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상당한 두께의 분량이 부담스러웠는데, 궁금증이 그 부담을 이긴 듯하다.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린 한 사람.

그리고 그의 동생이 전하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 건

그 폭력과 광기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이,

환경을 무시 못한다는 말인데...

이 책으로 그 생각이 더 짙어질 듯하다.

 

어떤 이유로든 그 생각이 많아지게 할 작품.

 

 

 

 

 

김신회의 글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저자의 글을 다시 만날 기회가 온 것 같아 골라본다.

 

뭔가를 하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그 즐거움이 오기 전의 설렘을 말하려나 보다.

기다림 뒤에 올 두근거림을 전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늦게 그림을 만난 저자의 솜씨에 포근한 웃음이 난다.

포근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드로잉과 에세이를 꾸린 그림책이란다.

따뜻함이 가득한 이야기로 끌어줄 것 같아서 궁금한 책.

사계절 Dear 그림책이어서 더 기대되는 책.

 

 

 

 

 

 

 

 

 

삶과 먹는다는 행위를 같이 얘기하는 걸 요즘 종종 듣는다.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으면서도 가끔씩 귀에 담긴다.

 

황석영의 글을 소설이 아닌 산문으로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많이 궁금해지는 글이다.

 

 

 

 

 

 

 

 

 

 

한 가정의학과 의사의 일상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힘.

나는 여전히 의사에 대한 호감이 없지만,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꺼내는 의사들의 말은 듣고 싶어진다.

 

진료실 안의 일상사가 전해줄 울고 웃을 이야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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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틸유아마인 언틸유아마인 시리즈
사만다 헤이즈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가지지 못한 것에 더 마음 두기 마련이다.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내 몫이 아닌 건 아닐까 포기하고 싶다가도, ‘아직은’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손을 뻗는다. 내 것이다, (언젠가는) 내 것이 될 거다, 간절히 바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다, 는 마음으로. 그게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간다. 그러다 보면 인간으로 지녀야 할 이성이 점점 그 자리를 잃는 경우도 생긴다. 이성보다 내 안의 욕심이 감정을 휘두르며 판단을 잃는다. 이 소설 속의 범인처럼, 스스로 의사라도 되는 양 수술도 불사할지 모른다. 인간이 그런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쉬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

 

만삭의 임산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범인은 잔인하게도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 했다. 무엇 때문에? 누가? 한 번, 두 번. 연쇄살인은 아닐 거로 생각하지만 알 수 없다. 수사관 로레인과 아담은 이 사건을 하나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쌍둥이 아들과 곧 태어날 딸을 돌봐줄 유모 구인광고를 낸 클라우디아. 그에 딱 맞는 유모 조가 고용된다. 클리우디아의 남편 제임스는 몇 달씩 바다에 나가 있는 해군이다. 곧 태어날 아기와 쌍둥이를 돌봐줄 이가 필요했다. 조는 그 일에 아주 적합했다.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음식도 맛있게 한다. 거슬릴 게 없다. 하지만 낯선 이를 집안에 들인 클라우디아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번 실패를 거듭하고 이제야 품에 안게 될 아기다. 이번에는 꼭 이 아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했다. 모든 건 곧 이루어질 거라 간절히 믿는 클라우디아는 불안하지만 조와 잘 지내며 아기가 태어날 날을 기다린다.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내가 직접 낳은 아이를 통해 엄마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아기를 갖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나?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 손만 뻗으면 내 손에 들어오는 물건이 아니지 않나. 소설 속 누군가의 아이가 갖고 싶었다는 독백에, 반드시 아이를 갖게 될 거라는 믿음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는 게 얼마나 신성한 영역인지는 안다. 그런데도,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나도 아는 걸 그 누군가는 자기의 욕심에 망각한 듯하다. 이런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고 마지막까지도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있자니 분노가 인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심문 부분이 감정을 격하게 한다) 그릇된 판단이 가져온 건 누군가의 죽음뿐만 아니라, 엄마의 고귀한 영역까지 함부로 여기는 건 아닐까 싶은 안타까움까지 불러왔다.

 

이 소설은 범죄로 사건의 시작을 알리고, 여러 명의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각자의 숨겨진 사연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엄마, 아기다. 클라우디아의 유산과 사산은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 보게 한다. 그래서 만삭인 그녀의 민감함을 공감한다. 이번에는 제발, 내 아기가 무사히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 것 같아서다. 미혼이지만 조가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 역시 평범하지 않다. 어떤 목적으로 클라우디아의 집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의 쌍둥이를 대하는 태도나 그 목적이라 추측되는 클라우디아의 출산일을 기다리는 마음 역시 짐작된다. 아이를 원하는 마음을 그렇게 확인하게 된다. 거기에 예상 밖의 인물이 드러내는 엄마의 길은 세상 어디에서건 엄마일 수밖에 없는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수사관 로레인은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열심히 뛰지만, 그녀에게도 사생활이 있다. 십 대의 딸이 집을 나가겠다고, 결혼하겠다는 말에 혼란스럽다. 달래도 보고 협박 비슷한 것도 해보지만, 딸은 집을 나간다. 그녀 역시 수사관이기 전에 엄마였다. 사건을 추적할수록 그녀와 딸 사이의 문제도 점점 고조된다. 미혼의 만삭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려다 실패한 사건들은 클라우디아와 조, 로레인까지, 전혀 다른 입장의 사람들(여자, 엄마)을 한 지점으로 모은다.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머물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동시에 엄마일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가 된다.

 

그냥, 추리소설일 거로 생각했다. 맞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다. 잔혹한 장면에 섬뜩해지고, 피가 난무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살인이 그려진다. 그 잔인함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여러 번이다. 범인이 누굴까, 왜 미혼의 임산부만 골라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아기에게 어떤 목적이기에 이런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는 건가, 하는 추리의 맛도 있다. 무엇보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서술하면서 이들이 한데 모이게 하는 지점과 그 이유가 무엇이 될까, 여러 가지가 궁금했다. 그 궁금증에 가독성은 배가 되고 한번 손에 들고 끝까지 읽었다. 그런데, 추리소설의 많은 부분을 흥미롭게 읽게 하면서도 저마다 자기 자리의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자니, 소설로만 대하기에는 감정이 조금 앞서게 되더라.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엄마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며, 엄마로 살아가는 고충이 로레인을 통해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걸 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추리소설에서 이런 기분 맛보는 건 오랜만이다. 아기와 여자와 엄마의 모습을 한 자리에서 마주하기가 낯설면서도 경건해지는 기분이다. 여전히 이 소설이 내게 선사한 잔인함은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그 잔인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 이면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읽어갈 수 있다.

 

화자인 ‘나’로 서술되는 이 소설은 한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나’가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읽어야 한다. ‘나’는 클라우디아일 수도, 조일 수도 있다. 혹은 그 이상의 누구이거나... 소설의 제목처럼 ‘내 것’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뭔가를 유추하면서 읽게 된다. 그게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가독성을 선사한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결말에 조금 놀랍기도 하지만, 범인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는 곳곳에 있었다는 걸 간과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앞부분으로 잠깐 되감기를 해보기도 했다. ‘아, 여기서, 이 지점에서 좀 더 잘 봐두어야 했던 것을...’하는 아쉬움을 찾아낸다. 읽는 재미와 여운을 같이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시리즈의 시작을 이렇게 알렸으니, 아담과 로레인 부부의 다음 사건 해결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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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지음, 강수정 옮김 / 열화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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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잘 모르겠다. 죽음으로 이별한 사람들과 다시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과 나의 공감을 이룬 시간을 꺼내게 되지 않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그 시간이 아니고서는 서로를 기억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죽은 사람들과 나. 그 접점을 찾을 수도 없었거니와 이런 일 - 죽은 사람과 만나는 일 -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아서인지 낯설다. 그런데 존 버거는 그걸 좀 다른 분위기로 불러온다. 낯선듯하지만 필연으로 만나게 되는 느낌으로 그들의 여행 같은 흐름에 끌어들인다.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와 우리가 그들과 공유했던 것들을 끄집어낸다. 계산되지 않은, 변하지 않은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마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게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들은 죽기 전 모습으로 남아 우리를 마주할 테니. 그들은 떠났고, 시간도 흘렀지만, 사람과 세상이 변하는 그 간격이 사라진 채로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을 거니까.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것처럼 읽힌다. 그의 자전적인 시간이지 않을까 추측하면서 읽게 되는데, 존 버거의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시간으로 들어간 것처럼 들리는 걸 무시할 수가 없다. 리스본과 제네바, 아이링턴, 그리고 더 많은 곳. 그렇게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그의 기억 속 사람들을 소환하고 이야기하고 같이 걷는다. 눈치를 챘겠지만, 그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어머니, 딸, 지인들. 첫 페이지에서부터 등장하는 그와 어머니의 조우는 반가운 그림이면서 한동안 상황 파악을 해야 할 정도로 숨소리가 낮아지곤 했다. 그의 어머니? 어디서 오셨나? 아, 오래전 그의 곁에서 떠나간 사람을 이렇게 만나는구나. 너무 자연스럽게, 어제도 만난 것처럼,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소소하고 자잘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나누면서... 죽은 이에게서 배우고 가져갈 것들을 말하는 어머니란, 뭐랄까, 아낌없이 더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처럼 들리더라. 죽기 전에 알 수 없던 것들을 죽은 후에 알게 되었는데, 뭐든 나에게 물어보렴, 내가 알게 된 것을 다 말해줄게, 라고 말하는 것처럼.

 

죽은 다음에 많은 것을 배웠단다. 그러니까 너도 여기 있는 동안 나를 잘 이용해. 죽은 사람은 사전 같아서 모르는 것을 찾아볼 수 있어. (39페이지)

 

얼굴을 제대로 보기 전에 걸음걸이로 알 수 있는 사람. 그렇게 금방 알아챌 수 있는 상대와 함께 보내고 싶은 좋은 시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머니에게서 듣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에도 집중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내 눈에는 죽음으로 이별한 모자의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이 만남이 지속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아서일까, 아니면 꿈을 꾸는 듯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너무 현실적인 장면들만 눈에 담고 살아가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애틋하면서도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살면서 공유했던 많은 시간을 읊조리듯 풀어내는 시간 속에서도 자꾸만 그 끝이 먼저 보이곤 해서, 슬픈 장면이 아님에도 자꾸만, 순간적으로, 뭔가가 울컥거리는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가 여러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뭔가가 내 안에서 자꾸 쌓여갔다. 풀어내지 못할 지독한 어떤 감정, 마음에서 느끼는 건 분명하지만 표현하기에 불분명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던. 좋아했던 과일 하나마저도 그만의 사전에 의미를 다시 새기듯 그려진다. 그럴 수도 있겠다. 뭐든, 누군가로 인해 다시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가 머물렀던 도시들이 그냥 이름으로만 불리지는 않을 듯하다. 그 도시와 공간, 시간이 마치 그를 기다렸던 것처럼 스르륵 다가오곤 했다. 곳곳에서 사람들을 기억해 낸다. 아니지. 그들이 찾아와준 거니까 기억이 아니라 만난 거다. 그가 발 디디는 곳에서 그의 과거 한때를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그때를 추억하고, 살아오고 살아갈 시간에 대해 조언하듯 따뜻한 말이 오간다. 죽은 이들과의 대화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잊은 것처럼 이 소설은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현재형으로 보이게 한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상상조차 안 했던 장면들을 사실처럼 그리고 있다. 마치 그게 진짜인 것처럼 생생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과거와 현재라는 구분이 없이, 그냥 그들의 삶에 대해 계속되는 이야기로 머문다.

 

그렇게 구분 없이 읽어서일까. (그가 그렇게 썼으니 읽는 나도 그렇게 읽어지는 거겠지만) 읽다가 문득 한 번씩 생각하게 된다. 내가 죽으면 어디서 누구를 기다리고 싶을까. 누군가 죽은 후에 나는 그(그녀)를 어떻게 어떤 자리에서 만나고 싶어질까. 이 책의 첫 페이지에서 그가 언급한 어머니처럼, 나도 엄마를 만나고 싶어지지 않을까. 가장 애틋하고, 가장 고맙고, 가장 미안하고, 아직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으로, 지금 하지 못한 말까지 한꺼번에 꺼내놓고 싶어지지 않을까.

 

어디나 아픔은 있다. 그리고 어디나, 아픔보다 더 끈질기고 예리한, 소망이 담긴 기다림이 있다. (224페이지)

 

죽은 이들과의 만남이라고 하면 슬플 것 같은데, 뜻밖에 슬픈 내용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쾌한 기억들을 꺼내고 즐기는 시간으로 남았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이상하게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하는 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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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 시드니 걸어본다 7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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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를 몇 권 읽었다. 각기 다른 작가, 다른 장소, 다른 분위기. 낯선 곳을 여행하는 특유의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 박연준과 장석주의 글에서는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느리게 걷는 어떤 거리, 혹은 동네를 떠올리게 한다. 낯선 곳인데 익숙한 거리를 걷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국땅에서 익숙한 느낌이라니, 모순으로 들리지만 어쩌겠나. 내 느낌이 그랬는데 말이지. 시드니. 자주 듣는 지명이지만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우리나라와 반대 계절을 사는 곳. 그저 추운 겨울을 피하고 싶을 때 떠올리곤 했던 도시인데, 두 사람이 함께한 그곳을 같이 걷고 있자니, 안 그래도 느린 내가 더 느려지는 느낌에 어슬렁거리고 싶어진다.

 

시드니를 여행한 글이라는 걸 알았는데, 내가 미처 이 책 정보를 접하지 않았던 한 가지가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식 대신으로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글이라는 것. 박연준과 장석주라는 조합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기에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그들의 인연을 알리는 글을 읽고 있자니, 글 쓰는 사람들다운 인사로 들려서 흐뭇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음악으로, 그림으로, 또 다른 방식으로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는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이제는 글로 전하는 것까지 보게 된다. 뭐, 글로 여러 소식을 전하던 작가를 처음 본 건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소식을 알리는 방식으로 글이 선택받았다는 게 좋더라. 그들만의 방식이어서 더 좋고, 두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한 권의 책으로 전해지고 있어서 더 좋고... 두 사람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가 한 권의 책에서 두 작가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는 거다.

 

시드니의 한 시골 마을에서 두 사람이 보낸 시간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궁금했는데, 막상 읽고 보니 그저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장소만 바꾸어서 하는 듯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다른 분위기와 표정이 생각나서 순간순간 낯선 느낌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가 있다. 두 사람의 나이 차 때문인 건지, 아니면 원래 다른 성향의 모습이 그때 드러난 건지 모르겠지만,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그곳에서 같은 시간을 지냈는데, 다른 시간을 살다 온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시드니를 경험한 그와 시드니를 처음 경험하게 된 그녀의 차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느리게, 좀 더 느리게 그곳을 사는 남자와 가보지 못한 곳을 눈에 담고 싶은 그녀의 발랄함이 대조적이다. 연애와 다르게 결혼은 한집에서 같이 살아가는 것이기에,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몰랐던, 보이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는 기회이자 건너야 할 어느 지점인 듯하다. 마음이 맞지 않아 가벼운 언쟁을 하기도 하고, 그 위기를 넘기고 더 단단해질 수도 있고.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한 달 동안 두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유난히 파랗게 보이는 하늘을 그리게 하는 장석주의 글과 일상에서 보이는 장면에 어떤 기억을 꺼내게 하는 박연준의 글이 일주일 동안 나의 밤을 견디게 해주었다. 부유하듯 떠돌아다니는 기분에 몸을 가볍게 했다가, 동네 뒷골목을 산책하는 듯한 더딘 시간을 허락해주었다가, 언젠가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어떤 곳을 떠올리게도 했다가... 혼자여서 편하고 좋았던 모든 것에 조금씩 공간을 만들게 한다. 떠돌고 싶은 마음을 붙잡으러 떠나더라도 돌아오면 제자리인 것을 알지만, 익숙한 곳의 무료함에 언제 또 출렁일지 모를 마음이지만, 그런 게 또 오늘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두 사람의 산책기. 봄이 올 듯 말듯 계절이 왔다 갔다 하는 요즘, 이렇게 느리게 걷는 기분 들게 하는 글, 좋았다.

 

낯선 곳을 여행해 보면 안다.

여행은 불편을 동반한 낯선 상황의 연속이라는 것을.

불안과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그리 익숙함을 그리워하게도 만든다는 것을.

 

 

돌아와보면 안다.

익숙할 때 즈음 그곳을 떠나왔음을.

이곳의 익숙함이 달콤하고 감동스럽게 느껴지지만

잠깐일 뿐이라는 것을.

조만간 권태에 빠져,

불편과 낯선 상황을 향해 달아나고 싶어할 것임을.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살 수 있다면 좋겠다.

서울을 서울 밖에서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

돌아와서도 헤매야 한다. (100페이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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