가 통치하던 때와 지금 민주주의 국가와의 가치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다르고 변화해도 인간의 근본에서 계속 유지되고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그것은 윤리적 가치관이다살인을 해서는 안 되고폭력을 휘두르면 아니 되며더욱이 사리분별이 있는 자라면 약자들을 괴롭히면 안 된다그러나 약자를 괴롭혀도 용납되는 것은 윤리적 가치관보단 그 사회적 권력 혹은 프레임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이데올로기또는 이데올로기를 정당화 하는 헤게모니로 볼 수 있다.

 

정의라는 개념에서 무서운 실행방법에서 응징이란 수단이 있다응징은 하나의 서사이고 하나의 신화에 가깝다기존 사회에 적이 혼란시킬 경우적의 위기에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적 자체는 섬멸하는 서사로 흐른다역사적인 기록에서 전쟁이나 각종 사변들을 보면 이런 서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우리는 너희들에게 피해를 보았으니 우리는 이에 대한 보복을 실행하여 보상 내지 처벌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정의라는 이름 아래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폭력과 광기에 의해 합리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 읽은 박가분 작가의 <혐오의 미러링>, 프로이트 “id”라는 집단적 폭력적 기질이 ego 내지 super-ego로 대체될 경우 상당한 무서운 작용을 보여준다그 폭력적 광기에 정의를 내려줄 하나의 이름만 내걸면 뭐든지 해도 정당화 될 수 있다가령 조선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과 내정간섭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왜국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이에 중국 명나라가 지원 왔다명나라가 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많은 불편함을 주었다상국(上國)의 천병(天兵)이 오니이에 대한 대접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상심리가 단순히 위에서 누르는 입장과 여기에 반대되어 밑에 있는 자의 입장은 다르다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상심리에 의해 폭력을 휘둘리는 순간그 누구라도 같은 존재가 된다이스라엘 민족이 나치에 의해 희생당했지만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고하게 살해한다보상심리에 의해 작동된 광기는 그 모든 폭력과 비인간적 행위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덮는다거기에 신이라는 관념적 존재와 이데올로기적 사상을 더하면 완벽한 은폐가 일어난다물론 피해자가 계속 피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사회고그들의 아픈 상처를 드러내서 그 부분을 치료할 수 있게 금 처방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상처가 본인이 받은 것이 아니라 그동안 누적된 형태고상처를 말하는 자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단지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지나친 요구 내지 폭력적 행동을 틀려먹었다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일삼았다현재 그 당시의 지도자의 후예들은 당시 시대를 영광스러운 과거로 생각한다우리가 이에 대해 일본 권력자 내지 정부에게 항의하고 경계하는 것은 옳을 수 있지만일본인 관광객에게 그런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잘 못된 일이다군위안부에서 강제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여성들의 원한을 생각하여 이번에 우리가 피해의식으로 인해 일본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인간에게 어느 정도 폭력이란 수단이 허용되는 범주가 있고그 이상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더구나 그 행동에 대한 하나의 가치관 내지 이데올로기의 신성화는 단순히 정의라는 이데올로기 가치관을 넘어 윤리적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어느 사회이든 불평등은 존재하고모순과 부조리로 넘쳤다그런 부당한 일이 존재해서 당연한 것은 아니나 늘 있었다는 점은 당연한 사실이었다그런 당연해서 안 될 일들을 당연한 일로 만드는 게 바람직한 사회의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고모든 사회가 정상적이지 않다모든 게 완벽한 세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지만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의 이상이다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철학이란 신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고민주주의 가치관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인권을 찾아가는 것이라면 지금 현실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다하다못해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운동이란 현실에 없는 것이고오히려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원래의 사상적 시초는 철학적 사유와 고찰에서 시작되나사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그 범주의 근원에 가는 것보다 단순한 답과 쉬운 길을 찾는 것을 원한다.

 

쉬운 길과 단순한 답을 찾으면 눈앞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은 매우 쉽다그냥 자기가 그러고 싶은 것만 믿고 계속 행동만 하면 된다하지만 신념과 광기는 다르다신념에는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명제와 더불어 이에 대한 대안과 해결책을 요구한다광기는 대안과 해결책은 없이 자신들의 행동을 두고 정의집행이란 이름만 거론한다정의집행이 광기와 조우하면 폭력은 그저 자위행위에 불과하고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갈등만 조장한다갈등을 빚으면 갈등의 당사자가 가해자 내지 피해자로 될 수 있다피해자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을 잠재적 피해자로 생각하는 순간 이들은 자신이 언제 피해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로 광기를 표출한다.

 

박가분 씨의 <혐오의 미러링>은 이런 현상이 한국사회에서 메갈리아 혹은 워마드란 여성우월주의 집단 태생 및 근원을 밝히고 있다솔직하게 말하면 작가 분은 조금 더 연구해볼 필요한 분야가 있었다그것은 중세시대부터 지금도 이어져 오는 마녀사냥이다책을 읽으면 마녀사냥에 대한 기본적인 맥락을 알고 있다군사정권시절 용공조작 사건을 거론한 점에서 분명하다또한 마녀사냥은 피지배계층현대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계층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부유한 계층이나 혹은 지배계층이 마녀사냥을 당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것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해소해야 하나그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일반 사람들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원인을 사회구조적인 요소에서 바라보고 서로 해결하는 수단보단 더 간단한 길을 선택한다그리고 그것이 먹히면 하나의 이슈가 된다세월호 사건을 보면 참으로 마음을 아프게 혹은 분노하게 만든 일이 있다유가족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호소하고어느 분들은 단식투쟁을 하는데극우사이트 회원들이 찾아와서 그 앞에서 피자와 통닭을 먹고 있던 것이다세월호 침몰된 어린 학생들을 두고 어묵이라며 비하하는 인간도 있었다.

 

윤리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수준이었다게다가 그들은 방송에서 나온 것처럼 국가정보원 및 국가기관의 치밀한 공작에 의해 교묘히 넘어가서 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세월호부터 시작하여 518광주시민의 죽음을 두고 조롱하던 일베그리고 박가분 씨가 이번에 적은 책은 일베의 미러링이라고 하는 메갈리아/워마드에 대한 책을 내었다나는 솔직히 일베도 문제지만메갈리아는 더 심각하게 여긴다일베는 사회적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고어디 가서 일베라고 들키는 순간사회적 단절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다르다이들은 일베(국가기관의 첩보에 의해 돌아가나 국가기관은 은밀히 은폐했지만)처럼 자신들을 스스로 병신이라 하지 않고오히려 피해자란 입장에서 정의를 외친다박가분 씨가 잘 지적한 백색테러와 적색테러난 피해자이니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는 식이다결국 일베와 다르게 메갈리아는 피해자란 입장에서 일베를 미러링하고잠재적 피해자라는 피해의식이 보상심리와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진 것이다결국 여자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동원하고내가 그동안 읽은 페미니즘 개념과 전혀 다른 양상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

 

사실 나는 메갈리아 그 자체에 대해 문제를 삼기보단 메갈리아라는 존재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내보내고 있는 여성학자들이다오히려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여성운동가라면 이들에게서 이질감을 보일 것이다현장의 여성인권운동가들은 여성의 인권을 넘어 장애인노인어린이(고아같은 약자까지 모두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그러나 메갈리아에게 그런 것은 없다노인이란 한국남자로 살아왔으니 비난해야 하고어린 남자아이는 앞으로 한국남자로 살아야 하기에 비난해야 한다는 논리다이들에게 어떤 논리도 필요 없고 단지 자기 말만 내세운다.

 

그들의 입장그들의 정의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높다작가의 글에서 아쉬운 감정이 드는 부분이 바로 지식인들 혹은 엘리트들이 보는 어설픈 짝사랑이다일베나 메갈을 알기 전에 먼저 디시인사이드 내지 인터넷문화를 알아야 하는데이들이 그런 문화에 깊이 들어갈 일도 없다디시인사이드가 원래부터 문제가 많은 일부 극소수 회원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그런 사이트에서 남자연애인갤러리에 활동하던 회원들이 기존 남성들이 사용하던 비속어 내지 욕설을 따라하면서 같이 오염되고메갈리아는 그런 공간에서 더 진화하여 새롭게 나온 것이다.

 

메갈리아 존재는 올해 처음 들어본 것 같고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봐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다내가 메갈리아 위험하다고 여긴 것은 단순히 한국남자만 욕하면 그렇다고 넘어가겠지만어린이 성추행넥슨사에서 펼친 민폐강남지하철 사건 뒤 행동산업재해로 죽은 청년에 대한 조롱세월호 희생학생에 대한 조롱독립운동가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비하시위 중 물대포의 충격으로 사망한 백남기 농초에 대한 조롱 등이다이들이 이런 짓을 하는 점에서 인륜의 가치를 물어보는 것도 어려우나이런 이들을 이때까지 지지한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의 착각이 더 무서운 일이다.

 

만일 일베가 스스로 정화능력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일반 사회에서 인간 네트워크 속으로 님비(Not in my Back-yard)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페미니즘이란 탈을 쓰게 되면 인간 네트워크 속에서 오히려 큰 소리를 낼 것이다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자신이 느낀 피해의식 내지 공감대가 조금이라도 닿게 되면 그 대열에 참여하기 쉽다문제는 그런 불편함을 내비치는 게 아니라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안과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강남역에서 살해당한 여성은 참으로 안타깝다아직 젊고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사는 구성원이었다.

 

그런 가족들이 딸동생을 잃었다오빠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동생시체 팔아 보상비를 노리냐는 말을 하거나심지어 뺨을 때리는 사람도 있다어느 이는 이들에게 찾아와 자신들만의 페미니스트 가치관을 강조한다메갈리아가 이때 여동생을 잃은 오빠를 두고 진심의 위로보단 한국남자이니 여성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다메갈리아 전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나그런 식의 글이 호응이 높고이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점이다이런 문제를 두고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이상한 덧글들이 달린다.

 

메갈리아는 아니나메갈리아에 동조한다는 지식인들의 착각으로 가득 찬 믿음이 두려울 뿐이다그런다고 해서 한국사회가 문제없는 것도 아니고한국 사회 내 남성들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단지 한국사회에서 남성도 힘들게 살고무조건적으로 적은 아닌 점이다왜 이런 피해의식들에 의한 혐오범죄가 일어나고그 근원은 무엇인가작가 분이 조금 더 마녀사냥에 치중하면 좋겠다는 점이 바로 마녀사냥은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힘들고 여유가 없을 경우 그 책임을 구조적으로 판단하기보단 눈에 보이는 만만한 존재로 전이되는 점이다.

 

메갈리아들이 한국남자들을 욕을 하지만특히 제일 심하게 조롱하는 것은 가난한 남자이다지하철역 스크린 도어 수리 중 사망한 청년은 비정규직에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다그의 죽음을 왜 욕되게 하는 것인가이에 반해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그런 욕을 날리지 않는다과거 집권여당 시초들은 군사정권 시절권력가와 결탁하고이중에는 과거 검사나 경찰국군장성도 많았다이들이 국민을 감금하고 고문할 때 남자들은 과도한 폭행여자는 성폭행을 자행했다남자가 결혼하면그의 장모와 아내를 눈앞에서 성폭행하겠다고 협박하여 간첩으로 조작했다.

 

이런 자들은 왜 페미니스트들은 비판하지 않은 것인가현재 재벌들은 한국 산업화시절 어린 여공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성장했다여공들에게 좁은 공간에서 환기도 되지 않아 폐병 내지 위염으로 고생해도 계속 일을 시켰고잔업과 야근임금체불 등 잔혹한 행위를 가했다. <전태일 평전>에서 병을 앓아 혼자 외롭게 자취방에서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바라본 전태일의 마음을 보자참으로 한숨만 나왔다왜 그런 여성들에 대한 추모의식은 없을까하다못해 위안부에서 슬프고 아픈 기억만 가진 할머니들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가졌을까?

 

내가 지식인들이나 혹은 주변에 본 지식인 내지 예술계에 몸담은 분들이 이런 문제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점이다예술인들이 노동인권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데메갈리아가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를 조롱한다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대하여 메갈리아 비판하니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이 왜 여성인권을 왜 무시 하냐는 식으로 나온다그들의 주제와 대상이 어긋나게 되는 현상으로 일어난다전에 읽은 책으로 <섹스와 돈>이란 책이 있다백인중심의 미국에서 자본주의는 여성의 예속화를 미디어로 통해 자본으로 합리화 시킨다.

 

남성에게 주어진 경제적정치적 특권이 여성을 예속화했다면여성이 정치적경제적 자율성을 가지게 된다면 남성과의 관계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가야 한다하지만 수평의 관계성에선 책임성이 따른다메갈리아 분석글에 혐오로 가득하나그 속에서 돈 없는 남자에 대한 혐오는 더 심각하다돈 많은 남자에게 얻어먹으면 행운이고돈 없는 남자를 만나면 운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여기에 대한 비판이나 고찰은 없다가 사안에 대한 일부 문제를 전체적으로 일반화는 위험한 발상이나그 일부의 문제 중에서 어느 사안에 대해 전혀 비판의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하다.

 

반남성주의자라면 남성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데만나서 막상 그들의 주머니를 탐색하는 점에서 메갈리아는 단순히 남성혐오로 이루어진 집단만이 아니다그들의 집단성에는 부익부 빈익빈에서 등장하는 청년 혹은 젊은 세대들의 실업빈곤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만이 엉뚱한 사람들에게 불똥을 튄 것이다물론 한국남성 중 기성세대의 꼰대의식은 참 문제가 많다청년세대들이 겪는 고충을 이해하지 않는다이미 나온 서적 중에 <88만원 새대>, <사천원 인생>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거울은 상이 반사되어 비추어진다상을 비추는 거울이라 해도상이 원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란 물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또는 누군가 거기에 있어야 한다미러링이란 말만 하고미러링이란 상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광기만 넘치는 현상에서 답은 없어 보인다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혐오만 내세울 경우 그 최후는 허무함이다메갈리아를 운동권에서 이용하려 했지만 오히려 실패했다그들을 두고 이란 지칭하며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기존 페미니즘 진영에서 메갈리아에 대해 세력권을 확장하려 했지만적어도 최소한의 가치관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말아야 했다.

 

현재 2016년 11월 말국가기관의 비리와 부패무능한 지도자와 정치 권력자들의 민낯이 드러나고국민들은 분노한다여기 주모자가 여성대통령과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 옹호하고비판하는 사람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자칭 페미니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현재 대통령은 정치적 역량으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 시절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택되었다저번 대선 때 사무실에서 다른 부서 상급자와 말다툼이 있었다대통령이 되는 이유에서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여자가 대통령을 하지 마란 법은 없다.

 

단지 그 자질과 역량을 제대로 간파하여 선택해야 한다그 상급자는 여성이라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아버지 딸이란 사실에서 선택한 것이다페미니즘은 원래 진보적인 가치관이고진보적이지 않은 사람이 여자가 대통령을 해야 되라는 말에서 상당한 논리부조리가 있다그런 말을 이제는 메갈리아 워마드 진영에서 나온다국가를 문란하게 만든 자들을 두고 대단한 여자라고 말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식적인 일반여성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폭력적인 남성성을 토대로 이루어진 대통령이 무슨 여성을 위한 대통령인가 말이다이성적 논리와 판단 없이 그저 광기와 독설로만 되돌아 올 뿐이다그리고 내가 진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이 현상에 대해 제대로 관찰하지 않은 지식인들의 오류다자신이 진보적인 지식인이라면 맨 처음 생각해야 인권이다타인의 인권(그것도 어린이노인장애인지하철 스크린도어 사망사고나 강남역 살인사건 유가족 등)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세력에 대해 단지 페미니즘이란 이데올로기만 내세운 것에 동조했다면지식인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마지노선을 버린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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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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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7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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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0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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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09: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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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변호인 : 일반판 - 아웃케이스 없음
양우석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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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TV에서 방영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알고보니 이 영화를 상영 후 CJ 부사장에게 엄청난 압력이 왔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짐작했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아픈 장면은 경찰에 끌려간 끌려간 아들을 보고 온 순애가 송변을 만나 변호를 애원하는 장면이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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