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에는 시인 자신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집 맨 끝에 실린 '작은 물방울의 노래 · 4'

 

  시인은 큰강이나 큰바다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큰 물줄기가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작은 물방울이면 된다. 그렇게 '종달새처럼 맑고 천진하여 / 해가 뜨면 물푸레나무처럼 흐드러지지만 / 희고 반듯한 이마를 갖고 싶은 아이'(86쪽)였다고 한다.

 

  자연과 어울리며 한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나만 순수하다고 행복할 수 있는가.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지만, 이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기에 시인은 작은 물방울이 되어 다른 사람곁에 머무르고 싶어한다.

 

  '우연히 간디를 알고부터 / 눈물이 자주 고여오는 아이 / 민주주의나 노동 운동은 잘 몰라도 / 신맛처럼 오래 삭힌 영혼으로 / 시를 쓰고 싶은 아이' (86쪽)가 된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어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으랴. 게다가 간디를 알고부터라고 하니, 간디가 누구인가. 비폭력 운동을 이끈 사람 아니던가. 결코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자기 자서전 이름도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고 붙였던 사람 아니던가. 그런 간디를 알고부터는 민중들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그 아이가 어느 날 / 민중의 슬픔으로 튼 물꼬를 따라 / 흐르고 있었습니다 전생에 / 가본 길인 양 익숙한 물살로' (86-87쪽) 시는 이렇게 끝맺음을 한다.

 

바로 시인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음을, 또 민중과 함께 살아갈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그냥 민중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뿐이다.

 

그런 시들 중에서 눈물이 찡하는 시가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노회찬 의원이 생각나는 시이기도 했고. 

 

  고해성사

 

기도했다 날마다

겨울 산벼랑에 걸린 목숨

어쩌다 한번 지은 죄

저문 또랑에서 성당 구석에서

너와 나의 기억에서 희게 빨려지기를

의무인 양 거듭되는 죄 끌고 다니는

어떤 한 사람을 본다 무척

닮았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러면서 내일은 깨끗해질 거라며

어쩐지 안쓰러운 오,

누구에게 돌 던지랴 나는

또 누구의 하루에 뾰족이 서 있는

바늘 끝이 되었으랴

아무래도 잔인한 핏줄이었나보다고

투덜투덜 조상 탓을 하면서

악몽을 염려했다 오늘 밤의

어수선할 일기장의 내용들을

 

박라연,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 1993년 초판 8쇄. 63쪽.

 

이미 변기 속에 빠져 똥냄새와 자기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국회에서, '어쩌다 한번 지은 죄'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 그는 그런 죄를 '의무인 양 거듭되는 죄 끌고 다니는 / 어떤 한 사람'처럼 행동을 했는데...

 

자기 죄가 빨려지기를 바라지도 않는 자들이 득시글한 국회에서 너무도 순결했던 사람, 견딜 수 없었으리라.

 

사람이었기에, 부끄러움을 아는, 책임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이 시집에 나오는 바로 이런 시와 같은 세상 아니었을까.

 

  누에

 

가당찮은, 참

골목길 잡상인의 리어카에 오글오글

한많은 번데기로 뒹굴지만

새하얀 내 영혼의 집은

수만 갈래의 비단실을 뽑아내고

뽑아내고 ……

아직도 기다리며 사는 이웃들

이웃들의 추운 살갗을 위하여

네 고운 색실은 즐겁게 쓰러진다

이 시대의 비단실을 뽑아내겠다면서

오늘도 꾸물꾸물 모여

새파란 이념의 뽕잎을 먹는 누에들

즐겁게 쓰러질 자유가

지금은 쓰라리다

 

박라연,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 1993년 초판 8쇄. 37쪽.

 

아직은 즐겁게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단실을 뽑아낼 수는 있다. 그렇게 '이웃들의 추운 살갗을 위하여' 살았던 노회찬 의원같은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박라연의 시집을 읽다가 노회찬 의원을 떠올리게 되다니... 이 시집은 1990년대 초반에 씌었는데 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앞으로 많이 나가지 못했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들면서...

 

그래도 작은 물방울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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