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세일즈맨>감상. 이란 태생인 파르하디 감독은 2011년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베를린 영화제 그랑프리에 이어 <세일즈맨>으로 2016년 칸 영화제 각본상, 남우주연상 등 국제적으로 굵직한 상을 수상한바 있다. 사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놓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파르하디 감독은 사소한 사건 하나만으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주제는 '용서와 복수'.

흔히 종교는 자비와 용서를 너무 쉽게 말하지만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서 보듯 결코 값싸게 베풀어져선 안 된다. 당사자의 아픔을 제 3자가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일즈맨>에서 남편 에마드는 끝내 복수를 고집하지만 성폭력 피해 당사자인 아내 라나는 용서를 주장한다. 이게 가능할까? 과연 아픔을 지닌자가 어떻게 용서를 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에마드 부부의 상반적인 주장에 대해 어느 한 쪽에 동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파르하디는 용서쪽으로 기운다. 흔히 하는말로 복수는 다시 복수를 부른다고 경고하며,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을 당했다하더라도 용서를 통해 구원 받으라고 종교는 말한다. 하지만 파르하디 감독은 이런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논리인가. 인지상정, 그냥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태도가 복수와 용서를 구분하는 척도다. 가령 초반부의 택시 내부에서의 에피소드를 보자.

에마드와 그가 가르치는 학생, 어느 중년 부인이 택시에 동승한다. 학생은 운전수 옆 좌석, 에마드와 낯선 중년 부인은 뒷좌석이다. 한동안 달리던 차 안에서 부인은 갑자기 운전수에게 앞자리 학생과 자리를 바꾸겠다고 한다. 옆좌석 에마드의 다리가 자꾸 밀착돼 불편해서다. 더이상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관객은 에마드와 부인간에 뭔가 불편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다.

스치듯 가벼운 장면이지만 감독은 뭔가 남녀간의 어떤 도덕적인 문제이거나 다른 무엇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런 정도야 그냥 보통사람간에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따져보면 에마드는 선생 신분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바로 앞좌석에 있는 상태에서 초면의 부인에게 결례되는 행동을 한 셈이다. 감독이 굳이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관객은 에마드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다만 그런 에피소드는 보통 사람간에 흔히 일어 날 수 있는 가벼운 도덕적 하자일뿐이다. 바로 이점이 보통 사람간에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부도덕적인 문제인데, 바로 에마드의 아내 라나 역시 그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라나를 성폭력하려했던 노인의 우발적인 행동 전모를 알게된 관객은 과연 어떤 입장이 될까. 파르하디 감독의 입장은 라나가 대변하는 셈인데, 그녀는 노인의 행동을 우발적인 보통사람들의 성충동으로 여기고 결국 용서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을 우발적으로 할 수 있고, 그런 범죄는 비록 있을 수 없는 악한 행동이지만 특별한 범죄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 사람도 어느순간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거다. 문제는 이때 범죄자가 국가적 폭력이라든가, 흉악범이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것. 바로 그래서 라나는 용서를 주장한다. 이런 태도는 무슨 종교적인 거창한 용서나 자비의 행위라든가, 철학적, 도덕적인 어떤 심오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거듭말하지만 단지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선택이자 행동이라는 것. 

파르하디 감독에 의하면 택시 안에서의 에마드가 그렇듯 보통 사람들은 언제든 죄를 저지를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어떤 순간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종교인도 아니고 어떤 수행승도 아닌 사람이 이런 우발적 행동을 했을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비록 쉽지 않은 선택이지만 복수가 아닌 용서를 해야한다는 게 이 영화가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이자 보통 사람들의 도덕관이자 삶의 태도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아이러니하고 이중적이기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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