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미학 - 20주년 개정판
승효상 지음 / 느린걸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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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으로 기억되는 건축가는 거의 없다. 건축가는 건축으로 기억이 된다. 그가 아무리 건축에 관한 책을 썼더라도 책보다는 건축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효상이라는 건축가는 건축으로서보다는 책으로, 그것도 선언으로 더 기억된다. 그는 그 선언으로 우리들 뇌리에 남아 그의 건축 하면 '빈자의 미학'을 떠올리게 된다.

 

아주 오래 전에 그가 썼다는 작은 책자의 제목, 그 제목에서 그는 '빈자의 미학'을 주장한다. 그의 건축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선언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이를 '빈자의 미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59쪽)

 

여기서 그는 '빈자의 미학'을 추구하는 건축가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이 이름 속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후기에 보면 이런 식의 해석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빈자의 미학은 무조건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인가? 아니다. 빈자의 미학은 건축의 합목적성과 장소성, 시대성을 추구한다.

 

건축은 그 자체로도 존재해야 하지만 자신이 서 있는 장소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장소를 벗어난 건축은 투시도의, 설계면의 건축에 불과하다. 건축은 반드시 장소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장소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 속에 안온하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건축은 시대적 요구에 따르기도 해야겠지만, 시대를 이끌어 가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건축이 지닌 시대성이다. 이 책의 맨 앞에 나와 있는 글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건축을 투시도와 조감도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투시도의 방식이 전근대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독선적이라면, 조감도의 방식은 민주적이며 타협적이다. 투시도는 구호적이고 선동적이나, 조감도는 설명적이고 연역적이다.' (75쪽)

 

지금까지 우리나라 건축이 투시도의 방식을 따랐다면 빈자의 미학에서는 다르다. 조감도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이런 조감도의 방식을 따를 때 빈자의 미학의 마지막에서 주장했던, 가짐보다는 쓰임이, 더함보다는 나눔이, 채움보다는 비움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빈자의 미학을 설명하는 책인데, 길게 쓸 필요도 없다. 책의 분량도 적다. 이러면 됐다. 다만, 이 선언이 현대에 더욱 필요해졌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면 된다.

 

빈자의 미학은 건축에서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도 해당한다.

우리는 지금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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