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두르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1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안 된다. 제목이 소설 내용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소설 내용은 현실에 없다는 얘기다. 소설에서 현실을 찾으려는 사실주의를 비꼬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소설에서 현실을 찾아야만 할까? 사실과 진실은 다를텐데, 소설은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것일텐데...

 

사람들은 꼭 소설을 읽으며 사실을 찾으려고 한다. 무슨 역사소설도 아니고... 역사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큰 역사는 사실대로 표현되지만 나머지는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작가가 창조해 낸 허구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소설에서 사실을 찾으려 하지 말자.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자. 그러면 된다. 그런데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직설적이기도 하지만 우회적일 때도 많다.

 

빙 둘러간다. 아니면 모자이크처럼 여러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기도 한다. 도대체 연관 없는 사건들이 왜 소설에 이리도 복잡하게 나오는지, 이 소설은 다양한 사건들이 얽혀 있다. 전혀 연관성 없이 보이는 사건들이 소설 속에 중구난방으로 나온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으로 소설을 읽어가게 된다. 읽어가면서 역시 제목만큼이나 내용을 모르겠군 하는 생각을 한다. 에고, 이렇게 소설이 어려워서야... 그러니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할 수밖에.

 

소설가는 소설로 독자들을 우롱하지만 독자들은 자기 해석으로 소설가를 우롱한다. 서로 내뿜는 우롱들이 합쳐 소설이 존재하게 하는데...

 

이 소설을 그냥 두 부분으로 나눠 버리겠다. 한쪽은 학교, 다른쪽은 시골. 모두 전통으로 무장되어 있는 곳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이곳에 있으면, 이 속에 파묻혀 있으면 도대체 이곳이 왜 답답한 곳인지, 왜 정체되어 있는 곳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두 곳은 전통사회를 이끌어가는 기본 축이 된다. 지금은 시골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이 씌어진 당시에는 시골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 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여전히 귀족 잔재가 남아 있을 때고, 그 잔재는 시골에 있었을테니.

 

학교가 얼마나 고루한지 알려주기 위해서는 학교 생활에 안주한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런 학생들 역시 고루한, 전통적인 학교를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학생은? 이미 학교를 떠났으나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학생, 그것도 나이가 서른 살이 된 학생.

 

그의 눈에 비친 학교는 어떨까? 아마 학교는 전통과 현대가 싸움을 하는 곳이지만 늘 전통이 이기는 곳, 그래서 답답한 곳일 것이다. 주인공인 유조는 어느날 서른 살에서 열일곱 살이 되어 핌코에 의해 납치되어 학교에 간다.

 

그가 학교에서 겪는 일을 통해 학교의 고루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그가 전통적인 윤리로 무장되어 있고, 인문학적 예술적 지식을 자랑하지만 결국 주트카라는 여고생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학교의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학교가 과거를 아무리 표방해도 현대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등장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주인공 유조가 핌코에 의해 납치되어 생활하면서 무려 자기 나이보다 열세 살이 어리게 생활을 하는데, 학교 모습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다음은 시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유조의 친구인 미엔투스 - 그는 학교에서는 반항아다. 학교 정책에 반대되는 행동들을 많이 한다 - 와 시골로 도망치면서 겪게 되는 일이 시골에서 발생한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엔투스는 머슴을 동경한다.

 

머슴은 곧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머슴은 하인이 아니다. 자기 생활을 해나가는 강인한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 머슴을 만나러 시골로 도망가는 유조와 미엔투스.

 

귀족인 이모 집에 머물게 된 유조와 미엔투스는 곧 머슴을 발견하게 된다. - 이름은 동유럽이나 러시아쪽 이름은 좀 길어서, 또 잘 안 외워져서 생략하기로 한다 - 이 머슴과 친구가 되겠다고 나선 미엔투스로 인해 시골에서 지켜지고 있던 위계질서가 깨지게 된다.

 

철저한 위계가 미엔투스의 행동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귀족들을 지탱하고 있던 두려움이 하인들의 행동으로 표출되고, 유조는 탈출을 하게 된다. 탈출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납치가 발생한다.

 

이번 납치는 유조가 납치되는 것이 아니라 유조가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그것은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표시가 된다. 물론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머슴을 납치하는 것보다는 귀족인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납치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납치라고 할 수 있다.

 

첫번 납치는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면, 두번째 납치는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 납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납치, 그리고 서술 속에서 궁뎅이와 장딴지가 나오는데, 궁뎅이는 머무름, 정체, 과거에 속한다면, 장딴지는 나아감, 미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리는 우리를 내달리게 하고, 그 내달림의 힘은 장딴지에서 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궁뎅이는 우리는 눌러 앉게 한다. 그 자리에 주저앉히는 궁뎅이. 하여 이 소설에 자주 나오는 궁뎅이와 장딴지는 과거와 미래, 정체와 발전, 머무름과 나아감을 대비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건들, 장면들이 막 나오는 듯하지만 읽으면서 이렇게 과도기에 처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서술한 소설로 해석하면서 읽으면 읽는 재미가 있다.

 

작가가 소설 속에 수많은 퍼즐 조각들을 흩뿌려 놓았는데, 그것을 나는 내 맘대로 모아 완성시키고 있다. 작가가 그려놓은 퍼즐 그림이 아니라 내가 모아놓은 퍼즐 그림으로.

 

그게 어쩌면 제목이 뜻하는 페르디두르케가 아닐까 한다. 없는 것을 서술하니,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