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란 영화감상평을 보니 이런 글이 있었다. 천우희씨가 혼자 거의 진행하고 다 끝낸 것 같다고 말이다. 솔직히 천우희씨가 이 영화의 모든 키를 잡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천우희씨가 그 정도의 역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버티고>보다는 <한공주>라는 영화를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거기서의 천우희씨의 연기는 영화 그 자체를 응집하고 있는 여고생 캐릭터로 나온다. 내가 천우희씨의 영화팬이 된 이유도 바로 <한공주>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력이다. 천우희씨의 연기 특징은 깊은 아픔과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응축하여 그 부분이 결국 폭발할 때의 비극성이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 밀양여학생 성폭행 사전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주인공 한공주는 낯선 학교에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오나, 결국 미디어에 의해 노출되고, 새로 전학 간 친구와 학급 학생들도 외면한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최악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수영을 배운 이유가 물에 빠져도 50m 정도 헤엄치면 살 수 있는데, 그녀는 결국 수영하지 못한 채 수면위에 둥둥 부유한 채 맥없이 흘러간다. <한공주>란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무겁고 답답한 영상미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영화는 허구의 이야기지만, 사실의 이야기를 재편집하여 새로운 하나의 현실성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한공주> 특성상 집단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은 그렇게 흔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니고(절대 흔해서는 안 될 이야기다), 매우 독특한 상황에 놓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관객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보편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면 <버티고>는 어떤가? 어떤 극단적 상황이라도 영화에서는 개연적 상황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연히 마주친 게 단순히 발전하는 게 아니라 우연의 산물이 연속적 조우로 인해 큰 결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버티고> 주인공 서영은 매우 흔하고 흔한 인물이다. 지방에서 태어나 수도권에 왔으나,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사원이고, 재계약이 다가오지만, 다시 재고용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앞선다. 게다가 사내연애 대상인 진수는 서영을 사랑하기 보단 그저 자신의 욕정에 채우는 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만일 은밀한 성행위와 혹은 돌출적 성행위를 하려면, 선팅이 잘 된 차 안에서 하거나 혹은 행사가 끝난 후 따로 모텔에 가면 될 사항이다. 하지만 진수는 서영과의 성행위를 회사 휴게실에서 하고, 또는 산행장소 인근 건물에서 한다.

 

단순히 자신의 쾌락적 상황에 만족하기 위해서이다. 산행의 경우 화장실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의 애정행각을 보고 충동적으로 성행위를 한다. 그리고 진수는 자신의 직업적 위치에 대한 역할과 성공을 위해 일에 몰두하고, 서영은 자신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 그저 주변조건처럼 대한다. 서영이 진수에게 매달리는 이유는 그가 능력도 있고 인물도 좋지만, 유일하게 회사에서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직장 내 계약직은 항상 불안하고, 입사동기인 예담은 다음 재계약에서 누락된다.

 

서영이 집에 오면, 집이란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어머니의 참견이 시작되는 장소이다. 회사에서는 업무가 있어 간섭하지 못하나, 집에 오면 괜히 전화해서 하소연을 풀거나 또는 용돈이 필요한 것을 간접적으로 강조한다. 새벽에 강아지가 태어난 이유로 전화할 이유는 없다. 돈을 빨리 붙이지 않아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남편과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재혼하여 살아도 잘 지내지 못해 수도권에서 자취하는 딸의 집까지 찾아온다. 서영은 직장과 집 모두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사람이 어딘가 편안하게 있지 못하면 매우 불안하다.

 



<버티고>는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있어도 그 장소가 자신에게 불편하거나 또는 외부인처럼 만드는 감옥 같은 곳이다. 게다가 서영은 어릴 적 아버지에 맞은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불편하다. 고막이 손상을 입어 청각능력에 큰 문제점으로 다가왔고, 게다가 귀에 있는 진정신경의 불안함은 구토와 어지러움, 공간적 장애까지 일으킨다. 재계약 문제로 보청기착용도 망설이는 서영의 모습에서 비정규직, 장애, 고독, 독신여성 등 다양한 아픔이 겹친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현실에 없다. 자신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오늘 하루도 몹시 흔들렸지만 잘 견뎌냈다. 거리는 튼튼하니 이제 안심이다라는 것은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런 서영의 삶에 들어온 자가 관우이다. 그의 집은 가난한 편이고, 늙은 아버지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불편하다. 로프에 몸은 의지하여 창문을 닦아내는 모습은 위태로우며, 집에 와서 강아지를 안고 여성 유튜버 방송을 열심히 본다. 서영의 상실감은 버틸 수 있을 곳이 없다면, 관우는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누군가를 버티게 하지 못했다는 미련이 있는 남자이다. 그가 왜 서영에게 이끌렸을까? 창문을 닦는데 자치 위험한 상황을 보자 서영은 매우 놀란다. 그저 창문을 닦는 노동자에게 어느 누가 관심을 보이는가? 자신에게 그런 관심을 갖은 서영에게 관우는 호기심을 느끼고, 우연히 회의실에서 마주친 그들은 서로에게 눈을 뗄 수 없다.

 

특히 서영은 단지 로프 하나로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관우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자신은 안에 있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다고 봤으나, 관우는 의지할 수 없을 것 같은데도 로프에 관우 그 자체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대비적이다. 관우는 창문닦이 아르바이트 이외에 서점 입구에서 피에로 분장을 하고 난간위에 앉아있다. 난간 위에서 서영의 모습을 지켜보고, 창문을 닦으면서 서영을 바라본다. 관우는 왜 서영을 그렇게 지켜보고 싶은 것일까?



 

관우는 하사시절 우연히 휴가를 나온다. 누나가 생일이라 누나가 자취하는 집에 가서 케이크를 들고 간다. 누나가 인터넷 방송을 하려고 한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누나는 죽어 납골당에 모셔져있다. 누나 왜 죽었는지 모르나, 적어도 그녀가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자 유튜버 방송을 보는 관우를 보면서, 옆에 와이프가 관우의 누나가 죽은 것은 악플러의 악플이 아닌가 라는 말을 했다. 생각하니 관우가 보던 유튜버 방송에 여자BJ가 덧글창에 이상한 말들이 나온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납골당에 관우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고, 아버지가 누나의 납골함을 보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한다.

 

관우가 유튜버 방송을 볼 때 안고 있던 강아지는 사실 누나가 키우던 강아지였다. 누나가 이루지 못한 그 꿈은 다른 유튜버로 통해 일시적으로 위로하고, 누나의 강아지를 만지면서 누나와의 기억을 공유한다. 그런 그에게 서영이 나타난 것이다. 위태로운 서영,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관우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서점서 책을 나두고 간 서영의 책을 찾아주거나, 눈물 흘린 서영을 보며 손수건을 책상에 나눈다. 서영이 술에 심하게 취해 자신을 거의 포기한 상황에 처하자 어떤 낯선 남자가 서영에게 손대려 할 때, 관우는 서영을 지켜준다.

 

그가 서영을 지켜주고 싶은 이유는 남성이 여성에 대한 사랑도 있지만, 서영에 무너지는 모습에 자신이 그저 가만히 주저앉기 싫었던 것이다. 서영은 버틸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나, 관우는 자신이 누군가가 버티게 해줄 수 있는 게 자신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로맨스적인 요소보단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감정의 영역이다. 작은 존재로 힘들어하는 누군가를 따듯한 눈으로 연민의 정을 건네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서영이 위기에 처해질 때도 그렇다. 이차장은 CCTV에서 자신이 한 행동으로 사직을 당한다. 단순히 서영만 성행위를 했다면 사내연애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지만, 남자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서영은 무엇이 되겠는가? 이미 사내에 소문이 퍼져 서영은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은 채 고립된다. 그런 서영에게 관우는 창문에 힘내요라는 세 글자를 적는다. 서영은 그것을 보자말자 눈물이 넘치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천우희씨의 연기는 여기서 빛을 발한다. 매우 우울한 모습, 홀로 괴로워하는 모습, 열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버티고>의 명장면이 드러난다. “힘내요라는 글자는 서영에게 매우 드라마틱한 요소이다. 창문을 닦던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한다. 그 사망자가 관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한 서영이 힘내요라는 글을 보는 순간 자신이 혼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자신을 재계약하는 조건으로 성폭행하려던 권차장의 위험에 빠지자 관우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관우가 자신을 계속 지켜본 것을 알고 있던 서영은 관우에게 찾아가 관우가 일하고 있는 세상을 보려 한다. 해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빌딩 안에 갇혀 발버둥을 치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빌딩 밖에서 로프를 매달린 채 세상을 보는 게 더 행복해 하던 서영이다. 서영은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모진 말을 했다. 서영은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안전로프에 의해 공중에 매달려 있었고, 관우는 그런 서영을 끌어올리며, “괜찮아요. 당신은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서영은 관우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하며, “이제는, 올라가고 싶다.”라고 독백한다. 그녀가 관우가 일하는 빌딩의 창문은 죽음을 택하려 했다. 내려가고 싶은 것은 결국 땅에 떨어져 죽은 청소노동자처럼 죽음을 선택한 것이고, 키스를 하고 올라가고 싶은 것은 다시 살기 위해 삶의 목적성을 찾을 것이다. 영화는 보는 내내 서영의 관점에서 카메라가 돌아간다. 어지럽고, 낯설고, 외롭고, 내몰린 그녀에게 석양이 지는 저녁노을은 아직까지 이 힘든 세상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동아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서영이 같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영이 처한 현실에 대해 크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다면 어떤가? 외로움과 슬픔, 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자신을 알아주고 봐주며,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아직까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처한 불행은 자신의 문제일 수 있지만, 나의 의지와 다르게 닥치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자신에게 있어도 남의 문제로 돌리는 경우도 많다. “나 때문이야!” 또는 너 때문이야!”에 매몰되기보다 때로는 괜찮아요?”라고 물어보며 작은 위로를 전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우리의 삶은 작은 위로조차 받을 수 없는 각박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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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이란 영화는 내가 아주 어린 시절에 나온 영화로 기억난다. 나이가 어려 보지는 못했으나 배트맨이라는 이슈는 개그프로그램 맹구 역할을 맡은 분이 흉내 내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배트맨이란 영웅이 있으면, 그 영웅성을 만들게 하는 요인이나 존재가 필요하다. 그 인물이 바로 조커이다. 배트맨 시리즈를 잘 모르던 나에게 이번 <조커>라는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점은 마블과 DC출판사의 특성이 다른 점을 알아도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다. 딱히 마블이나 DC영화 또는 만화에 관심이 없지만, 마블계통인 <스파이더 맨>을 보면 이분법적인 관계성이 명확하나, DC는 뭔가 미묘한 점이다.

 

가령 <X-man>의 악당 보스라고 해도 그는 나름 철학을 가지고 있고, X-man을 총괄하는 박사와도 친분이 있던 자이다. 단순히 이분법을 나누기보단 더 기묘하고 복잡한 세상만사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 DC만화의 특성이라 종종 들었다. 과연 <조커>를 보면서 확연히 느꼈다. 영화의 특성이나 혹은 배트맨 시리즈에 대한 정보를 제외한 영화 그 자체를 보면 영화 속의 배경은 20세기 중반 전후인 듯하다. 자동차 디자인과 건축물 구조, 그리고 지하철이 있다는 점에서 20세기 초반은 아니다. 영화를 보면 고담시는 전형적인 공황경제 상황에 놓인 시기인 것 같았다.

 

우선 일자리가 많이 없다는 점, 돈이 잘 벌리지 않은 점, 처음 아서가 일하는 장면이 폐업하던 점포 앞에서 홍보하는 모습이다. 가게가 접는다는 것은 경기의 불황이고, 물건을 다 정리하는 것은 시장의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장의 불경기는 뒤로 가면 지방정부의 예산도 연계된다. 영화 초반에 고담시는 미화원의 파업 18일째로 거리가 온통 쓰레기로 차 있고, 쥐와 같은 비위생적 동물이 거리를 활보한다. 쥐가 시궁창을 돌아다니면 흔히 페스트라는 질병을 옮기는 감염원이 된다.

 

병든 도시에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세계는 엄격하다. 영화 <조커>에서 바로 고담시란 존재는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란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처음 의아한 점을 느꼈다. 아서가 동네 깡패 청소년집단에게 구타당할 때 가해자들은 흑인이고, 자신이 일하던 곳의 오너는 흑인이었다. 영화에서 아서는 전형적 백인이나, 그는 백인의 세계가 아닌 흑인의 세계와 가까이 있었다. 영화에서 백인을 억압하는 흑인? 그건 영화의 전개상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가 살던 집에 가니 엘리베이터 앞에 어느 젊은 기혼흑인여성과 아이가 있었다.

 

아파트는 오래 되어 낡았으며, 방음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중에도 전원공급이 불안해서 잠시 멈추기도 한다. 본래 백인이 사는 구역이 아니라 흑인이 사는 구역이다. 아서는 흑인에게 당하는 자가 아니라 흑인들이 살아가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백인이다. 겉은 하야도 사회적 지위는 검은 색이다. 그가 검은 색으로 살아야 한 이유는 가난도 있었지만, 사회적 권력이 만들어낸 도덕의 모순이다. 어머니 페니는 몸이 불편한 노인이다. 그녀도 정신적 질환으로 입원기록이 있고, 병원에서 어머니의 기록을 보면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세상의 말과 그녀의 말, 누가 진실인가? 어머니는 자신이 30년 전 근무했던 토마스 웨인의 가정부로 일했다.

 

그녀의 편지를 읽지 않은 아서였으나, 그녀의 편지를 읽을 아서는 진실과 거짓, 윤리와 도덕의 의문을 가진다. 약을 끊어 환각에 시달리나, 적어도 그는 인간이란 윤리적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뒤에 가면 어머니의 젊은 사진이 보인다. 아름다운 금발의 미소 지은 그 사진 뒤에 어떤 메시지와 2글자의 알파넷이 있다. 알파펫은 이름의 이니셜이고, 그것은 토마스 웨인을 뜻하는 것이다. 가정부란 사회적 약자 또는 노동자, 토마스 웨인이란 은행지점장이란 거부는 엄청난 계급차이가 존재했다.

 

가정부와 사랑보단 가정부에게 향한 불장난이 조커가 만든 계기였다. 영화에서 조커는 살인을 저지르고, 무질서를 만들며, 군중을 선동하지 않았지만 선동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러나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글과 그림을 보며, 아서의 입장을 관찰한 게 있었다. 아서는 프롤레타리아, 그녀의 어머니도 프롤레타리아였다. 가난에 의한 문제도 있지만, 가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었다. 아서가 다닌 상담소의 상담원은 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그저 귀찮은 존재로 여기며, 아서는 자신 안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우울을 견디기 위해 우울증 처방만을 요구한다.

 

정부예산이 삭감되며, 상담프로그램과 의약지원까지 없어지고, 아서에게 남은 것은 점점 사라진다. 그가 정신병을 가진 이유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직장 내에서 그의 입지는 무척 어려우며, 진실을 말해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는 결국 해고된다. 그가 분노를 느낀 것은 흑인 갱에게 폭행당하는 것보다 그 사실을 믿어주지 않은 사회였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진실은 분명해도 사실을 다른 식으로 전달된다. 사실을 판단하는 것은 그 사건의 진실성보단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편한 방식만 취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국가의 안전망에서 축출되고, 직장이란 공간에서 경제적으로 축출되었으며, 자기가 도전한 발언묘기조차도 조롱거리 수준으로 떨어진다. 머레이쇼에서 머레이는 아서의 노력을 그저 조롱거리로 만들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그가 조커로 변한 이유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다. 아서는 고급영화관에 찾아가 토마스 웨인에게 아버지라고 말하며,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한 번 아들로 인정하여 안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토마스 웨인은 주먹을 그에게 날린다.

 

아서가 어머니를 죽인 이유는 국가와 직장 그리고 미디어란 공간에서 버림받았는데, 이제 가족까지 버림을 받았다. 자신의 존재성 자체가 모조리 부정당한 것이다. 조커의 탄생은 그렇게 시작했다. 아서는 정신병은 있으나 그 누구에게나 나쁜 짓을 하거나 악의를 가질만한 사람이 아니다. 원래 흑인여성 소피에게 성적인 관심은 있었으나, 그보단 사랑이 원했다. 단지 사람으로 봐주길 바란 것이다. 영화에서 그렇고 누군가 글을 쓴 것도 그러하나,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는 아서는 현실의 세계를 버티며 자신을 억누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커 분장으로 내려올 때 아주 신난 얼굴로 춤을 추며 내려온다.

 

갈비뼈가 심하게 보일 정도로 말라 기력이 없어보였지만, 약물의 과다복용으로 인해 조커가 된 아서의 모습을 활력이 넘쳐 폭발한다. 그의 폭발은 단순히 아서가 조커가 되기로 했기 때문일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대규모 시위현장이 나온다. 그 시위는 아서가 은행직원 3명을 죽인 이후의 현실을 보여준다. 아서가 그들을 살해했지만, 은행원은 부르주아 세계에서 경제적 지배계급에 속했다. 임금의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 게다가 시장에 나온다는 토마스 웨인의 정책발언은 현실성을 고려한 게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권력자들의 헤게모니에 알맞은 이데올로기만 고집한다. 조커는 단지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인생패배자들 중 전환을 일으킬 발화점에 불과했다. 조커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살해했지만, 조커의 행위에 열광하던 사람은 그 사회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조커가 바라보는 아버지란 공간, 즉 지배세계란 질서를 말하고 있으나 질서란 명분 아래 하부계층은 무질서한 혼돈만 빠진다. 하부의 혼돈의 과밀화는 상부로 이어진다. 방화와 약탈,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도시를 보며, 조커는 신이 난다. 체포과정 중 다른 폭도에 의해 탈출한 조커가 자신의 피로 피에로의 입술을 그린다. 붉은 피에로의 입술은 물감으로 그리나, 그의 입술은 피로 그려진다. 피에로는 누군가 웃기기 위해 붉게 칠하나, 아서는 자신이 웃기 위해 붉게 칠한다.

 

흔히 DramaComedy는 비극과 희극이라 한다. 드라마 천국의 한국에서 드라마는 전혀 드라마가 같지 않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넘친다. 망상 속의 이야기는 드라마가 아니라 코메디에 가까울 때가 많다. 본래 드라마란 비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코미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과 기쁨을 만들어낸다. 이와 다르게 실제드라마의 주인공들은 관객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희열감에 빠져든다. 희극인 코메디는 관객이 웃으며 자신도 웃을 수 있겠지만, 관객이 웃지 않으면 그는 울어야 한다.

 

웃기지도 않을 코메디를 비웃음거리가 되었기에 아서는 우울증의 웃음과 분노를 둘 다 자아낸다. 영화 <조커>에서 아서는 분명 악당이 되었고, 그가 한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서에서 조커까지 되는 과정은 그 사회가 만들었다. 범죄를 잡는 것보다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현재 우리 상식이다. 하지만 그 상식의 범주까지 자리를 잡기가 쉬운 게 아니다. 범죄는 당장 눈에 띄나, 예방은 바로 성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범죄자가 자라온 환경을 보면 대부분 불우한 생활이 있었고, 그의 입장을 동정 받을 일들이 있다. 그가 저지른 범죄를 보는 게 아니라 그가 지금의 그로써 존재케 한 그 본질을 봐야 한다.

 

세상의 모순은 본질을 찾는 게 아니다. 본질을 찾게 되면 그 규명자체 어렵고, 비용소모가 많이 들며, 때로는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많기에 대부분 외면한다. 낙오자를 외면하는 일만큼 쉬운 게 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항변할 수 있는 위치나 입장도 되지 않으며, 설사 한다고 해도 묵살하면 그 순간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이나 소재는 이미 충분히 세상에 널려 있다고 한다. 단지 <조커>는 그렇게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당히 긴장감 넘치게 보여준다는 게 묘미이다.

 

처음에 아서가 상담하는 과정에서 병원 안과 병원 밖에서 어디가 좋은지를 듣는다. 아서는 감시와 창살이 없는 밖의 세상보다, 병원 내부에 갇혀있는 게 더 좋다고 한다. 정신병자 환자들이 답답한 안의 공간보다 밖이 좋을 것인데 왜 안을 택하는가? 광인에게 세상은 친절하지 못하다. 병원은 광인을 위한 공간이나, 밖은 그렇지 못하다. 아서는 질문을 받는다. 은행원 3인을 살해할 때 죄책감이 없냐고? 머레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가 살인이 범죄라는 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은행원 3인이 한 행동이 잘못되었고, 거기에 억압당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지하철 장면이 가장 핵심이다.

 

강한 자들의 행동과 발언이 하나의 법칙이고, 정당성을 부여 받는다면, 거기에 억눌리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밟히거나(어머니 페니), 아니면 저항보단 반항(조커)을 하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게 아니다. 반항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위가 무질서한 것이다. 저항을 한다면 무질서가 아니라 절도가 있어야 한다. 반항적 행위와 시위는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감과 정책성의 문제이다. 삶 그 자체의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그 안에 처해진 입장에서 비롯한 문제이다.

 

페니가 죽은 후 전 직장동료가 아서의 집으로 찾아온다. 이때 아서는 랜들을 살해해도 옆에 있던 난쟁이 게리는 그냥 보내준다. 살인자들은 증인들의 입막음을 위해 같이 살해하나 아서는 그렇지 않았다. 게리가 아서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랜들은 법적으로 아서에게 큰 죄를 짓지 않았다. 물론 머레이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서는 예의가 없는 놈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칼과 총을 겨눈다. 물론 은행원 3인도 그렇다. 영화는 도덕적 가치 즉 법적인 사회질서보단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다. 도덕이 존재하는 세계에 윤리는 존재하나, 윤리가 붕괴된 세계의 도덕은 이미 파멸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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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시행령6[별표2]를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국내 군사기지 중 군사공항의 위치가 광역시 기준으로 구까지 도지사 관할이면 시나 군까지 위치가 제시된다. 여기서 K-1은 흔히 부산광역시 강서구, 즉 김해국제공항이 위치한 공군기지이고, K-2는 대구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K-2라는 기지가 있다. 이중에 K-2라는 기지는 독특한 편이다. 모든 기지가 특성이 있으나, K-2기지는 공군전투비행기지만 아니라 남부사령부와 군수사령부가 위치하여 상당히 규모가 큰 공군기지이다. 문제는 대구광역시가 점차 도시화되면서 군사공항 인근에 많은 주거시설이 들어오고, 여기에 대구국제공항까지 취항하면서 많은 민간인들이 대구공군기지를 민간공항시설로 이용하게 된다.

 

아쉬운 사실은 국내 대부분 공항은 군사공항을 토대로 만들어져 있고, 본래 김포공항도 한국전쟁 이후 군사기지였으나, 이후 민간공항으로 활용되었고, 광주공항과 원주공항 게다가 포항공항 등도 군사기지이다. 제주공항의 경우 민간공항이나, 위성사진에 보면 제주공항은 표시되지 않는다. 민간공항이나 공군 수송기가 정기적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일반적 민간공항인 양양공항 무안공항도 비상시 군사용기지로 활용될 수 있다. 20세기 2차 세계대전 이후 공군 작전력은 필수가 되었고, 20세기 걸프전에서도 미군의 주요전력이 전투기였다.

 

21세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공군이 먼저 타격하고 육군 및 해병대 전투인력이 투입된다. 이번에 내가 글을 쓰면서 공군전력에 대해 제시하는 이유는 101일 국군의 날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이다. 20세기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가 도래하면서 인구가 증가하면서 재래식 무기가 주된 전력인 육군 위주로 편성되어 왔다. 보병 병과를 중심으로 포병과 전차부대 등이 같이 작전을 수행하였지만, 20세기 전투기의 발달은 전쟁양상을 다르게 만들었다. 육군 1개 대대가 만일 공군 전투기 1대와 전투를 펼치면 20세기 중반까지는 육군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항공기의 발달은 소총의 총알이 닿지 않은 고도까지 상승하고, 공중에서 발사되는 폭격은 가히 공포의 대상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군에게 패배한 이유가 핵폭탄의 투하지만, 문제의 폭탄은 그냥 일본 본토를 강타하는 게 아니라 공군폭격기의 고도비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항공기에서 투하한 2대의 핵폭탄이 20세기 운명을 바꾼 것이다. 물론 상대진영의 통제관리를 위해서는 육군부대가 최종적으로 투입되나, 육군이 투입되기 위해서는 제공권의 우선과 적진의 무력화가 우선이다. 이런 점에서 공군의 전투력은 20세기부터 큰 변환으로 다가왔고, 21세기를 도래하면서 공군의 전투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기존 국방부 관료체계에서 국방부장관은 대부분 육군참모총장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장군들이 위촉받았다. 육군의 전투력이 국방부의 중심이나, 이번에는 공군참모총장 출신자가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육군중심에서 공군중심의 국방부행정이 이관이 돋보인 점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점은 인구의 감소이다. 최소 전투인력 60만 이상이었던 시절, 일반남성의 징병과 모병으로 병력운용이 가능했으나, 최근 50만명 수준으로 감소되기 시작했다. 육군의 보초나 통제를 인원이 아니라 CCTV나 기계화 시설로 교체되고, 간호장교 및 일부 여군사관을 제외하면 보이지 않은 여군도 전체 병력의 10% 이상까지 근무한다.

 

일반 병사를 제외하면, 장교와 부사관을 생각하면 2만 명 수준까지 갔다면 충분한 전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육군에서 보병전력 충원대상인 일반남성이 점차 줄어들면서 국방개혁은 단순히 혁신의 대상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실을 반영한 정책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전력충원 대상은 공군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우선 전투기가 활주로에서 출동하여 적진의 레이더기지와 공군기지 그리고 참모들이 모인 작전지휘시설부터 강타한다. 그런 전투기를 제대로 통제와 지휘하려면 전투기를 몰아본 사람만이 그 감각을 제대로 전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101일 국군의 날 행사를 이번에 처음으로 공군기지인 K-2에서 거행했다. K-2기지는 대구광역시 위치하고, 대구는 보수의 야성이 깃든 도시이다. 보수의 텃밭에 진보진영의 대통령이 갔다. 왜 하필 대구공군기지인가? 라는 점이다. 내가 공군에 복무할 때 인상적인 일이 있었다. 갑자기 비상이 걸려 전 부대원이 비상대기를 하게 된 점이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일본자위대 공군기가 독도 상공을 침범하여 대구기지의 F-15K 전투기가 출동했다. 울릉도와 독도와 가까운 비행기지라면 원주나 강릉, 예천 또는 청주와 충주도 있다. 그런데도 대구에서 출동했다.

 

국내 활주로는 남쪽과 북쪽으로 이어져서 만일 위의 비행장의 전투기가 출동하면 직선방향으로 비행하여 선회하는 시간이 제법 걸린다. 항공기 속도는 마하 2 정도, 약 초당 700m 이상 날기 때문에 급선회하기 위해 공간적 여유, 그리고 상공의 민항기 및 조류 등도 있다. 그래서 독도에 출진한 기지는 대구일 수밖에 없다. 대구에서 독도는 북동측에 있어 살짝 동측으로 비행기체를 조종하면 되는 것이다. 당시에는 일본자위대 불법침입에 출동했다면 최근에 러시아군용기가 침범했고, 또 출동했다. 게다가 국군의 날에도 독도 상공을 비행했다. 이것은 독도에 대한 영공수호에 대한 의지이고, 최근 한일무역 갈등이 정치적, 경제적 마찰에서 군사적 영역까지 이어진 셈이다.

 

해군 전투함이 바다위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데, 일본 자위대 항공기가 저공비행을 하여 위협을 가했고, 일본은 한국해군 전함의 레이더를 마치 타격을 위한 알람인 것처럼 꾸며, 여론을 조작했고, 심지어 자신들의 국정관련 도서에도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담았다. 이것을 보면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떠오르고, 그때 조일협약을 맺어 제물포조약과 한일을사늑약까지 이어진다. 일부로 미끼인 꼬리를 잡게 하여 그것을 토대로 조선을 망하게 한 일본의 전략은 여전한 셈이다. 북한과의 외교에서 친화적 정책을 펼친대도 기본적으로 군사전력은 전방에 육군이 있고, 공군전투기는 북측으로 출동을 하게 금 만들어놓았다.

 

문제는 새롭지 않으나 새로운 적으로 다가오려고 한 일본의 위협이다. 사람들은 한국이 미국의 우방이라 여기나, 사실은 극동아시아 미군의 전략은 일본이 더 중요하다. 오키나와가 동아시아 미군기지가 중심이고, 괌에 위치한 미군 역시 상당한 전력이다. 20세기 해체한 소비에트의 러시아도 최근 중국과 협력을 하려하고, 미중경제전쟁, 이에 한일 간의 갈등이 21세기 도화선이 한반도에 있다. 세계열강은 평화와 경제를 외치나 그 이면에는 언제든 상대 국가를 어떻게든 노예로 만들기 위해 준비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돈과 권력을 추구한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욕망이란 거대한 목적이 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가? 한국 사람인 나로서 돈이 많아지고, 어느 정도 권력이 있다면, 그것을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을 경우 제일 먼저 아버지의 묘부터 다시 정리하는 것이다. 아버지 고향과 다른 이 도시의 추모공원 납골당에 모셔져있다. 그 유골을 가지고 아버지 고향에 묻힌 조부모님 슬하에 모시고 싶다. 그리고 증조부모, 그 밖의 증증조부 및 선조들의 무덤을 한 곳에 모아 제대로 묘지를 만들고 싶다. 그게 내 바람이나, 한편으로 후손이 성묘하기 편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점에서 아베는 어떠한가? 아베의 외조부는 완벽한 태평양전쟁의 1급 전범이고, 그 집안 자체가 극우성향이다. 아소 내각위원 역시 아소광산을 토대로 성장한 극우성향의 집안이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가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원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인간이 가진 것이 없거나 혹은 다 가져도 찾게 되는 게 정체성이다. 그들이 원한 정체성이란 20세기 초반 일본이다. 경제대국에 군사적으로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군국주의적 사상이다. 에도시대의 도쿠가와 시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라져야 할 대상이나, 도요도미 히데요시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그들의 영웅성을 미화시키는 게 단순히 게임콘텐츠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문화적 요소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예전에 모애모애 조선유학라는 국내 라이트노벨이 있었다. 여자주인공인 송시연의 원래 이름은 우암 송시열로 하려고 했다가, 우암 송시열 후손이 크게 반발하여 흑역사로 남은 라이트노벨이다. 정체성이란 바로 그러하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단순히 돈과 권력을 넘어 정체성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움직인다. 정체성을 제외하여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 공허의 허무만 존재하고, 돈이 없으면 생계가 되지 않고, 권력이 없으면 소외된다. 돈과 권력 그리고 정체성의 적정수준의 균형은 현실을 유지하는 기반이 된다.

 

최근 한일 관계에 대해 누군가는 정부가 너무하다거나 혹은 잘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강제징용을 끌려간 외조부, 친가쪽 할아버지가 있는 나에겐 아베정권이 좋게 볼 수 없다. 단지 말하고픈 것은 국제정세에서 적당히 상대방의 도발에 넘어가주는 척은 할 수 있어도, 적정수준에서 끊어야 하는 게 답이다. 최근 항공관제권에 대한 비용문제나 또는 동해 어업권에서 외교적 갈등과 군사적 대립을 넘어 경제적 문제도 숨어있다. 경제적 문제는 국민생계와 관계있다. 독도새우가 먹고 싶은데, 독도가 우리 땅이 아닌 순간, 그 새우 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고, 독도를 빼앗기면 국내 항공료 가격도 오른다. 물론 독도 주변해역에 새우만 있겠는가? 각종 해양수산물이 어획된다.

 

신선한 식탁까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한국의 서해는 해수수질이 깨끗하지 못하고, 게다가 중국대륙에 막혀 물의 순환이 원활하지 못하다. 남해는 수온이 높고, 그나마 동해쪽이 수온이 낮기 때문에 다양한 생선이 포획된다. 한국의 이어도는 제주남측에 위치한 대한민국 영토이지만 한편으로 군사기지이다. 위성사진으로 보이지 않고, 대신 군용헬기가 내릴 수 있는 H자만이 지도에서 보인다. 암초로 형성된 섬이 발견되면 일본은 당장 자위대가 출동하여 일본 국기를 꽂고, 그 후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기지화를 시킨다. 독도가 일본이 차지하면 군사기지화를 노리면, 그 뒤는 어디를 노리게 될 것인가? 운요호처럼 서해는 제법 일본 본토에서 항해거리가 있지만, 독도는 바로 한반도에 대해 일본의 입장에선 중앙기착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전진기지가 나고야지만, 한편으로 대마도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대마도주가 임진왜란에서 고니시의 사위로 출전한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버거운 문제이다. 물론 군사적으로 일본과 무력충돌로 인한 전쟁까지는 무리성이 존재하나, 군사적 강약은 외교나 경제에서 큰 압력으로 다가온다. 국군의 날 행사가 대구공군기지에서 거행된 점은 단순하지 않다. 대구기지에 F-15K가 있다는 점에서 F-35 기종 도입이전 최강 공군전력이고, 일본 무력도발을 제일 먼저 대응이 가능한 곳이 대구공군기지이다.

 

대구공군기지 소음문제로 이전을 할 수 있다고 하나, 현재상황에서 보자면 공군력 그리고 제공권이 제일 우선이 된 21세기 전투력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구공군기지에 대통령이 도착할 때 육로 또는 공군1호기를 탑승하지 않고, 수리온을 탑승했다. 육군1호기 헬리콥터를 탑승한 점이다. 육군의 헬리콥터를 이용한 전력이 큰 이점이 되고, 결론적으로 제공권과 기동성능이 국방력의 우선순위로 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작년 고흥에 위치한 나로우주센터에서 시험발사체가 테스트발사를 거행했다. 정밀고도 비행물체 개발은 곧 로켓, 미사일의 장거리 및 정밀타격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미사일이나 로켓의 정밀성은 엔진의 추진력과 더불어 전산정보의 정밀화가 토대이다. 반도체의 성능이 결국 첨단무기의 결정권으로 이어진다. 무기를 수입하는 국가에서 무기를 제조하는 국가로 변모하면 그것만큼 무서운 일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첨단무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기존 국군의 날 행사가 블랙이글스가 먼저 공중곡예를 펼치고, 전차와 보병부대 등이 사열하던 방식은 그저 보여주기 식에 불과하나, 대통령이 직접 전방부대를 찾아가 군사위용을 보여준 것은 아베의 입장에서 상당히 불쾌할 것이다.

 

101일 이후, 103일이 개천절이다. 이번 개천절 행사에 특별한 메시지가 나올까 기대했으나 큰 이변은 없었다. 오히려 광복절 때의 발언이 더 강력했던 것 같다. 개천절 행사에 나온 현정회장 발언이 있었는데, 사실 현정회는 서울 사직동에 있는 단군성전을 관리하고, 단군과 관련된 문화를 전파하는 업무를 맡은 기관이다.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 신도이고, 심지어 대한민국 최초 민주공화정인 임시정부 요인조차 대부분 대종교 관련인사인 점에서 국군의 날에서 보여준 퍼포먼스가 개천절이 만들어진 이유를 더 깊이 새길 수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개천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든 이유도 그렇고, 임시정부는 조선의 대한독립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국군의 시초를 광복군으로 보는 이유에서 과연 국군의 날과 개천절이 무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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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15, 그 길고 어두운 절망의 시기에서 벗어 난지 이제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 815 경축행사에서 광복회장과 대통령의 연설은 통일문제를 거론했다. 통일이 되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통일이란 단어가 힘들더라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 하나였지만, 일제강점기와 이후 신탁통치 그리고 한국전쟁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기나긴 아픔과 현실적 여건, 그리고 타국과 자국과의 득실문제로 외교, 정치, 경제, 군사적 갈등이 오고가는 현실이다.

 

어째든 행사가 마무리 되면서 초대된 귀빈들이 나오는 모습이 나왔다. 일제강점기시대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을 하시던 어느 할아버지가 보였고, 국무위원과 국회의원도 보였다. 그리고 종교단체 인사들도 보였다. 불교와 천주교, 원불교 같은 익숙한 종교단체 지도자가 보였다. 그런데 이때 어느 여성분이 종교지도자 대표로 나왔다. 이상한 도형이 겹쳐져 있는 의상을 입고 있던 분이었다. 그분은 대종교 현재 최고지도자 분이었고, 개천절 행사 아니면 제대로 눈에 보이지 않을 종교단체였다.

 

그런데 이 대종교란 종교단체가 왜 중요한가? 올해 봄에 영화 <사바하>에 사이비 교주 모습이 나왔는데, 이 사람의 그림이 사실 무단도용된 것도 모자라 왜곡까지 시켰다. 그 교주의 원본은 대종교 창시자 홍암 나철이란 분이다. 대종교 창시자도 그렇지만, 이 사람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가지 만든 독립투사이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독립투사 중에 대종교와 밀접한 인물이 정말 많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이회영 같은 무장투사부터 시작해 훈민정음을 한글로 재정립하여 만든 주시경, 역사에서 정인보와 신채호 역시 대종교 신자이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영원한 영웅인 손기정 선수 역시 그렇다. 우리가 아는 많은 분들이 대종교를 믿은 분이나 우리는 잘 모른다. 대종교란 이름은 독립군의 그 자체였고, 민족의 문화와 영혼을 지킨 분이다. 종교적으로 들어가긴 다소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지만, 그들이 남긴 업적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20198월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전투>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봉오동전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국뽕이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국뽕이란 말을 들어도 사람들이 많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전후맥락을 어느 정도를 알면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민족의 경제를 지키고, 우리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만든 분들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은 백산 안희제이다. 임오교변 당시 서거한 인물로 대종교로서 순교자이며 민족과 역사에서는 순국자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민족 얼을 죽이기 위해 대종교 지도자를 무참히 고문하고 탄압했다. 조선어학회나 독립운동가 역시 많이 연루되어 어떻게든 말살의 대상이었던 분이다. 백산 안희제가 만든 백산상회는 독립운동가에게 필요한 자금의 전체 60%를 제공했다. 안희제와 그 주변 인물이 노력한 성과가 바로 독립운동의 젖줄이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독립되지 않아 그들의 노고를 억지로 지우거나 저하평가하려는 자들이 많다. 스스로가 일어나서 스스로 걸어가는 게 우리의 길이고 의지이다. 다른 국가와는 협력과 타협으로 대해야지 그들의 노예로 살아가면 평생 우리 민족은 노예의 후예만 될 것이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의 전략은 홍범도 휘하 독립군을 몰살하는 것과 동시에 독립군 자금을 수중에 넣는 것이다. 이때 독립운동자금은 어디서 왔을까? 조선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백산상회에서 대부분 나왔다. 영화는 그 자금의 출처는 말하지 않으나, 전후맥락으로 백산 안희제 선생의 노력이 있었다.

 

영화에서 단순히 독립운동부대만이 나왔으나, 홍범도 부대의 북로군정서가 등장했다. 이들 모두가 대종교들이고, 후에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다. 영화의 전투장면과 추격 장면 그리고 국뽕적인 승리에 열광하기도 하고, 혹은 그저 그런 영화로 볼 수 있으나, 사실 그 전후맥락을 보면 단순히 여길 것은 아니다. 김좌진의 청산리전투는 군대에서 배우나, 홍범도의 봉오동전투는 제대로 배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좌진은 민족주의이고, 홍범도도 민족주의자이나, 당시 중국과 소련의 연합을 하던 시절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에서 레닌이 서기장으로 있을 적에 조금 분위기는 좋았다.

 

레닌은 스탈린처럼 일국사회주의가 아니라 혁명은 계속 이어져가야 한다고 여기고, 3국인 조선을 도우기 시작했다. 군자금 제공이나 군사적 협력은 바로 그런 연유이다. 홍범도가 가진 권총은 레닌이 직접 준 총이다. 볼셰비키혁명 지도자, 소비에트의 서기장인 레닌에게 총을 받은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주의 세력과 연결된 것도 있다. 홍범도는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되나, 추후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저항하다 결국 숨을 거둔다. 이에 반해 김좌진은 스탈린 집권이후 광복군 일원이 스탈린 휘하에 가기를 거부하자,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 의해 암살된다.

 

김좌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의해 죽은 게 아니라 같은 동포에 의해 죽은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업적은 위대하지만, 홍범도 장군의 업적이 절하될 까닭은 없다. 그래서 영화 <봉오동전투>는 매우 중요한 상징성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지난 세월의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그 이상의 조선과 대한민국의 역사성을 담은 것이다.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이제 100주년이 된다. 국가는 영토와 구성원 그리고 정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근대적 국가는 국회, 정부, 사법부로 삼권분립을 말한다.

 

하지만 국가의 기본은 국민이다. 국민이 없다면, 그리고 국민의 토대가 되는 민족이 없다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의미가 없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운 후 일본도나 벽면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적는다. 그 글을 적는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황해철은 동생을 눈앞에서 폭탄에 의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개똥이는 자신의 눈앞에서 부모님이 목이 잘리는 아픔을 겪는다. 마을소녀는 눈앞에서 어린동생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본다. 이들을 보면서 독립군들은 대한독립운동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요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원한과 울분 그리고 복수심에 의해 움직인다.

 

민족주의적 국뽕이란 단어로 <봉오동전투>를 평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면에 가려진 원한은 과연 광기가 넘치는 민족주의로 볼 수 있는가? 나의 외할아버지는 천수가 뛰어나셔서 현재 100살이 넘어 201910월 탄생 100주기를 맞이한다. 외할아버지는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에 끌려가서 모진 고생하고,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계속 있다가 죽을 것 같아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 일제가 자신들의 전쟁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징용자들을 고의적으로 살해하던 기록이 나온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가혹한 노동과 영양실조로 많은 조선인들이 원한에 사라졌다.

 

친가 쪽에 큰할아버지는 징용에 끌려가서 해방을 맞은 그 다음해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작은할아버지도 징용 때 고생했는지 오래 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우리 할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아 끌려가지 않았으나. 형제를 잃은 비극을 맞이했다. 요새 일본산 제품 불매에서 여기저기 말이 나오나, 솔직히 피해자의 후예로 본다면 불매가 맞을지도 모른다. 일본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나도 일본애니메이션을 즐겨보지만, 그런다고 인간의 기본도리를 져버리는 기업이라면 불매운동은 당연하다. <봉오동전투>에서 일제에 맞서 싸운 자들은 그냥 농사짓고 장사하던 사람이 대부분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독립군의 수는 정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잔인하게 민족을 탄압했다. 독립운동이 거세지면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마을을 불태운다. 이들이 독립군의 비밀기지 또는 군자금 지원을 해주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학살에도 써먹던 방법이다. 토끼몰이 토벌작전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술과목으로 교육되고, 그 교육과정이 제법 재미있었다고 하는 말도 종종 인터넷에서 본다. 이길 수 없는 약한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고, 추격하여 사냥하는 방식은 사람이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사냥대상물로 보는 비인간적 발상이다.

 

영화 <봉오동전투>는 그런 토끼몰이식으로 가족을 잃은 자들의 복수이다. 왜 독립군들의 얼굴이 분노와 증오로 일그러져 있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영화 <봉오동전투>는 잊어진 과거의 우리 모습들이다. 외세에 의해 약소국으로 점령당한 것까지 참을 수 있으나, 우리가 그저 당하고 우리의 역사와 정신까지 점령당했다는 것에 용서할 수 없다. 과거 일본제국주의를 숭배하고 찬양하며 그때의 영광을 돌리려는 세력과 거기에 동조하는 무리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런다고 하여 일본 개인 한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독립운동하는 분들은 일본군경과 대지주들을 암살해도 일반인까지 말려들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들 역시 당시 군국주의에 자신의 자유를 속박당한 자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황해철은 자신이 잡은 어린 포로를 죽이기보다 직접 끌고 다니며, 그가 바라본 전쟁의 현실, 그리고 억압받는 민족의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기억하라고 했다. 일본제국군이 아니라 그저 일본인 한 개인으로 말이다. 처음에 독립군들에게 반항하던 포로였지만, 계속 있으면서 그도 역시 독립군의 의지에 동화된다. 이데올로기란 틀에서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에 갇혀 자신의 존재마저 거기에 합리화하는 야스카와 부대장은 상당히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하지만 거기에 사로잡힌 그가 내 뱉는 말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단 악마의 언어에 가깝다. 사람의 가죽을 살아있는 채로 벗겨 내거나, 작전에 실패한 장교의 손가락을 망설임 없이 베거나, 어린 포로가 송환되어 그의 심중에 맘에 들지 않자 자살하라고 하는 방식은 그저 전쟁에 미친 미치광이에 불과하다. 피 맛을 본 인간은 또 다른 피를 원하므로 살육을 계속 자행한다. 이미 그가 나올 때부터 호랑이를 그대로 도륙 내는 모습이 나온다. 일제가 처음 조선에 들어와 한 만행 중에 하나가 호랑이 사냥이었다.

 

겉으로 맹수사냥을 통해 치안유지라고 하나, 사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고유문화나 민담에 호랑이가 자주 나온다. 심지어 옛날이야기도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이라 말한다. 담바고로 불린 담배가 들어온 것은 조선 임진왜란 전후이니, 옛날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야기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지도가 토끼 아니면 호랑이로 묘사하고, 민간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령의 전령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호랑이와 곰이 마스코트로 등장했다.

 

그 이유는 단군신화에서 등장하던 동물이 곰과 호랑이였기 때문이다. 맹수사냥은 단순한 사냥놀이나 치안유지가 아니라 우리를 말살하려던 그들의 방법이었다. 영화 <봉오동역사>에서 등장한 북로군정서에 대해 대종교 신도가 대부분이고, 그 이후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과 독립군 역시 대종교들이다. 그들의 총과 총알은 동포에 의해 모아진 군자금이다. 그들이 활약하여 독립까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없었다면 광복 이후의 국가재건에서 민족적 정신을 반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기본법은 우리나라 교육의 토대가 되는 기본 법률이다. 교육기본법의 제2장 교육이념은 과거 폐지된 교육법1조의 내용을 상기해야 한다.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념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 문장은 194912월에 만들어진 법률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용어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용어이다.

 

영화 <봉오동전투>가 이른바 국뽕영화라 해도 이 영화가 단순히 그렇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이다. 그들이 이긴 일본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민족적 의지이다. 민족주의에 함몰되면 파시스트가 되나, 민족주의를 자체를 부정하면 국가와 민족이 사라진다. 미국이란 국가는 다민족 국가지만, 그들은 원래 영국과 유럽에서 이주 온 사람이었고,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의 후예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다양하나, 미국의 시작은 그러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까지도 인종차별에 의한 갈등이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생각할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반 하여 적에게 물리적으로 이겼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총을 들고 칼을 휘두르며, 왜 목숨까지 던지면서 악착같이 견뎌낸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면 대한민국 국민이란 국가적 소속이지만, 민족은 조선의 후예라는 것을 말이다. 조선이란 국가는 문제가 많았지만, 그러나 그 조선이란 공간을 부정하면 나라는 존재조차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단순히 북한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있는 해외교포의 정체성까지 이어진 부분이다. 강제이주와 독립운동으로 많은 분들이 타국에서 숨을 거두고, 그들의 후예는 국가는 달라도 아직까지 고려인이나 조선인이라고 말한다.

 

총과 칼로 싸우는 봉오동전투는 끝이 나도 타국에서 살아가는 교포가 자신의 정체성과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 역시 전투이고, 현재 경제보복 전쟁으로 총성 없는 전쟁을 치루는 우리 현실도 또 다른 이름의 봉오동전투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타협할 것은 있을지 몰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린 우리 스스로 굴복할 수 없다. 그것이 영화 <봉오동전투>에 담긴 진정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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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4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5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가 쓰고 말하고 듣고 알고 있는 한글”, 사실 한글이란 표현은 세종대왕이 지칭한 게 아니라 주시경, 한글이로 주한샘이란 분이 수정한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문화는 일제강점기와 외침에 의해 사라질 뻔했으나, 조선이란 국운이 강한 것이 아니면 엇갈려 나간 것인지 조선이란 이름으로 아니면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우리 문화가 살아가고 있다. 언어란 사실 대화수단만이 아니다. 그 나라의 민족과 역사를 같이 하는 하나의 삶이다. 언어는 그 문화의 특성까지 반영한 하나의 체계이다. 지식과 소통,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 오로지 언어에 의해서이다. 언어를 모른다면 우리는 과거를 알 수 없고, 미래를 향해 외치지 못한다.

 

언어가 있기에 말이 나오고, 글자가 문자로 기록된다. 글과 말, 언어라는 것이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게다가 어느 한 국가, 어느 민족이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지켜가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외침에 의해 민족 자체가 섬멸되거나 또는 강제로 교화될 경우 그 정체성을 상실한다. 남미의 국가는 가톨릭 문화가 제법 침투했다. 과거 그들의 조상의 언어와 문화는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만일 20세기 그 문화가 있었다면 레비 스트로스 같은 위대한 인류학자가 어떻게든 기록하고 연구하여 보존 및 기록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남미민족은 정체성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북미의 인디언은 사냥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민족이 쓰는 문화 그리고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자신이 존재했고, 자신의 그 이전에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은 살아남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한글의 원류가 되는 훈민정음”, 단어에서 모음과 자음으로 나누고 나누어 거기에 새롭게 더하고 더한다. 중국의 한문은 알파벳의 단어를 제대로 기록하기 어려우나, 우리는 그 어떤 나라의 말을 한글로 적어갈 수 있다. 언어적으로 발음을 중심으로 전달하기에 타국의 언어를 더 편하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언어가 존재한지 이제 600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언어가 없었다면 21세기 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에 의해 일어가 표준 언어로 자리 잡고, 나중에 미국에 의해 영어가 자리 잡았을 것이다. 비무장지대 위로 보이는 적이 된 동포의 국가에서는 러시아어가 국가통용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한국어 또는 조선어, 혹은 훈민정음을 모태로 언어를 활용한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이 한글의 원류 훈민정음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조선이 건국할 때 태조임금은 자신의 스승 겸 친구로 무학대사를 모셨지만, 그는 조선 최초 또는 마지막 원사였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다. 정치와 종교적 가치관에서 불교는 제정일치 사회지만, 유교는 조금 미묘하게 달랐다. 공맹의 유학은 정치학으로 종교적 범주보단 학문적 영역으로 시작했으나, 주희의 성리학에 의해 유교는 다소 종교적 색채가 더해졌다. 고려가 패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삼국시대에서 고려까지 불교의 힘이 강했고, 불교를 토대로 권력을 가진 승려들이 제법 있었다. 고려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승려들이 입김이 강했고, 승려들은 불경을 볼 때마다 한자를 익힐 수 있었다. 조선시대 초기 양반은 전체 인구의 10%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들은 글을 제대로 익힐 수 없으니, 실제 한자란 글을 아는 인구는 5% 미만인 셈이다.

 

언어를 아는 것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고, 권력으로써 지식의 독점권을 행사한다. 불교의 나라 고려가 망한 이유는 권력과 지식의 유착과 부패로 이어진 계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정치적 사회적 시스템이 변하는 시기에 탈피하지 못하여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나라가 망하는 이유는 권력자의 부패와 비리, 그리고 백성에 대한 애정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렇다. 고려는 이성계에 의해 망하고, 조선은 태조와 정종 그리고 태종에 의해 왕권이 강한 국가가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강하게 만든 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권력을 남용하는 이는 용서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 세종의 장인마다 역적으로 만들어 죽게 만들었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지만, 그는 세종에게 주지 않은 핵심사항이 있었다. 그건 병권이었다. 군사력 통제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무관으로 시작한 임금이므로 군사정병은 항상 군사 병권력의 장악에서 시작하는 점을 알았다. 세종의 허락이 있어도 상왕의 허락 없이 병력을 움직이거나 국방정책을 펼치는 순간 병조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국문 장에 끌려와 최후를 맞이한다. 세종의 한은 여기서부터 시작이고, 그가 성군이 된 계기도 그러하다.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사대부부터 더 학문이 높은 왕이기에 그 누구도 세종에게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자의 나라에서 왕이란 그들의 군주인지 아니면 사대부의 최고자리인지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백성에게 글을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위협이 있고, 게다가 아낙네에게 가르치는 것을 대단히 꺼려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소외된 자들이 서로 힘을 모아 기득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이다. 처음 왜국 승려가 오자 세종은 팔만대장경을 내어주는 것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종교적 사상이 하나로 모이면 분열된 세력이 통합되어 큰 힘으로 발휘하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은 외세에 저항하고자 한 고려 민중과 권력자, 지식인이 만들어낸 세계적 유산이다. 그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우리의 얼과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유교의 나라이다. 세종은 여기서 고민이었다. 백성들이 잘 살고, 그들의 삶을 이롭게 하려면 뭔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성경을 충분히 독일어로 볼 수 있었으나 독일 민중을 읽을 수 없었다. 우선 책이 그 당시 상당히 높은 가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록문자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배우기 어렵고 사용하기란 더욱 어렵다. 오직 귀족과 성직자만 공유하고 그들은 유럽사회를 지배했다. 언어를 아는 것이란 결국 타인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추후에 훈민정음이 반포해도 혁명은 일어나거나 문제는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의 등용문에서 한자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권력의 중추는 한문이었다. 그래도 훈민정음의 등장은 조선시대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가령 병사들에게 훈련을 시킬 때, 교본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림을 넣는 것도 한계가 있고, 글자로 보여주자니 한문을 읽을 수 없다. 훈민정음을 이용하여 병사에게 보여주니 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언어의 힘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게다가 구중궁궐 궁녀들은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다. 친정의 어머니는 잘 계시는지, 아버지와 동생들은 잘 지내는지, 어떻게 전하려 해도 글을 몰라 못쓰고, 대필해줘도 그들의 가족은 읽지도 못한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은 조선시대 천한 존재들을 대등한 관계로 이어준다. 중전과 신미스님이 같은 좌석에 앉는 모습이 나온다. 여인네와 중놈, 물론 그나마 중전의 자리는 최고의 자리이지만, 소헌왕후는 역적의 딸이란 이름으로 힘들어했다. 불교를 믿어도 신하의 눈치를 보았고, 영화에서는 수양의 집에서 눈을 감는 것으로 나온다.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좌를 찬탈하고, 동생 안평의 생명을 빼앗은 비정한 군주이다. 하지만 영화의 수양은 아버지 세종의 의지를 존중하고, 어머니 소헌왕후를 지극히 모시는 효자이다. 물론 형이 문종과 아우인 안평과 사이는 좋았다. 권력이라는 것은 부모형제조차도 냉정한 것이다.

 

하지만 세조가 왜 그렇게 왕권강화에 신경을 쓰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훈민정음의 보급에 많은 역할을 했고, 한국 불교문화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가족에게는 잔인한 사람일지 모르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군주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영화라고 해도 만일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는 왕실이 있다면 그런 왕실은 없어도 된다고 말이다. 신미스님에게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하여 유가와 불가가 충돌하지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중이고 내가 왕이지만, 우리 모두 백성의 지은 쌀을 빌어먹는 놈이라고 말이다.

 

왕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쌀이란 말이 있다. 그래서 세종은 처음 영화에서 기우제를 올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가 왕이란 허례허식을 벗어던지는 순간 하늘은 감응을 했다. 더 자세한 표현으로 백성을 향한 사랑이 그만큼 깊었다는 의미이다. 사람에게 누구나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답답한 일이다. 누군가 보고 싶어도 그 의미에 대한 정확한 표현을 나타낼 수 없다면 매우 슬플 것이다. 말이란 주술과 같은 힘이 있다. 언어에는 누군가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 담긴 것이다.

 

세종의 마음에 훈민정음은 여러 가지가 담겨져 있다. 정말 그럴까 라는 생각은 하나, 훈민정은 서문의 글자 수가 총 108자이다. 108번뇌 불교에서 말한 인간에 내려진 고통과 절망 그리고 업이란 굴레에서 그 가지 수가 108개란 것이다. 불교를 신봉한 아내를 위한 마지막 진혼곡에서 훈민정음의 성과를 궁녀와 승려들이 모인다. 궁녀는 여성으로 가난한 평민 집안의 딸들이 주로 들어오고, 승려는 미천한 신분을 가진 자나, 혹은 역적의 후예가 세상의 뜻을 잃고 그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신미스님이 중은 사람이 아니라 개로 취급하기에 처음 주상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그런 불경을 저지르면 역적으로 참형을 당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세종은 신미스님은 역적이라 부르지 않았다. 둘 다 백성의 쌀을 축내는 존재라고 여겼다. 영화에서 훈민정음이란 단순히 백성의 소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고려가 망해도 고려의 백성들은 아직 대를 이어 계속 살아가고 있고, 새로운 조선의 백성들도 세상에 드러난다. 이 모두가 나라의 백성인 점에서 그들의 삶이 더 나아지기 바란 것은 임금과 중에게서 서로 이해가 맞는 부분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단어가 나온다. 사대부들은 불교를 억압한다. 중은 현재 사대부들을 거부한다.

 

만일 부처와 공자가 만났다면 그렇게 다투었을까? 백성과 중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본이 뭔지 안다. 그래도 현실의 세계에 어쩔 수 없는 굴레에서 세종은 사대부와 같이 반포하지 않으면 훈민정음이 살릴 수 없다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반포하려니 의리로 자신의 겪을 지켜본 정인지만 그 책을 가져가고, 나머지는 모두 외면한다. 어전이란 공간은 정3품 당상관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다. 당하관은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로지 권력만 생각하고, 명나라 황제의 눈치만 봤다. 작은 중국이란 소중화가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지금도 그런 소중화가 중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 바뀌어 문제지만, 외교란 백성을 협상이지 자신의 안위를 위한 협상은 결코 아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또한 신기한 장면이 나온다. 원래 대군이 부왕을 부를 때 아바마마라고 부르나, 여기서는 아버지라고 한다. 세종도 소헌왕후에게 중전이라 하지 않고 여보라고 부른다. 단어를 보면 우리 언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왕의 위엄을 살리기보단 영화에서 세종이란 그저 어느 인자한 아버지가 왕 자리를 맡아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강조한다. 세종도 자신을 두고 신하에게 그저 힘없고 늙은 임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임금이기 전에 인간이란 사실을 늘 잊지 않은 세종의 모습에서 그가 위대한 임금이란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의 존경하는 위인 베스트 3에 항상 들어가는 인물이 세종대왕, 이순신, 정약용이다. 모두 외로운 싸움에서 자신의 존재를 승화한 인물이다. 옆에 누군가 어느 분은 한국에 만일 외계인이 있다면 저 3명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재능을 보면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훈민정음이 나오고 나서도 사대부들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했으나, 일부 양반들은 훈민정음을 국문학으로 승화시키고, 또한 민중에게도 보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글로 되어 조선독립정신과 대한민국의 시작에서 태동이 되었다.

 

전에 TV에서 까막눈 할머니가 글을 배우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분은 글을 알면 제일 먼저 하고픈 것이 편지를 적는 것이라 했다. 편지에 적은 글은 서툴지만, 의지가 명확했고, 편지를 낭독하는 할머니의 입가는 다른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을 두고 세상을 떠나버린 자신의 남편,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송사였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도 그 말하고픈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그런 마음조차 적어내려 갈 수 없는 게 더 슬펐다는 사연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그런 감동이 나온다. 막내 스님인 학조는 어머니를 몰라도 어머니란 존재를 생각나게 해주는 단어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런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싶고, 그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이란 글자가 백성 스스로 소통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세상을 향해 외쳤다. 단지 영화에서는 신미스님과 다른 스님의 역할이 커서 마치 중들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모습이 되었지만, 산스크리트어나 다른 언어의 참고한 점, 그리고 그런 단어가 불교를 수행한 자들에게 널리 배우는 점에서 인용한 셈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망한 고려가 불교의 나라이든 새로운 나라 조선이 유교의 나라이든 거기에 살아가는 백성은 모두 같은 사람이란 점이다. 결국 영화 <나랏말싸미>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 담긴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헌왕후로 등장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신 전미선 배우님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에서 세종 송강호 씨와 신님스님 박해일의 긴장감을 타는 대립 점을 소헌왕후로 통해 해소하고 새롭게 전환시켰던 점입니다. 시나리오 내러티브에서 갈등과 갈등의 최종 국면은 해결이고, 그것은 큰 위기와 절정에서 비롯되는데, 그 어려운 역할을 전미선 배우님이 했습니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한국사람들이 많이 보시고, 다시금 우리의 언어를 소중히 여기는 시간과 그리고 전미선 배우님의 마지막 연기를 지켜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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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란1 2019-09-20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만화애니비평 2019-10-04 17:00   좋아요 0 | URL
ㅎㅎ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