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 작은숲 청소년 10
강물 지음 / 작은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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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갈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루카치는 그의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서사시의 시대라고 한다. 영웅이 등장해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문학만이 존재하던 시대.

 

사람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하늘에 주어진 별의 인도에 따르면 된다. 별이 너무 멀다면 자신의 시대에 살았던 영웅들을 따르면 된다. 그러면 인간다운 삶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행복한 시대이긴 하지만, 고민이 없던 시대.

 

이런 시대를 넘어 문제적인 인간들이 등장하는 근대가 된다. 근대에는 신이 사멸하고 인간만이 존재하게 된다. 온갖 욕망을 지닌 인간들의 욕망과 욕망이 부딪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근대의 시대, 문제적 인간의 시대에 등장한 문학이 바로 소설이다.

 

하여 소설에는 문제적 인간이 등장한다. 문제적 인간이란 보통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사시의 시대처럼 아무런 고민없이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문제적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평범하지만 무언가 문제를 지닌 인간, 그래서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그런 주인공들이 작품 속에서 삶을 펼쳐가면서 보여주는 온갖 문제들이 우리들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주고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그래서 소설은 읽기에 불편하지만, 읽고 나서는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갈래를 구분하라면 주인공들이 모두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청소년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니, 무슨 프랙탈 이론이니 뭐니 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학교에서도 일어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학생들이 주인공이지만, 단지 젊은시절을 보낸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이 소설을 끝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학생들을 청년들로, 어른들로 바꿔도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성립한다.

 

학교 또는 학생이라는 배경을 지닌 문제적 개인이 나오면 우선 읽기에 불편하다. 좋은 얘기를 들어도 시원찮을 꿈많은 청춘 시기에 안 좋은 얘기들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미래의 가능성을 이야기해도 부족할 판인데, 현실의 끔찍함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교육이론서를 펴내는 출판사 중에 '교육불가능성'을 내걸고 책을 내는 출판사의 책 내용들이 현실을 적확하게 짚어내기에 한 편 수긍이 가면서도 읽기에는 몹시 불편하듯이, 이런 소설들은 그렇지 하면서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생산적 불편함이다. 나를 돌아보고, 내 길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학교 또는 학생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꼽아 보자.

 

가출, 폭력, 핸드폰, 성 등등

 

가출,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아이들은 가출을 감행한다. 그런 가출이 어떤 결과에 이를지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있는 현실이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선택'이라는 소설과 '염소의 꿈'이라는 소설에 이런 일을 감행한 문제적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책의 순서대로 하면 '선택'이 먼저고, '염소의 꿈'이 뒤에 실려 있지만, 가출을 중심으로 소설을 읽는다면 '염소의 꿈'을 먼저 읽고, '선택'을 읽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지 못하게 매여 있는 상태, 줄에 묶여 있는 염소와 같은 처지라고 느끼는 여학생이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혼자 바닷가로 온다. 일명 가출이다. 그는 단순한 꿈을 지니고 있지만, 그 꿈조차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은 각박하다.

 

끈을 끊고 나온 염소는 자유를 찾기 보다는 죽음에 한 발 더 다가갈 수밖에 없다. 제 힘으로 살아보지 못했음으로. 

 

하지만 끈을 풀고 나왔다고 해서 모두 죽음으로 가진 않는다. '선택'에서는 온갖 방황을 하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만,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온다. 그 돌아온 자리는 예전의 그 자리가 아니다. 나선형 발전을 이야기하고, 변증법 운운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자신이 온몸으로 일을 겪고 돌아온 자리는 예전의 자리일 수밖에 없다.

 

삶도 예전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이다. 강요된 선택이든, 자발적인 선택이든... 어쨋든 살아가야 함은 선택해야 함이니. 이렇듯 두 소설은 여학생의 가출에 대해서 문제적 개인을 등장시켜 우리에게 그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용감한 형제'는 사춘기 남학생의 성에 대한 문제적 개인을 등장시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는 형과 공부에 찌들려 지내다 결국 형과 같은 길을 가는 동생,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위 행위밖에 없다.

 

동물적 욕망 배출... 도서실에서 자위를 하다 걸린 형이나 수업시간에 자위를 하다 걸린 동생이나 그들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는 동물적 감각만 남아 맹목적인 감정 방출을 할 수밖에 없다.

 

왕성한 성에 대한 욕구를 억압만 하고 있는데, 이런 성적 욕구를 긍정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용감한 형제를 통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내용이 상당히 심각할 수 있음에도 형의 관점을 빌려서 소설을 전개하고 있기에 오히려 유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경쾌하게 진행이 되어, 청소년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 미소를 지으며 읽을 수 있다.

 

이 정도쯤이야? 빌헬름 라이히는 청소년들에게도 성생활을 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했고, 경제학자 우석훈도 "88만원 세대"에서 청소년들에게도 섹스를 허하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성적 욕구를 억압하면 그것은 파시즘으로 갈 확률이 높다고 라이히는 주장했는데, 파시즘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왜곡된 성의식으로 전이될 수도 있지 않은가.

 

가볍게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런 '용감한 형제'다.    

 

'스캔''니는 지는'은 남학생과 여학생의 학교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스캔'은 마동탁이라는 나의 관점으로 그 반의 학생들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말 그대로 스캔이다. 학교 생활 스캔. 특히 남학생들, 요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생활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스캔했다고 보면 된다. 이것은 거의 남학생들에게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여기에 약간의 추리까지 가미해서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에 대해서 잘 스캔해서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니는 지는'은 여학생들의 생활 모습을 스캔한 것이다. 화장, 청소년 화장, 우리가 아무리 그것의 문제점을 이야기해도 여학생들에겐 먹히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경쾌한 문체로 잘 표현하고 있다.

 

왜 이 아이들이 화장에 집착하는지, 사회문화적 상태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자신을 갖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제 얼굴에 덕지덕지 화장품을 발라대는가. 어른들에겐 덕지덕지지만 아이들에겐 자존감을 회복하는 행위다. 그것은 곧 자기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런 몸부림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문제적 개인들, 그것이 바로 '니는 지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읽기에 힘들었던 소설, 어쩌면 어른들이라면, 특히 교사라면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불편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졸업'이다. 한 시기를 끝내고 새로운 시기로 나아가는 행사, 그것이 바로 졸업인데... 이 소설은 졸업을 하지 못한다. 그 졸업은 또다시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 곳으로 가게 하는 절차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문을 나서며 나는 이제 이곳을 졸업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거쳐야 할 학교가 남아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캄캄해졌다. 234-235쪽

 

이런 생각을 한 주인공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학생이다. 학급 회장도 하고, 교사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나름 생각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있는 학급에서 일어난 갈등에 대해서는 해결할 능력도 해결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방관자일 뿐이다. 이런 방관의 자세는 한 번도 학교에서 교육의 주체가 되어 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자세다.

 

소위 민주교사라고 하는 담임과 학교 폭력의 우두머리인 수미 사이에서 그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담임에게 수미의 문제를 말했다가, 담임의 민주적 해결(?) 앞에서 마음을 닫아 버린다. 나설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소설집의 해설에서 해설자의 말을 빌리면 민주교사는 전교조로 대표될 수 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해직되었던 교사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벽에 부딪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벽은 교육관료들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학부모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적인 교사라는 이유로, 학급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려는 그들의 방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주어진 것을 잘하고, 폭력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그들은 낯선 존재일 뿐이었다.

 

'졸업'에서 담임이 아이들에게 배척당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너무도 깊게 박혀 있는 폭력의 상동성을, 힘이 센 학생에게 꼼짝 못하고, 더 힘센 학생부장에게 설설기는 그런 폭력의 위계를 민주교사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서히 이들은 아이들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래서 이들이 멀어져 감과 동시에 학교도 '교육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이 읽기 힘든 이유다. 우리나라는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인데, 학교에서 교육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렇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것을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이름 붙이기 어려운 교사였다. 잘 알려지고 편한 방법을 버리는 대신 자신만의 방법을 고집하고, 자신의 실패조차도 우리가 배우도록 한 교사였다. 그러기에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234쪽

 

나는 여기서 실패를 찾지 못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그 교사는 성공한 것이다. 교육의 성패는 짧은 시일 안에 판명나지 않는다. 교육은 학생들 마음 속에서 삭고 삭고 곰삭아 언젠가 한 번 나타난다. 나타나지 않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도 있다.

 

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교육을 끝까지 밀고나간 소위 민주교사는 실패한 교사가 아니다. 비록 성공했다 하기 힘들지라도, 소설 속에서 수미가 담임의 병원을 서술자에게 묻고 있을 때, 비록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교육은 계속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졸업'에서 문제적 개인은 교사다. 그는 새로 생긴 벽에 좌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그런 모습에서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소설의 시대,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문제적 개인을 보고 자기의 길을 돌아볼 수는 있다. 이게 바로 소설의 힘이다.

 

하나하나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면 좋은 소설들이다. 최근에 읽는 이야기 문학교육에 자료로 써도 좋을 그런 작품들... 불편하지만 즐거운 소설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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