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형석. 정확히 말하면 미셀러니, 즉 신변잡기 전문의 한국형 수필가. 요즘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쓰고 <인간극장>이라는 프로에까지 출연하며 한창 방송가를 뜨겁게 달구는 중이다. 오늘 마침 시골에 갈일이 있었는데 테레비 위력이라는게 얼마나 대단한지 동네 할머니까지 김형석을 운운하고 있었다.  

김형석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가늘고 길게 살자'. 이쪽 저쪽 눈치보며 몸보신 잘하면 오래 오래 길게 살 수 있다. 다만 하나 걸리는게 있는데 '지식인'이라는 껄끄러운 단어다 하지만 뭐 문제될거 없다. 지식인에게는 늘 '글과 행동'이라는게 상관관계처럼 따라다니지만 까짓 글이 바로 행동이니 시국이야 말아먹든 말든 모르쇠로 줄창 글만 쓰면 된다.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 나오는 윤직원 영감이라는 자가 있다. 민중들이야 굶어죽든 말든, 일본놈들에게 쳐맞든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 내가 편한데 이런 세상 얼마나 좋은가, 태평천하가 아닐 수 없다.  

글쓰기, 얼마나 멋지고 폼나는가. 나는 비록 이렇게 살아도 너희는 저렇게 살아라. 나는 비록 내 가족, 내 한 몸 건사하기 바쁘지만 너희들은 이웃 사랑하고, 민중 사랑하고, 어쩌고 저쩌고...이런 부류는 자기 합리화에도 능하다. 폭력과 고문이 난무하고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70, 80년대를 통과하며 이땅의 생각있는 지식인들은 직장 잃고, 가족 잃고, 감옥에서 고문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병들고 힘겹게 살아갔다.

 

하지만 김형석 같은 부류는 이런 지식인들을 급진 좌파, 폭력을 추종한다고 차갑게 외면했다. 또다른 지식인들, 가령 입으로만 맑스를 찬양하고 떠들어대는 강단 좌파를 향해 김형석의 부류들은 이렇게 일갈한다. 나는 맑스 대신 교양을 내세운다. 입으로 떠드는건 니나 내나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김형석이 내 앞에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장수의 대명사인 100세를 살아보니 어떤가. 사이코 노망난 국부 이승만, 파시스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돈에 걸신들린 이명박, 천하의 멍청이 박근혜가 판치는 세상이 정말 태평천하든가? 

 

지구상 유일하게 땅이 둘로 동강난채, 지난 70년 깡패한테 된서리를 맞고도 죽어라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저 식민지 백성이 판치는 세상이 정말 태평천하든가? 소시민인 나도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게 무엇인지, 지식인의 양심, 지식과 행동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늘 괴롭고 힘든데, 소위 만천하가 알아주는 철학자 김형석, 문학청년, 청소년, 대한의 아줌마들 모두가 존경하는 당신은 정말 잘 살았는가? 가늘고 길게 사는게 정말 최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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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터 뒷산에 아득한 솔숲이 우중충하게 그늘진 밑으로 마을 초가집들은 선경과 같이 은은히 안겨 있다.
조각달은 어느덧 서천에 기울어졌는데 딱따구리는 뒷산에서 울고 소쩍새는 동구 앞 느티나무 속에서 운다. 고요한 이 밤에 한줄기 시냇물이 은파를 번득이며 들 가운데로 감돌아 흐르는데 큰 내의 여울물은 바다같이 훤하게 남쪽으로 트여 있다."  - 이기영의 <고향>(문학과지성사) 184쪽

이기영의 장편 <고향>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중반이니 나의 어린시절인 1960년대 중반과는 40년이라는 적지않은 시차가 있다. 따라서 물리적인 시대 배경은 물론이려니와 식민지 체제하에서 가난과 억압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린 20년대 농촌 풍경을 60년대와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작가가 묘사하는 농촌의 자연 풍경과 농민들의 삶의 애환만큼은 거리를 뛰어넘어 어린시절에 보던 농촌의 모습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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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해가 끝나간다. 어쨌든 열심히 달려왔으니 후회할건 없다. 다만 중요한건 오늘, 지금이며 다시 돌아올 내일이다. 내 앞가림만 하느라  허겁지겁 살았다. 새로운 해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것. 일단 내게 주어진 능력, 내가 처한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다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싶은 것은 무엇일까. 늦기전에 이것부터 시작하자. 현재로서는 <칸투스독서회> <인문산책> <칸투스오케스트라> 세 가지 모임이 중심이자 출발점이다. 오케스트라는 하던대로 잘 진행될테고, 2년차로 접어든 독서회, 이제 막 시작한 인문산책은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어야한다. 우선 나부터 준비를 착실하고 꼼꼼하게 하자. 과욕이나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하던대로 그저 쉬엄쉬엄 걷자. 하다보면 새로운 방법이 나올테고, 이런 방법조차 내가 아닌 회원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나는 앞에서 이끌게 아니라 뒤따르며 적절한 방향을 조율해주면 된다.  

2
책 구입은 자연스런 지적욕구의 분출이고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젊은시절은 책에 특별한 의미부여를 했다. 하지만 책도 세상의 수많은 물건 가운데 하나이니 책을 소유하고싶은 욕망만을 따로 구분해서 정신적이다, 지적이다 하며 치장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서가, 애서가들은 책 구입 행위를 좀 다르게 여긴다. 책은 일반적인 물질과 달리 정신적인 분야에 속하고, 지식과 마음의 양식을 채워주는 것이니 물질욕과 다르다는거다. 뭐 이렇게 주장한들 누가 뭐라 할 사람 없겠지만 좀 억지스런면은 있다.       

문제는 과도한 책 구입이 오히려 심도있는 독서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컬한 일인데, 많은 책이 오히려 책 읽기를 방해한다는게 얼핏 이해가 안 되지만 따져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다. 왜 그런가.

가령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책상과 서가에 잔뜩 있는데도 또 다른 책이 쌓여간다고 하자. 그럴때마다 마음은 급해진다. 얼른 책읽기를 마쳐야 다른 책을 손에 들 수 있다. 미처 읽지 않은 책이 있는데 새로 구입한 책이 도착하면 죄의식이 들기도 한다. 과소비, 지나친 욕심 같아서다. 그래서 급해지고, 건성으로 페이지를 넘기기도한다. 얼른 읽어야 다른 책을 읽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어떤가. 이쯤되면 분명 책 구입도 세상의 하고많은 소유욕, 물질욕과 하등 다를바 없지 않겠는지.

그래서 결정한건데, 내년 한 해 책 구입을 잠시 중지해보기로 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시작해보자. 당분간 기존의 소유한 책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직 첫 페이지도 안 넘긴 책이 수두룩하니 우선은 그렇게 해도 별 문제 없을듯싶다.  

3
더 이상 장문의 글을 쓸 능력이 없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무엇보다 필력이 딸려 힘에 부친다. 당장은 글쓰기 훈련이 습관적으로 안 된 탓도 크다. 거기다 상상력 또한 무뎌졌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 열정 또한 사그러들었다. 희미하게 소진되어 가는 화톳불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현실이 아쉬울것 없다. 그냥 오롯이 인정하고 가능한 능력 범위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면 그만이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했는데 대체 무슨 아쉬움이 있을까. 일기쓰듯 끄적이는 자투리 낙서, 생활 일기로 만족할 것. 또 하나. 예나 지금이나 딜레탕트였음을 잊지말것. 

4
계속 할 수 있는것, 이쯤해서 포기할 것, 적당한 균형감각을 유지할 것, 천천히 가야할 것, 더 빨리 가야할 것은 무엇인지 두루 생각하자. 뱃생활 30여년, 사무실 생활 10년, 독서실 8년. 스무살부터 내리 45년여를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60중반. 욕심을 내본들 소용이 있겠는가. 뭘 더 바랄까. 이만하게 누렸으면 충분하다. 더 바랄게 없으니 쉬엄쉬엄 느릿하게 걷자.

5
한 마디 말, 행동거지 하나라도 허투루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행여 의도치 않은 말, 행동으로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조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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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소위 하드보일드 문체로 불려지는 헤밍웨이의 판박이다. 이 소설은 외형적으로 서부극과 스릴러 장르를 취하지만 '자본주의의 우화'라는 야심찬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 심오한듯한 경구, 혹은 짧은 대화체를 삽입함에도 불구하고, 작품 수준은 평범한 대중소설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원작을 영화화한 코엔 형제의 동명 영화가 차라리 뛰어나고, 원작을 거의 손상없이 영상으로 옮긴 코엔 형제의 영화가 성공한 것은 전적으로 하비에르 바르뎀(안톤 시거 역)의 뛰어난 연기 덕분이다. 아래의 시는 코맥 매카시가 소설 맨 앞 장에 인용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이다.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 W. B 예이츠
    
저 곳은 늙은이가 살 나라가 못된다. 서로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 나무의 새들
- 저 죽어가는 세대들- 은 노래 부르며,
연어 폭포, 고등어가 우글대는 바다,
물고기, 짐승, 또 새들은 온 여름 내내 찬미한다.
온갖 잉태하고 태어나고 죽는 것을.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모두가
늙지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소홀히 하고 있다.
    
늙은이는 그저 하나의 하챦은 물건,
막대기에 걸쳐놓은 다 헤진 옷, 만일
영혼이 손뼉치며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유한한 옷의 조각 조각을 위해 더욱 더 소리높여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또한 거기엔 영혼의 장려한 기념비를 공부하는
노래 학교만이 있다.
그래서 나는 바다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항해해왔다.
    
오 마치 벽의 금빛 모자이크 속에 있는 것처럼
신의 성스러운 불 속에 서있는 성인들이여,
성화로부터 나오라, 감돌려 내려오라.
그래서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라.
나의 심장을 삼켜라, 욕망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동물에 얽매여
심장은 스스로가 뭔지 알지 못하니, 그리고 나를
영원한 예술품 속에 넣어다오.
    
한번 자연을 벗어나면 나는 결코
자연을 닮은 육체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리라.
오직 희랍 금 세공공이 졸리운 황제를 깨어놓기 위해
혹은 비잔티움의 귀족과 귀부인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노래해 주도록 황금 가지 위에 않혀놓은
쳐늘인 황금 혹은 황금 에나멜로 만든
그러한 형상이 되리라.

 


         
 

 

현기영의 단편 <순이 삼촌> <아버지> <길>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륭 이야기> 등 제주 4. 3항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읽다. 소설을 읽기에 앞서 도올 김용옥 교수의 '여순 항쟁'과 '제주 4. 3항쟁' 강연, 주철희 박사의 '여순 항쟁' 관련 강연이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현대사에 속하는 여순항쟁과 제주 4. 3 항쟁은 나뿐 아니라 아마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잘 모르는 실정이다. 그도그럴것이 반공과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온 과거의 권위주이 정부는 소위 '빨갱이'라는 단어를 금기 중의 금기어로 맨 앞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여순항쟁'과 '제주 4. 3항쟁'의 참상을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그동안 관련 단체의 많은 노력이 있어왔지만 솔직히 최근까지도 전문 학자들조차 자기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 제약없이 연구하고 대중들에게 알리는 작업은 지금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두 항쟁에 대한 언론과 지역사회의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데, 먼저 도올 김용옥 교수와 주철희 박사의 강연이 비교적 대중들이 이해하기에 쉽고, 전문가의 저서로는 '여순항쟁'을 연구한 주철희 박사의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디자인 흐름)가 추천할만 하다. 아울러 제주 출신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과 지난 90년대 후반에 출간된 현기영의 <순이 삼촌>(창비 출간)을 비롯한 몇몇 단편도 '제주 4. 3 항쟁'을 이해하는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주말 저녁 EBS TV <한국기행>을 시청하고 있자니 마침 제주도 화산성 편을 방영하고 있다. 화면 가득히 펼쳐진 제주의 평화로운 농촌 풍경. 밭일 하는 농부들이 어린 당근을 솎아내고 있다. 해녀들의 물질, 밭에 돌담쌓는 장면도 연이어 나온다. 아, 중산간 마을도... 해안가 5킬로 내륙쪽은 모조리 불태워졌다는 그 중산간 마을......육지의 흔한 여느 농촌마을처럼 평화로운 농촌 풍경인데도 불구하고 문득 처참했던 '4. 3항쟁'의 광경이 오버랩된다. 평소에 보던 익숙한 관광지 제주가 아니라 70년전 상흔으로 얼룩진 제주가 연상되는거다. 

아직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제주. 주철희 박사 말마따나 역사 서술을 비롯한 모든 공적 기록은 '사건'이 아닌 '항쟁'으로 명확하게 인정되어야 하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공권력의 민중에 대한 속죄는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게 진정한 '제주 4. 3항쟁'이 역사 속에서 바로 서는 일이 될테니 말이다.

* 중산간 마을

한라산 자락이 뻗어내려오다 평지 지형을 이루면서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해발고도는 100~300미터 가량이다. 바닷가에 해안마을이 있다면, 한라산 자락 사람이 살 만한 초지에 자리잡은 마을이 중산간 마을이다. 중산간 마을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더 올라가면 사람이 살 수가 없고,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면 바다에 기대서 살아가는 해안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중산간의 사람들은 주로 목축과 농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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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청춘시절부터 이 나이까지 평생 소설을 읽어왔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이해 안 되는 작품들이 몇 몇 있다. 가령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박상륭의 <칠조어론> 등이 그런 경우인데, 아직도 못 읽은 작가들이 많으니 굳이 난해한 작품에 연연할 필요없지, 하면서도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늘상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이해력이 짧은 탓인지 과거에 이미 접한 작품도 60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조이스, 프루스트도 언젠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하는 기대감은 버리지 않고 있다. 한데 문제는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같이 특별한 경우다. 도대체 한 쪽 읽기도 버거운 소설이라니! 그동안 어렵네, 어렵네하고 푸념한 <율리시스>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이들 작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 아닐까싶다. 그러니까 세상의 그 어떤 소설도 언젠가 도전하면 이해 가능하리라 생각되지만, 앞의 몇 작품들만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거다.      

불가능! 그런데도 미련이 아주 사라지지 않은건 <피네간의 경야> 기존 번역을 개역한 김종건 교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 때문이다. “개역과 주해를 끝내고 몹시 앓았어요. 이가 흔들리고 고열이 오르는 등 고통이 심했지요. 그러나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20세기의 걸작이라면 ‘피네간의 경야’는 포스트 모던 시대인 21세기의 걸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지요. 이 작품에 도전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젊어지는 기분이 들었지요.”  정말 그럴까?

 

 

오랜만에 들른 서평가 이현우의 블로그 <로자의 저공비행>에 마침 이들 작품에 대한 짦은 코멘트가 있어 옮긴다. 코멘트 중 "심오해서가 아니다. 그냥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이런 말을 전공자가 좀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런 말 했다간 당장 밥줄이 끊길테니.....   

" 나는 조이스가 <율리시스>(1922) 정도에서 멈추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걸작이라고 부른 ‘괴물‘ <피네간의 경야>(1939)는 우주의 언어로 쓰였다는 말 그대로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하거나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도단‘의 여실한 사례가 아닐까.

조이스 전문가로서 김종건 교수가 학자로서의 일생을 바쳐서 이 작품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였지만 결과를 놓고 보건대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번역의 불가능성 내지 무의미성을 보여주는 게 <피네간의 경야> 번역이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숱한 신조어를 옮기기 위해 역자는 생경한 한자어를 무수히 동원하는데 그로 인해 이 작품은 한글 번역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국한문혼용체 소설이 되어버리고 만다. 한자 병기를 생략하고 초반부를 읽어보자.


사랑의 재사, 트리스트람경, 단해 너머로부터, 그의 반도의 고전을 재차 휘두르기 위하여 소유럽의 험준한 수곡 차안의 북아모리카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니 오코노의 흐르는 샛강에 의한 톱소야의 암전이 항시 자신들의 감주수를 계속 배가하는 동안, 조지아주 로렌스군의 능보까지 아직 지나치게 쌓지 않았으니 뿐만 아니라 원화로부터 혼일성이 ‘나 여기 나 여기‘ 하고, 풀무하며 다변강풍으로 패트릭을 토탄세례하지 않았으니 또한 아직도, 비록 나중의 사슴고기이긴 하나, 아직도 피의 요술사 파넬이 얼빠진 늙은 아이작을 축출하지 않았으니, 비록 바네사 사랑의 유희에 있어서 모두 공평하였으나, 이들 쌍둥이 에스터 자매가 둘 혹은 하나의 나단조와 함께 과격하게 격노하지 않았나니, 아빠의 맥아주 한 홉마저도 젬 또는 셴으로 하여금 호등으로 발효하게 하지 않았나니, 그리하여 눈썹 무지개의 붉은 동쪽 끝이 바다 위에 반지마냥 보였을지라. - <복원된 피네간의 경야>,3쪽

<피네간의 경야>는 원어민들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치부하며 독자보다 박사학위자가 더 많다고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한 문장을 예시했지만 우리말(?) 번역으로도 당연히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심오해서가 아니다. 그냥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박상륭의 <칠조어론>이 이에 견줄 만한 사례라고 할까). 원문으로야 소수의 독자가 심오한 무엇을 찾아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투의 문장을 600쪽 넘게 읽고, 거기에 딸린 12000개가 넘는 주석을 읽어야 한다는 건 고문에 가깝다(책값은 48000원이다).

<피네간의 경야>가 심오한 걸작이라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한들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작품이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의미는 조이스가 문학의 막다른 길, 문학의 벼랑을 보여주었다는 것. 덕분에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그 벼랑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물론 그럼에도 남들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 벼랑길로 가보려는 독자도 있으리라. 나는 이쯤에서 그들을 배웅하고자 한다. 내가 동행할 수 있는 조이스는 <율리시스>까지만이다. 그 정도만으로도 조이스의 다이달루스적 기예는 충분히 훌륭했다. 추락의 기예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 이현우 <피네간의 경야>와 조이스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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