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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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작가의 전작들을 정말 재밌게 읽었고, 오랜만의 신작이라 엄청 기대하며 읽기 시작.

그런데 뭐를, 어떤 인생을 말하고 싶은 걸까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다.

누군가 유혹하기 쉬운, 뿌리를 확실히 내리지 않은 청년의 모험담 정도일까.

퐁의 대범하고 관대한 제안에 휩쓸려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탕아.

정말이지 지루하게 읽어내고 말았다. 혹시 내가 놓친 무엇이 튀어나올지도 몰라...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으로, 세계를 향해 튕겨져 나온 청년의 이야기는 딱히 끌리지 않았고,
위험한 냄새를 피우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비지니스의 세계, 섹스, 그리고 도처에서 만나는 유사가족이 그려진다.
결국 이건 한 청년의 환타지 충족 스토리인가 싶은 감상만 남았다.


- 누가 내게 가르쳐 준 건데, 대부분의 상황에서 중요한 건 탈출보다 그 상황에 진입하는 방식이다. - 22

- 상대가 퐁이었기에 나는 그를 믿었다. 희망이 솟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진부한 중국 분위기에 혹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는 조화를 생각하라는 서구의 헛소리에 대한 옹호라거나, 아니면 그냥 한심할 정도로 결핍된 나의 핵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내가 퐁에게 쉽게 동조한 건 그가 건넨 말이 자기 그룹에 속한 우리 모두를 향해 보이는 뿌리 깊은 어떤 경향, 근본적으로 너그러운 어떤 경향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퐁은 관대했지만 그건 도덕 때문에, 혹은 상업적 기어에 기름을 치기 위해, 혹은 정신적 편의나 안락함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퐁이 관대한 이유는 무수히 많은 인간이라는 가족에 대해 끝 모를 경이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영원히 음미하고 있었기에.
어쩌면 가능할지 몰랐다. 그렇게 될지 몰랐다.
아마 이걸로 내가, 어느 모로 보나 '그냥저냥' 괜찮은 인간인 틸러 바드먼이 퐁의 초대에 응한 이유가 설명될 지 모르겠다. 보통 나는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가지면 의심한다. 나의 평범함에, 나여서는 안되는 모든 이유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 97

2024. mar.

#타국에서의일년 #이창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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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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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너무 좋아하는 단편집이다.

오랜만의 앤드루 포터.

작가의 나이가 든 만큼 그려내는 인물들도 자연스레 나이를 먹은 느낌의 단편들.

그래서인지 전작에 대한 기대로 읽기 시작했을 때는 조금 재미가 덜하다고 느꼈는데, 독서 진도가 나갈수록 캐릭터들에 녹아들게 되는 자연스러운 에이징의 단계를 밟는 기분이 들었다.
최은영 소설가의 추천사 ' 자기 발견의 기쁨과 고통'이라는 말이 아... 그런 건가 싶달까.

젊음과 함께 이제는 사라져버린 사소한 기억들, 전과 같지 않은 신체와 인간관계들...

중년이 겪을 수 있는 상실에 대해 등장인물들과 함께 되짚어 보다 보면 삶의 우울이 개인적인 문제지만 보편성이 있다는 것을 명징하게 그려낸다.

전작에서 희미하게나마 그려지던 희망적인 부분이 조금 말라 비틀어진채 표현된 느낌.

- 그런데 이제 이렇게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심야의 윤리적 딜레마, 그것도 우리 중 하나가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 나는 그들에게 호응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정당화가 되느냐 아니냐를 따질 일이 아니다. 두 인간과 그들 각각의 가족에게 일어난 아주 슬픈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 말고는 그다지 할 얘기가 없다. - 오스틴, 14

-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 담배, 26

-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 첼로, 92

- 모두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입김을 불고 있고, 우리의 숨결은 안개처럼 공기 중에 서린 채 멈춰 있다.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 - 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 - 그날이 언제였는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ㅏ.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 라인벡, 126

2024. feb.

#사라진것들 #앤드루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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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 - 1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1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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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십 년 전 부터 완독해야지 마음먹었던 책이고, 매번 다른 이유로 7, 8 권 정도까지 읽다 다른 책들로 빠져버리곤 했는데,
올해는 진짜(라고 하지만.... 모르겠다) 완독해야지 싶은 토지.

1권만 한 5번째쯤 재독 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어린 서희, 최 참판 댁의 위세 속에 가려진 최 씨 가문의 비극들, 평사리 주민들이 소개되고 있는 토지의 시작.

격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갈피를 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백성들도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 어찌어찌 생존하고 있는데,
명성황후의 죽음, 일본의 침탈 야욕, 주변국의 어수선함, 동학, 천주교도의 박해 등 온갖 사건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마음이 소란스러운 배경을 보다 보면 암울한 근현대사의 서막을 보는 기분.

- 여 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 서문 중

- 저주를 남기고 굶주려 죽은 과부와 그 자식들 원귀 때문에 최참판댁에 자손이 내리 귀하다는 이런 구전으로 하여 한시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빈한 선비들은 이 마을에 들어서면 강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고래등 같은 최 참판댁 기와집을 외면했고 최씨네의 신도비에 침을 뱉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 많은 재물을 쌓은 이면에는 죄악의 행위가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 287

2024. apr.

#토지 #1부1권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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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레이먼드 카버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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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 단편과 에세이들.

에세이들을 통해 카버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된다.
글을 쓴다는 일에 얼마나 진심인 작가였는지, 그 열망이 와닿는다.

레이먼드 카버의 생애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엮은 책을 읽다 말았는데, 그런 길고 긴 지루한 책보다 카버가 직접 쓴 에세이들을 읽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레이먼드 카버라는 벽돌책을 다 읽게 될런지 그건 모르겠다.

- 일 분 정도 생각에 잠겼다가 공책을 펼치고 비어 있는 하얀 페이지 맨 위에 공허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라고 적었다. 마이어스는 그 글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맙소사, 완전히 쓰레기로군! - 불쏘시개 중

- 내게는 체호프의 단편에 나오는 문장 일부를 적은 3x5 카드가 있다. "...... 그리고 돌연 그에게 모든 게 명확해졌다." 나는 이 단어들에 경이로움과 가능성이 가득함을 발견한다. 나는 이 단어들이 보이는 단순명쾌함, 그리고 은연중에 내비치는 이후 벌어질 사건의 암시가 마음에 든다. 이 문장에는 또한 수수께끼도 담겨 있다. 이전까지는 무엇이 그렇게 불명확했다? 왜 이제는 그것이 명확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무엇보다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그러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가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또렷한 안도감 그리고 기대를 느낀다. - 163

- "시간을 더 들였다면 훨씬 더 나은 글이 되었을 거야." 소설가인 친구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여전히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일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만약 더 잘 쓸 수 있음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애초에 왜 쓴단 말인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과 그 노동의 증거가 아닌가. - 167

- 그러니까 교육을 받겠노라는 욕망과 함께, 내겐 글을 쓰고 싶다는 아주 강한 욕망이 있었다. 그 욕망이 어찌나 강한지 '분별력'과 '차가운 현실' - 즉 내 삶의 '실체' - 이 계속해 나에게 이제 그만둬야 한다고, 이제는 꿈을 버리고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 뭔가 다른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음에도 나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해 글을 썼다. - 196

- 나는 좋은 단편이 보여주는 재빠른 도약을, 종종 첫 문장부터 시작되는 흥분을, 최상급 단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감정을 사랑한다. 그리고 단편소설은 앉은 자리에서 다 쓰고 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한다. (시처럼!) 이는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여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338


2024. mar.

#내가필요하면전화해 #레이먼드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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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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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어 볼 문장이 넘쳐난다.
두 번 정도 되돌아 읽었지만, 아직도 시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겠기에, 틈틈이 다시 읽어볼 만하다.

-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시는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 아래로 쌓여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 7

-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모르는가. 왜 학교에서는 '슬픔학'을 가르치지 않는가. 혼자 공부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런 벽에 부딪힌다. 예컨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뿐이다, 라는 벽. 내가 지금 아는 것은 지금 알 수 있는 것들뿐이어서, 내가 아는 슬픔은 내가 느낀 슬픔뿐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부딪힌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진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다. 이 분야의 열등생으로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펴내기도 했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영원히 알 수 없다면, 영원히 공부해야 한다. - 48

- 그러나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그 시인의 성별이 여성이라면 그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강조하는 편이 옳겠다는 생각을 한다. 설사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을 '존재 일반'의 그것으로 규정한다 할지라도, 읽는 사람 쪽에서는 고통에도 성별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는 뜻이다. - 67

-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아나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 132

2023. aug.

#인생의역사 #신형철 #공무도하가에서사랑의발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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