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가려운 데가 있어 긁고 싶었는데, 어떻게 긁지 하는 생각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순간...

 

  민들레 119호가 왔다. 그리고 아픈 데를 긁을 수 있게 됐다. 시원하게. 완전히 가려움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긁을 수 있었다는 데 만족한다.

 

  가려움이 세 군데였다. 하나는 '페미니즘'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일'에 관한 것, 또 하나는 요즘 유행한다는 '청소년들의 자해 - 칼로 손목 긋기'였다.

 

  이번 호 기획은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다. 그렇다. 모든 운동은 모두를 위해야 한다. 소수를 위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를 위한다고 겉으로는 말한다.

 

정당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들과 이념, 이익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당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모두를 위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모든 운동은 모두를 위한 운동이다. 아니, 모두를 위한 운동이어야 한다.

 

이때 모두는 구성원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일, 그런 일이 있을까? '모두'라는 말을 강조하다 보면 전체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모두를 위한'은 어떤 뜻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때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에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 약한 사람,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사회에서 가장 힘든 자리에 있어 고통을 받는 사람을 위한 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 99개를 가진 사람이 하나를 갖지 못해서 억울해 하는 사회가 아니라, 99개 가진 사람이 하나도 가진 것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모두를 위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이 여성들만을 위한 운동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알게모르게 여성들이 받아온 차별들을 없애간다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질 수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모두를 위한' 운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를 배제하지 않는다. 함께 가려 한다. 물론 배제해야 할 존재는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 함께 가야 한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함께 가는 것은 아니다.

 

약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차별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이렇다면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통일이 아니라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통일이 반드시 평화와 함께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들에 이번 호에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평화로 가는 길을 먼저 내는 것, 이 평화에 경제가 무시될 수 없으니 어떻게든 남북이 상생하는 경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 그리고 특정 단체들만의 교류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교류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두를 위한 통일'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을 화두로 삼으면 우리나라에서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청소년들이 생각난다.

 

많은 청소년들을 자기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성적으로 구분된다. 이럴 때 온전한 자신을 인정받고 싶은 청소년들, 그러나 소통이 되지 않는 이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몸에 관심을 기울인다.

 

몸에 상처를 내는 순간, 자신의 몸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손목 긋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손목을 긋는 모습을 남들이 보는 순간 그는 관심의 대상이 된다.

 

성적밖에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자신이 온전한 몸으로 관심을 받는다. 그것이 비록 우려와 걱정만 넘치는 관심이지만... 어른들에게 이런 관심은 온전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관계를 맺고 싶다... 이번엔 자해를 한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올린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청소년들이 공감을 해온다. 관계가 만들어진다. 비록 소셜미디어에서이지만... 이렇게 청소년들의 자해가 유행처럼 번져간다.

 

이 이면에는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 구조가 있다. 청소년들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는 공부말고는 모두 하지 마라, 하니 말라는 금지뿐이지 않은가. 자기 몸조차 남들 통제에 맡겨야 하는 청소년들이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손목 긋기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들불처럼 번져가는 손목 긋기에 대해 이번 호에서 두 글이 실려 있다. (청소년 자해가 늘고 있다- 편집실, 응답 없는 시대의 행위, 청소년 자해-이수련)

 

두 글을 읽으며 다음 호에서는 좀더 논의된 글들이 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청소년들 개인의 문제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마음 속 가려움, 민들레가 긁어주고 있다. 가려움을 완전히 가시게 하는 것은 이제 내 몫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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