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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문 - 2010년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박민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0년 1월
평점 :
해마다 신년이 되면 서점에 풀리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기다렸다. 올해는 또 어떤 작가가 수상의 영예를 안을 것인가 하는 기대와 그 작품에 대한 설렘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일은 행복하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은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글자를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책은 항상 내 곁에 있었다. 깊은 겨울 밤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불에 발을 넣고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 소설책들은 대부분이 외국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그 때만 해도 세로줄 책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는데 특히 한 면이 책으로 가득한 이모의 서재는 국민학교 시절 동네 친구의 집에서 다 빌려다가 읽은 오렌지빛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 이후로 가장 근사한 보물창고였다.
그러던 나의 소설의 지평이 더욱 넓어지게된 계기가 바로 이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 전까지 우리나라 소설들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터라(나를 소설의 세계로 이끈 이모의 서구 취향은 나의 문학적 방향을 제한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처음 이 작품들을 접했을 때의 신선함과 행복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저녁의 게임>, <엄마의 말뚝>을 거쳐서 나의 성장과 함께한 이 수상집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작품들을 보면서 꿈을 키우고 어느덧 수상자들의 나이가 나와 비슷해지고 더 나아가 그들의 연배가 나보다 아래인 경험을 할 때 진정한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좀씩 피로를 느끼는 나이에도
마무리 없이 잇달은 나의 문제들
하기야 그런대로 멀어는 갈 테지
안개처럼 언제나
나라는 한없는 서장(序章)처럼
박태진, 안개 중에서
나이를 먹고도 뚜렷한 성취를 이루지 못했던 나의 현실을 직시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꾸준히 사 모으던 책을 작년엔 한 해 쉬었다. 박민규 작가가 수상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동년배에 대한 근거없는 친근함을 갖게 한 그 작가의 작품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참신하다기 보다는 파격적인 소재와 거침없는 표현, 그리고 어쩌면 다르게 보이지만 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펼치기엔 조금은 부담스러운 느낌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 <아침의 문>은 늦게라도 읽기를 잘 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남자와 여자,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하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을 향한다. 인터넷 자살 까페 '천국으로 가는 계단'에서 만난 그들은 처음엔 여섯 명이었다. 그 중 두 명은 울다가 돌아가고 나머지 네 명만이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밟기로 했다. 그러나 화자는 어처구니없게 자신은 이틀 내내 잠만 자고 일어났다는 것을 눈을 뜨고 나서 알게 된다. 화가 난 화자는 편의점에 가서 비스킷을 사 먹고 터덜거리며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다시 천국으로 가는 또 다른 길을 모색한다.
우리의 시선은 편의점에서 만난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임신 막바지이다. 아무도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모른다. 그녀를 임신하게 한 그놈만 빼고, 그러나 그놈은 그녀를 때리고 위협할 뿐이다. 이미 중절할 시기를 놓친 그녀는 세상에 대해서 욕을 하면서 하루하루 버티지만, 그 날은 유난히 강한 통증이 허리를 비틀게 한다. 그녀는 잘 몰랐지만 그것은 출산의 징후다. 어느 곳에도 자기 몸 하나 마음 놓고 뉘일 곳 없는 그녀에게 태어날 아기는 두렵기만하다.
박민규의 시선이 따뜻한 것은 그래서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자리한 곳이 차가운 시멘트 위인 아기에게나, 두렵고 피하고 싶으면서도 그 아기가 기형일까봐 걱정인 그녀에게나, 이젠 그만 동그란 문으로 자신의 목을 들이밀고 싶었던 그에게나 그 날 아침 햇살은 참으로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희망이라든가, 이상이라든가 혹은 정의 같은 말들에 감격하고 흥분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세상은 너무 춥고 너무 쓸쓸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탓이다. 그러나 가끔씩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한 사람을 볼 때 울컥하는 마음이 든다거나 할 때 아직도 우리의 마음 속에 따뜻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작품이 나에게 하늘을 다시 한 번 볼 여유를 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