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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도 1월중 첫번째 토론작은 현기영의 소설집 <순이 삼촌>(창비)입니다. 창비판 현기영 전집 제 1권인 <순이 삼촌>은 작가의 초기 중,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으로 대부분 제주 4. 3 항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순이 삼촌>을 마치면 다음 작품으로 최인훈의 <광장>읽을 예정인데, 두 작품 모두 한국현대사의 정치적, 역사적 상황을 정면으로 조명한 최고의 소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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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 모임은 더없이 흐믓하고 즐거웠습니다. 특히 강세희 샘까지 함께해주셔서 뜻깊었지요. 모쪼록 내년도 알차고 유익한 독서회가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올 첫번째 토론작인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작품을 읽기에 앞서 제주 4. 3항쟁을 전후한 역사, 사회적 배경을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4. 3 항쟁 관련 강연들이 유튜브에 있으니 시청 부탁드립니다. 먼저 도올 김용옥 교수의 <제주 4. 3을 말한다>(KBS제주), 여순 항쟁 전문가인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의 <제주 4. 3 항쟁과 여순항쟁의 재해석>, 박찬식 박사의 <4. 3의 역사적 진실> 등 세 강연이 참고할만하고, 제주 출신인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도 함께 감상하시면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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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쌀쌀하군요. 성탄절에 송년맞이까지 회원님들 모두가 분주한 하루하루일것 같은데요, 와중에 책 읽을 시간은 좀 있으실런지.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현기영의 <순이 삼촌>에 수록된 작품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해방후부터 6. 25 한국전쟁까지의 제주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 오멸 감독의 <지슬>은 중편 <순이 삼촌>과 거의 흡사한 내용이거나 배경입니다. 이제 다음 주면 모임인데요, 읽어야 할 작품들이 많으니 늦기전에 슬슬 발동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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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주가 지나갑니다. 모두들 잘 지내시죠? 공지사항 한 가지 전합니다. 중, 단편집 <순이 삼촌> 경우 수록 작품을 모두 읽으면 좋겠지만 연말이라 시간 여유가 없을 테니 제주 4. 3항쟁이 주요소재인 다음 다섯 작품만이라도 꼭 읽으시길 부탁합니다. <순이 삼촌><길><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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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현기영의 <순이 삼촌>과 차기 작품인 최인훈의 <광장>은 역사와 정치를 주제로한 비교적 무거운 소설들입니다. 으레 소설하면 남녀간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한 분위기가 얼른 떠오르는데요, 그렇잖아도 머리 아프고 복잡한 세상, 새해 벽두부터 정치니 역시니하며 심각한 소설을 읽으라고 하니 새삼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말이죠. 하지만 몸에 좋은 약은 원래 쓴법이어서 좀 참고 읽다보면 세상 보는 시야가 넓고 깊어질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럼 휴일 잘 보내시고 담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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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월 중순을 향해가지만 아직은 따뜻한 겨울날씨. 비가 오려는지 흐릿하다. 오전에 아르방 중심으로 트럼펫 연습 1시간.  오후녘 아내와 함께 Y씨댁에서 커피 한 잔 하다. Y씨의 드립커피 솜씨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4시경 귀가. 2층 영화감상실에서 오디오를 틀다. 패티 김의 노래 한 곡, 루스 브라운의 <What a wonderful world>을 감상하다. 오랜만의 느긋한 시간. 맘 같아서는 아무 글이라도 써질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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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 시청.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는 차치하고 우선 비권위적인 태도, 잰틀한 모습이 호감이 간다. 감정을 앞세운 비합리적 선동과 흥분, 큰목소리와 날선 감정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만한 대통령을 가졌다는게 참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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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긴 글, 심도있는 글쓰기, 무거운 책을 읽긴 힘들다. 시간, 이해력, 열정까지 모든게 갈수록 저하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적인 활동, 공부를 중지할 수는 없다. 주어진 여건을 감안할뿐 가던 길 멈춰서는 안 된다. 비록 단문, 단상의 형태라도 글은 지속적으로 쓰고, 책 전부를 통독하지는 못해도 일부만이라도 꾸준하고 꼼꼼히 읽다보면 대강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안제이 바이다의 <당통>을 감상하고나서 알베르 마띠에의 <프랑스 혁명사>(창작과비평사)와 노명식 교수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꼼뮨까지>(까치)를 당차게 펴들었지만 불과  몇 쪽씩밖에 읽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를 후회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읽고 공부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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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소설을 읽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아직도 읽지 못한 한국소설 작품이 수두룩하다. 이제사 펴든 최인훈의 <광장>과 헌기영의 <순이 삼촌>만해도 그렇다. 그나마 <광장>은 언젠가 읽은듯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내용이 거의 생각이 안나니 안 읽은거나 마찬가지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은 지난 70년대에 이문구, 김정한, 황석영 등의 소설작품과 함께 창비쪽에서 리얼리즘의 수작으로 내세운 대표작이지만 최근에야 겨우 읽는 중이다. 그동안 불문학이니 영문학이니 하며 외출이 잦았는데 당분간 우리 작품들쪽으로 시선을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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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빈방 하나를 모임방 겸 음악감상실, 전기판넬이 깔린 다른 하나는 영화감상실로 개조했다. 독서실 이용자가 많을때는 혼자 방을 쓴다는게 사치스러워 고민되었으나 요즘처럼 방치된 빈방일 바에야 나라도 이용하는게 나을듯싶어서다.

비용 아끼려고 전지니, 광목이니 주접을 떨다가 결국 120인치 체인형 스크린을 8만원에 구입했다. 스크린 부착, 전원 연결하고, 15년전에 구입한 구형 프로젝터도 셋팅하고나니 제법 감상실티가 난다. 오랜만에 영화를 감상하려니 감개무량하다. 돌아보면 결국 독서실 시작하면서 모든 지적모임과 활동이 끊어졌다.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대략 2006년부터 2009년까지의 나운동 지하 서재시절이었다.    

600여개의 DVD가운데서 최종 선택한게 안제이 바이다의 <당통>. 안제이 바이다는 폴란드 태생의 좌파 감독인데 <당통>과 <재와 다이아먼드>를 오래전에 구입했지만 <재와 다이아먼드>만 감상한적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역사가 알베르 소불에 따르면 당통은 "서민적인 말투의 웅변가이며 수수한 차림새, 현실주의자이며, 결단을 내릴 줄 아는 동시에 술수에도 능하고, 배짱이 있고 향락적인 기질이며, 격정적이며 모질지 못한 인물" 이고 안제이 바이다는 영화 <당통>에서 "따뜻한 인간성으로 혁명의 냉정함을 녹여 버"린 인물로 묘사한다. 즉 안제이 바이다의 <당통>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전하기 보다 당통의 인간적인 면을 강하게 부각시킴과 동시에 긍정적인 혁명가로 묘사한다.   

안제이 바이다의 <당통>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로베스피에르는 영화와 달리 역사적으로 "냉철한 성격과 대담한 용기, 예리한 통찰력과 사람들을 압도하는 웅변, 탁월한 조직력과 완전한 공평무사 - 이러한 것들이 로베르피에르의 희귀한 개성이었다. 그의 개성이 이제 공안 위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상퀼로트의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이 되었다. 민중은 그를 절대로 부패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인물이라고 불렀다." 라고 평가한다.(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콤뮨까지>, 까치)

하지만 노명식은 장차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추진될 '공포정치'를 서술하는 장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인간이란 합리주의자들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인간 역사도 그렇게 합리적으로 진보만 하는 역사가 아니다. 더구나 혁명과 전쟁과 내란이 뒤범벅이된 마당에서는 한결 더 인간 이성은 흥분과 광기에 압도될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 혁명....>106쪽)

그렇다면 안제이 바이다의 <당통>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된 당통은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을까. 다소 장문이지만 노명식의 저서 일부를 다시 인용한다.   
"당통은 동인도 회사 뇌물 사건의 공범자이고 온갖 기회를 이용하여 거액의 돈을 모아 호사한 생활을 즐기는 부패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다. 비요- 바렌느는 당통을 모든 반혁명의 초점이라고 규탄하였다. 당통은 로베트피에르에게 자기의 청렴과 애국심을 눈물로 호소하여 직접 자기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로베르피에르는 당통의 회개이 눈물을 보고 체포를 지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통 파는 베스터만을 중심으로 하여 로베스피에르 파에 대한 역습을 기도하다가 오히려 공안위원회에 체포되었다.

생쥬스트는 당통 일파의 뇌물 사건의 공범 관계만이 아니라 당통의 더로운 과거를 낱낱이 고발하였다. 미라보와의 음모, 루이 16세와의 암거래, 반역 장군 뒤물리에와의 음모, 지롱드 파와의 타협, 8월 10일 사건과 지난 5월 31일 가건 등 위기가 있을 때마다 취한 수상쩍은 행동들, 루이 16세와 왕족의 구명 운동, 적국과의 비밀 강화교섭의 교활한 반역 행위, 모든 혁명 수단에 대한 음흉한 반대, 파브라나 샤보 같은 사기꾼들과의 공범, 외국인 혐의자들과의 깊은 교제, 혁명 정부에 대한 비난 공격 등 그 고발의 내용은 과시 혁명의 역사 전부였다. 이 생쥬스트의 고발은 오랫동안 과장된 된것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사료들이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모두가 진실이었다. "  -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콤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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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속의 혁명, 혁명 속의 인간

안제이 바이다의 <당통>/ 임지현(서강대 사학과 교수) 

안제이 바이다는 소수의 매니아들을 제외하면 한국의 영화팬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겠다. 그러나 전후 폴란드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한 '노동자 영웅'의 부상과 몰락을 통해 현실 사회주의가 노동자를 어떻게 착취하고 버렸는가를 그린 <대리석 인간>이나 연대노조 운동을 그린 <철의 인간>은 실로 리얼리즘 영화의 압권이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당통>이 소개되었다는 데, 작은 안도감을 느낀다.

바이다의 영화 <당통>이 지닌 매력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로 대변되는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 있다. 바이다는 몇 년 전 폴란드 신문 <가제타 뷔보르챠>와의 인터뷰에서, 연대노조운동에 참여하면서 운동 지도부의 다양한 성격들을 목격했고 그 혁명가 군상에 대한 운동적 반성이 아닌 인간적 반성이 이 영화를 만든 동기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그러니까 연대노조운동의 프리즘을 통해 프랑스 대혁명을 재조명한 것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오늘날의 사람들로 비추어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역사가 소불은 당통을 "서민적인 말투의 웅변가이며 수수한 차림새, 현실주의자이며, 결단을 내릴 줄 아는 동시에 술수에도 능하고, 배짱이 있고 향락적인 기질이며, 격정적이며 모질지 못한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섬세하게 연기한 당통의 이러한 성격은, 금욕적이고, 냉정하며, 맺고 끊는 게 확실해야 하는 혁명가로서의 덕성과는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드파르디외가 연기한 당통의 자유분방한 태도는 부르주아적 퇴폐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인간 당통이 혁명가 당통을 압도한다.

폴란드의 유대계 배우 프쇼니악은 차갑고, 선병질적이며, 금욕적이고 원칙주의자인 로베스피에르를 연기한다. 당통이 초대한 거창한 저녁식사에서, 민중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르는 단호하게 호사한 음식과 고급 포도주를 거부함으로써 금욕적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특히 법정의 민중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사자후를 토해내는 당통과는 대조적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국민공회 연설은 치밀하게 계산된 차가운 이성의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부각되는 것은 인간 로베스피에르가 아니라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이다.

당통이 따듯한 인간성으로 혁명의 냉정함을 녹여 버렸다면,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인간성을 종속시켰다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이미지이다. 이 영화에서 바이다가 선호하는 혁명가는 당통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바이다는 로베스피에르를 귀감으로 삼고 있는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큰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영화가 반혁명적이며, 역사를 왜곡했고, 로베스피에르의 역사적 의의를 깍아 내렸다는 것이 그들의 항변이었다.

내 나이 20대에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도 이들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평가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민중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고급스러운 맥주를 마실 수 있냐며 소주병에만 코를 박고 있던 치기어린 나로드니끼였고, 혁명만 일어나면 세상이 쉽게 바뀔 수 있다고 믿었던 순진한 낭만주의자였다. 필요하다면, 인간도 기꺼이 혁명에 종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만만하게 본 나이가 아니었나 싶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영화를 30대 후반에 처음 보았다. 세상이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갈 나이였고, 로베스피에르보다는 당통이 더 삶을 잘 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40을 훌쩍 넘기고도 불혹은커녕, "나는 유혹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를 되새길 때가 많다. 완벽한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보다 건달(?) 혁명가 당통이 내 마음에 더 다가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혁명이 인간적인 약점까지 넉넉하게 보듬을 수 있었으면 하는 한가한 생각도 한편에는 있다.

성공한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약점은 인간적인 약점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완벽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한 혁명가로 남을 뿐이다. 그런데 왜 약점이냐고? 이들은 남들도 자신들처럼 혁명에 헌신적이고 완벽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혁명적 비극의 씨앗이 된다. 혁명이 인간을 전유해버리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냉정한 혁명가 로베스피에르보다는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그래서 혁명가로서는 다소 어설픈 당통이 더 큰 혁명가라는 느낌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성공한 혁명가보다 실패한 혁명가를, 역사가로서 더 높이 평가할 수는 없다는 데 내 고민이 있다. 영화 <당통>의 기억이 있는 한, 평생 따라다닐 고민이다.    -  2003. 9. 1 

 * 후기
<당대비평>문부식 주간과의 술자리에서였다. 이 글이 발표된 직후였을 텐데, 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이거 자기 정당화하려고 쓴 거지"라고. 나는 내 자신보다는 그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되받았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술만 들이켰다. 술이 깨고 난 아침, 장난기 섞인 우리의 대화 밑에는 쉽사리 지울 수 없는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그 며칠 후 막 도착한 London Review of Books에서 그 막연한 느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연치고는 묘하게도, 힐러리 민츠인가 하는 여성 역사가가 쓴 프랑스혁명에 대한 에세이 서평을 발견한 것이다. 남성 역사가들이 로베스피에르보다는 당통을 인간적으로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그녀의 통렬한 지적에 한방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그녀가 지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트위드 재킷' 속에 숨은 남성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숫총각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 만큼 금욕적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비해, 남성으로서의 세속적인 즐거움을 모두 누렸던 당통이 남성 역사가들에게는 당연히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그녀의 지적 앞에서 나는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깊은 속내를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바이다의 영화에도 그녀의 지적은 해당된다. 영화 <당통>의 원작이라 할 스타니스와바 프쉬비셰프스카가 쓴 연극대본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헌사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심지어 프쉬비셰프스카는 로베스피에르가 죽은 나이인 36세에 거의 의도적으로 굶어 죽었다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바이다는 당통을 부각시킴으로써, 원작자의 의도를 뒤집었다는 것이 힐러리 민츠의 비판 요지였다.

물론 내 자신도 그러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점에서, 내 안에 감추어진 남성성은 뿌리칠 수 없는 원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나의 거친 남성적 시선이 포착하는 일면의 진실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완벽한 이상주의자일수록 자기 자신만이 인민의 행복을 가늠할 수 있는 올바른 판단능력을 갖고 있으며, 옳을 수밖에 없는 그 판단에 따라 인민에게 자유롭거나 행복한 삶을 강제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인민의 뜻에 거슬리더라도 올바른 자유와 행복을 강요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비단 로베스피에르뿐만 아니라 크롬웰이 그랬고 레닌이 그러했다. 나는 위의 글에서 사실상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성의 기획을 밀고 나아가는 이념의 순수주의가 가진 위험성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힐러리 민츠가 남성 역사가들에게 걸었던 남성성의 불순한 혐의에서 내가 자유롭다는 변명으로 이 사족이 읽혀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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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세상 경험이 충분치 않은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너그럽게 이해되고 용서받을 수 있다. 반면 노년기는 행동, 생각, 사소한 그 모든것까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 머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않고 반성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역시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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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알아야할 것들, 보아야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시 아침이 시작되면 또 얼마나 새로운 것들이 내게 다가오는가. 하루하루, 변화무쌍한 세상의 변화들.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또 다를테니 새로운 날들을 우리는 가슴 설레이며 기다려야 한다.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공부하고 배워야하는 이유는 세상 모든 것이 매일 달라지며 새롭기 때문이다. 알아보고 탐색하고, 또 알아보고 탐색하며 죽는 순간까지 호기심을 잃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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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연구와 학문에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면, 한가한 노년보다 더 즐거운 것은 그 무엇도 없을걸세. 스키피오여, 나는 자네 부친의 친구 가이유스 갈루스가 죽은 순간까지 오롯이 하늘과 대지를 측량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보았네. 밤에 도표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에 그는 얼마나 자주 놀랐으며, 아침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어느새 밤이 다가오는 것에 또 얼마나 자주 놀랐던가! (...) 연희와 놀이와 창기(娼妓)의 어떤 쾌락을 그런 종류의 쾌락에 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분들의 쾌락은 학구열인데, 학구열이란 현명하고 잘 훈련된 사람의 경우에는 나이와 더불어 자라난다네. 솔론은 앞서 말한 시구에서 자기는 늙어가며 날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는걸세. 또한 확언하건대, 이러한 정신적인 쾌락보다 더 큰 쾌락은 존재할 수 없다네."   -  키케로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천병희 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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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투스 독서회 새해 첫 토론작으로 현기영의 단편집 <순이 삼촌>을 택한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2019년도 독서회 목록은 '주제가 있는 책읽기'라는 제목하에 선정할 예정인데, 첫 주제인 '역사와 문학'에 맞춰 현기영의 단편집 <순이 삼촌>과 최인훈의 장편<광장>을 읽기로 했다. 특히 두 작품 중 단편집 <순이 삼촌>을 맨 앞에 배치한것은 지난 해에 이어 올 해도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라는 이슈가 보다 본격적으로 대두될 것이기에 분단 전후 한반도 상황을 깊이 이해해보자는 취지에서다. 아울러 작년 2018년도는 '여.순 항쟁' 과 '제주 4.3' 항쟁 70주년이라는 의미에서 '4. 3 항쟁'을 주요소설 소재로한 <순이 삼촌>을 읽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단어는 금기어 중의 금기어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촛불정국 이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드믄드믄 '제주 4. 3 항쟁'과 '여순항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사건의 실상이 일부 밝혀지는 정도여서 본격적인 논의는 시기상조인감마저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막상 독서회 첫 시작부터 '제주 4. 3 항쟁'과 <순이 삼촌>을 다루려니 좀 딱딱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예상했던것보다 회원들의 반응이 좋았다. 특히 역사를 전공하신 박명주 선생 덕분에 '한국전쟁' 전후의 역사적 배경을 공부할 수 있어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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