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크게 소리쳐! - 세상을 바꾸려는 십대들의 명연설문 특서 청소년 인문교양 11
아도라 스비탁 지음, 카밀라 핀헤이로 그림, 김미나 옮김 / 특별한서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멋진 책입니다.


우리가 성장 과정에서 존 F 케네디라든가, 마틴 루서 킹 주니어라든가, 마더 테레사라든가, 이런 성인(成人)들의 연설을 모은 책은 여러 권 읽고 자랍니다. 그런데 나이가 비교적 어린 유명 인사들의 연설은 그리 자주 접한 적이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에는 물론 위대한 어른들의 발자취도 눈여겨 보고 따라 밟을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만, 같은 또래, 혹은 몇 살 위인 언니 오빠들의 종적과 행동, 개성, 생각 등을 목표로 삼고 따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 배울 게 많지도 않을 연예인, 스포츠 선수들은 그렇게나 열을 올려 가며 선망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말입니다.


이 책은 모두 45인의 청소년 혹은 청년들의 연설을 담았습니다. 남들과 달리 이른 나이에 세상에 대한 눈을 뜨고 당당히 목소리를 높이며 모순과 병폐를 지적하는 건, 여느 연예인이나 스포츠 아이돌보다 더 멋지고 더 성숙하며 많은 수련과 사고 과정을 거쳐야 보일 수 있는 행동이고 성과입니다. 그러니 이런 젊은(혹은 어린) 사자들, 연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행동을 살피는 건 특히 청소년기에만 쌓을 수 있는 체험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들 중에는 연설을 행할 당시 청소년이었으나 지금은 성년에 도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시우테즈칼 마르티네즈라는 이름을 들어 본 분 있을까요? 저는 처음 듣는데 원주민 출신(첵에 있는 대로 옮기겠습니다) 기후 운동가이며 현재 나이는 22세라고 합니다. 그는 행동에 나설 뿐 아니라 적성을 살려 대중 앞에 퍼포먼스를 펼치는 힙합 뮤지션이기도 합니다. 그는 원주민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밝히며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고발하고, 그러면서도 또래 친구들에게 자신처럼 세상의 어두운 면을 향해 과감하게 No!라고 외치자고 청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또래 친구들이 많이 망설이고 확신 없이 방황할 줄 알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기 죽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청소년다운 이런 소탈한 면이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툰베리가 나옵니다. 그녀가 앓는 병은 여럿이라고 나오는데 자폐 말고도 선택적 함구증이 있다고 합니다. 병자가 아니고 어른인데도 이러는 사람이 제 주변에 있어서 아주 미칠 것 같습니다. 여튼 그녀의 언사는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정말 "벼락 같이 퍼붓습니다."


벨기에에 큰 도시 중 하나로 앤트워프가 있죠. 툰베리의 연설을 듣고 아누나 데 베버라는 소녀는 자신도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어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책에 그 연도가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데 아마 2019년 즈음에 큰 시위가 저 도시에서 있었나 봅니다. 세계적으로 당시 화제가 되었던 듯한데 한국에서는 크게 뉴스화하지는 않았죠. 책에 언급되는 조크 쇼브리즈 장관은 50대 여성인데 문제의 발언은 제가 위키백과에 찾아 보니 앤트워프 시위보다는 브뤼셀에서 열린 75,000명의 시위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여튼 이런 말은 장관이자 정치인으로서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십대인데도 놀라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세상에 이바지하고 동시에 대중(청소년 포함)에 행동을 촉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에머 히키, 시아라 저지, 이 두 명은 "겨우 열 네 살의 나이에" 뿌리혹박테리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작물 수확량을 증가시킬 수있다는 결과를 밝혀 냈습니다. 사람은 일단 식량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다음 단계로서 자유를 논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또래 청소년들과 어른들에게 말합니다. "누구라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 행동으로 옮기세요!"


크르틴 니띠야난담은 2000년생입니다. 15세의 나이에 그는 알츠한이머를 조기 진단하는 테스트를 출품해서 상금도 받고 해당 분야의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아무리 재능이라는 게 어린 나이에 결실을 맺기도 한다지만 생각해도 생각해도 놀랍기만 합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은 나이가 아니라 아이디어로 하는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신체의 일부를 잃고 큰 불편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16세의 소년 이스턴 라샤펠은 3D 프린터로 로봇 팔을 만들어 이런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이들 중에는 일곱 살 어린 소녀도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세상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기여하는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영웅으로 존경하고 감사해야 할 분들입니다. 그 나이에 무관하게 말이죠. 


케네스 시노즈카(성씨도 그렇고 책의 일러스트로 보아 일본계인 듯합니다)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치매로 고생하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양말에 센서를 달고 치매 환자가 밖으로 혹 나가기라도 하면 바로 간병인에게 통지가 되는 장치를 만들었죠. 사소해 보이지만 구글 과학 경진대회 등의 행사에서 그는 큰 주목과 갈채를 받았다고 합니다. 당장 이 장치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큰 편의와 희망을 안겨 줬기 때문이죠. 우리의 불편을 덜어 주고 삶에 의지가 되는 이런 소중한 공헌을 남기는 분들에게 마땅히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나이가 어린 이들에게서 이런 멋진 작품과 기여가 행해진다는 게 더욱감탄스럽네요. 


좀 예전의 사례도 나옵니다. 지금이야 상상할 수 없지만 1960년대에는 지성과 자유의 전당, 상아탑이라 일컬어지는 대학에서도 여러 부조리와 차별, 지나친 제약이 횡행했습니다. 이때 마리오 사비오를 비롯 일단의 대학생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과도하게 정치적 자유를 캠퍼스에서 제한하는 대학 당국의 조치에 대해 과감하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이 1964년에 절정을 이룬 FSM, 즉 자유언론운동인데 이때의 성과를 바탕으로 많은 대학에서 학생들이 지금은 (때로는 도에 지나치게)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이처럼 과거의 투쟁을 통해 오로지 대의를 위해 몸바친 소중한 족적이 있었다는 점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엉뚱한 자가 공적만 가로채려는 사기 행각을 벌이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우리가 이름을 잘 아는 행동가입니다. 그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 아직 어린 소녀였는데 지금은 꽤 성숙했죠. 이 책에는 2015년 당시 그녀가 UN 총회에서 행한 연설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 용감한 자매 살람과 모든 난민 어린이들에게, 전쟁이 배움의 기회를 빼앗아가지 못할 거라고 약속해 주세요." 그녀의 외침입니다. 


p196에는 자유를 찾아 압제로부터 탈출한 조셉 킴이라는 청년도 나옵니다. 그가 탈북을 감행하게 된 건 딱히 대단한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희망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니, 누가 만들어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만의 희망을 만들어 내라"고 그는 말합니다. 


마야 S 펜은 어렸을 때 사업을 시작하여 큰 돈을 번 사업가입니다. 의류 회사의 대표이자 영화 제작에까지 손을 대는 대단한 역량과 성과를 자랑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그녀는 다만 이윤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마인드가 아닙니다. 특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 청소년들을 위해서도 뜻 깊은 행사를 자주 주관합니다. 그가 만들어내는 의류품은 100% 친환경적입니다. "나는 강하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멋지다. 나는 내면과 외면이 모두 아릅답다. 나는 다른 소녀들을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젊은 영웅들이 우리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희망을 잃지 말며, 자신의 진짜 가능성을 찾아 꽃 피우라는 거죠. 청소년기는 질풍 노도의 시기입니다. 무엇을 찾아 배우고 따라하려 해도 마땅한 롤모델을 찾기 힘듭니다. 그런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미래상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게 이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리네시아, 나의 푸른 영혼 - 세계일주 단독 항해기
알랭 제르보 지음, 정진국 옮김 / 파람북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작은 터전 안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 대양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은 실로 대단합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보면 이른바 남만인, 홍모인 들을 평하며 "야만인들이기는 하나 그 먼 곳에서 험한 파고를 헤치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대단하지 않냐"는 말을 합니다. 사실 이야말로 코미디 같은 품평이며, 서양인들이 19세기 한때 서세동점을 주도하며 세계의 패권을 잡은 건 15세기부터 꾸준히 시도해 온 저런 모험 정신, 탐구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만인은 제 좁은 방구석에 머물며 밖에 나갈 줄 모른 채 남을 평가하는 일에만 맛이 들린 종족들을 가리키는 게 맞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인 알랭 제르보가 1929년에 쓴 기행문이자 에세이입니다. 알랭 제르보는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이런 명저를 지을 만큼 폭 넓고 정확한 인문 지리 지식을 보유한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 소리를 들을 만한, 공부도 잘하고 운동 실력도 빼어난 만능인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당대에 국민영웅으로 사랑 받았겠죠. 이 저자분에 대해서는 책 말미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역자 정진국씨의 "귀로에서"라는 해설을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도 엄청 유익하고 재미있지만 해설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멋진 책의 제목은 "폴리네시아, 나의 푸른 영혼(이 구절도 제목으로 멋지죠)"이지만 원제 Sur la route du retour 역시 프랑스어로 "귀로에서"라는 뜻입니다. 


이런 저자들을 보면 인문 지리 지식도 빼어나지만 언어학적 호기심과 감각, 습득력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르보 자신이 타고난 머리 자체가 대단해서이겠지만, 생소한 언어를 접했을 때 일단 배우고 싶어하고, 어떤 사전의 체계적 지식도 없이 네이티브의 말을 듣는 즉시 형태소와 음운을 분석하고, 그것을 모국어나 자신이 아는 다른 외국어와 대조하고... 이런 과정이 거의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듯합니다. 이 책 p17 같은 곳에서 제르보는 현지인의 ng 발음 같은 것을, 자신이 전에 들었던 동폴리네시아에서는 못 듣던 것이라며 즉시 분석하려 듭니다. 사실 한국인 입장에서는 프랑스어 특유의 ng 역시 어말의 자음이 아니라 모음과 일체화하여 발성되는 그 자체가 신기합니다. 중국어도 이를 운모로 처리하며 별개의 자음으로 취급하지 않죠.


"건강하고 잘생긴 인종이다.(p20)" 제르보보다 훨씬 앞선 시기 프랑스인들이나 영국인들도 미지의 세계(그들 입장에서)를 탐험하며, 그저 현지인을 무지하고 추하다며 무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처럼 훌륭하고 강건한 육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이들은 존중했습니다. 이를테면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인, 네팔의 구르카인, 또 시크 교도 등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에게 특별 대우를 받았고 일부 탐험가들의 눈에 비친 마사시족도 그러했습니다. 조선인들에 대해서도 비숍 부인이 대체로 칭찬을 했었죠. 잘난 건 누구 눈으로 봐도 잘난 것입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에 성공했을 때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 등의 "우주인"들도 다 신체 강건하고 빼어난 지능, 상황 대처 능력을 갖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 책 p48 같은 곳에서 제르보와 그의 동료들이 겪는 고초를 보면, 오늘날 무슨 호화 크루즈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며 즐기는 항해 같은 것은 그저 도락이나 호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뭐 간혹 뱃멀미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고작 그 정도이며, 제르보가 활약하던 시기만 해도 먼 거리 항해는 목숨을 걸거나 신체 일부가 크게 다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감행할 수 없던 "모험"이었죠. 제르보는 20세기 초반 사람이라서 그 전 세기와 상황이 같지는 않았겠지만 여튼 책에서 보듯 이런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선교단이란 사실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길에서 아주 간혹 마주치곤 하는 이들을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대하지는 않겠지만, 15세기 이래 해외에 파견되는 선교단은 대단한 자질로 무장한 인재들이었고 현지에 자리를 잡거나 했을 때 누리게 되는 특권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도 p55 같은 곳에 "왕의 권력은 허울뿐이었다. 모든 일을, 마리스트 선교단이 선택한 토착귀족 장관들이 선택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단 토착 귀족과 협력하게 된 선교단은 정치, 행정, 경제 모든 면에서 그 지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거고 조선의 경우 이재수의 난도 따지고 보면 이런 배경이 있죠. 혹은 18세기 과라니 족의 사정도 이것과 비슷했을 겁니다. 선교단은 아주 간혹 로마의 본진(Holy See. 당시에는 바티칸이 그저 지명이었으므로)이나 식민 본국과 충돌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르보 자신이 운동이나 잡기에 능하고 두뇌도 영리했던 만큼 현지 마타우투의 청년들과도 쉽게 친해졌을 겁니다. 평판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거지 소수의 친분을 의식적으로 조작해서 어울리지 않는 외투처럼 걸칠 수 있는 게 아니죠. 제대로 된 한 사람의 관찰자만 나타나도 "엉터리"라는 게 바로 판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모자란 분수에 맞게 정직하게 살면 되지 뭐하러 그렇게 불안하게 사는지 모를 일이죠. "황토색 분장을 칠하고, 꽃잎을 엮어 목에 걸고 화관을 썼다. 춤은 활기와 야성미가 넘쳤다." 예를 들어 스트리트 워먼 파이터 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 우리가 받는 느낌 같은 걸까요?


"불 위를 걷는 사람들"의 능력은 봐도봐도 신기합니다. 저자도 그리 생각했지만, "교묘하게 위장된 환상일 것이다"라며 역시 지성인다운 분석력을 발휘하려 듭니다. 12일이 지나 그 유명한 부갱빌이 인상 깊게 보았던 에로망고 섬에 도착합니다. 부갱빌이 누구인지 모를 독자를 위해 책에서는 따로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의 행적은, 그보다 앞서 태어난 또하나의 두드러진 인물의 전철과 궤가 겹치곤 하죠. 패튼은 생전에 자신이 한니발의 환생이라며 큰소리 쳤는데 비록 픽션상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이 제르보를 20세기의 오디세우스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그리 과장만은 아닙니다. 


섬들에는 영국 정부도 있고 프랑스 정부도 있다고 합니다. "멀티플 주리스딕션"이기라도 할까요? "각자 자기네 정부의 일을 보았는데 분쟁이 생기면 희한하게도 에스파냐 판사가 주재하는 국제법원이 맡았다" 독자가 읽기에도 정말 희한합니다. 이 정부와 법정이 자리한 콘도미니엄을 현지에서 판데모니엄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우습습니다. 제르보는 "태평양의 프랑스 총독 기용 씨"의 초대를 받았으나 일정을 수정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아직 전간기의 풍요를 누릴 프랑스, 그 식민지의 한 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스프레이호의 유명한 슬로컴 선장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곳을 30여년 전에 지나갔을 것이다." 촌장이 진짜 순종 양키라면서 늘씬하게 말랐다고 감탄하면서 전해 주는 이야기에 저자 제르보가 답을 하는 대목입니다. "벌써 30년이 지났어? 하긴." 옆에는 루이스라는 소년이 타는 듯한 호기심(책의 표현입니다)으로 눈을 반짝이며 제르보와 아빠인 촌장의 말을 듣습니다. 촌장은 제르보에게 부탁합니다. 아들을 데려가 달라고. 이 촌장은 현지인과 프랑스인의 혼혈들과 오래 섞여 살았는데 낭트 태생이라고 하니 본인은 순수 프랑스인인 셈입니다. 그래도 피부가 검게 그을렸고 현지의 풍토에 적응하다 보니 혼혈인지 헷갈리게 하나 봅니다. 프랑스인인데도 모국어를 거의 잊고 어설픈 영어와 현지어를 씁니다. 제르보는 여기서도 자신이 더 익숙한 폴리네시아를 떠올립니다. 촌장의 딸 하나가 시중을 드는데 정말 예전 영화에서 보듯 외지인에게 딸을 애써 주려는 현지인 추장의 클리셰 같은 행태를 보는 듯합니다. 물론 이 시점은 20세기 전반이라서 그런 풍습의 일환은 아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태평양 상의 섬까지 건너와 살게 된 사람들은 매우 강건한 육신에 총명한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책 곳곳에는 훌륭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감탄이 자주 나옵니다. 또 아무래도 인구 수가 많다 보니 여기까지 건너 온 말레이 인들의 목격도 언급되는데 "남자 같지 않다"는 게 그의 평가입니다. 칭찬은 아니겠으나 이때로부터 몇 년 후 아인슈타인도 중국 근방의 사람들을 보고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 


인도양을 통과하여 제르보는 무려 희망봉에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사적인 항해이다 보니 위도 경도 등을 일일이 본인이 다 점검해야 하고 이 일정이 얼마나 고달프며 또 고도의 기술을 요할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세인트헬레나까지 와서 현지 군인들과 축구도 한 판 합니다. 프랑스의 만능 스포츠맨과 축구 종주국 청년 병사들과의 대결이 볼만했을 듯합니다. 


카보 베르데를 지나 대서양에 진입한 그는 북위 5도(즉 적도 근방이라는 뜻이죠)상에서 상어떼를 만납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우리 흑산도 앞바다에서 보곤 하는 홍어와 달리 몸집이 매우 큰 외투홍어도 목격합니다. 산 빈센테에서 그는 거의 좌초하여 여기서 피레크레를 잃을 뻔합니다. 책 처음부터 활유화하여 내내 언급되는 피레크레는 역주에 친절히 설명되었듯 파이어크레스트, 즉 그가 몰고 다니는 배 이름입니다. 배의 그림도 자세히 책에 그려져 있으니 배의 모양을 떠올려 가며 이 책을 읽어야 실감 만점입니다.


그는 긴 항해를 마치고 르아브르 항에 진입합니다. 혹시 그에게 사고나 나지 않았는지 영사관원과 기자들이 미리 알아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 무렵 미국의 린드버그라는 비행사가 큰 화제를 모아 가며 대서양을 비행기로 횡단한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알랭 제르보란 이름이 낯선 독자라면 그 린드버그 비슷한 위상의, 프랑스 태생 셀럽이 펼친, 훨씬 더 어렵고 장거리에 걸친 항해였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용감한 사람의 위대한 모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 환영, 감탄, 열광을 모으게 마련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으른 십대를 위한 작은 습관의 힘
장근영 지음 / 메이트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자녀가 훌륭한 인물이 되기 바랍니다. 버젓한 전문직종에 종사하거나, 남들한테 존경을 받거나, 빼어난 기술과 지식, 어떤 원리를 발견하는 창의적 인물이 되거나... 그런데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도 이를 갈고 닦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재능에 알맞은 훈련 과정을 겪으려면 몸에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십대들이 딱히 어른에 비해 게으른 건 아닙니다. 오히려 어른들보다 더 부지런한 면도 있죠. 그런데 십대때는 아직 "해야 할 일"에 대한 각성이 절실하지 않고 이런 것보다는 딴짓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니 어른들이 보기에 "게으른" 것이죠. 여튼 버릇만 잘 들이면 훨씬 큰 열정을 갖고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십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저자는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뇌가 좋아하는 습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들도 그렇지만 우리의 뇌 역시 좋아하는 습관, 그렇지 않아서 뒤로 밀려나는 습관이 따로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뇌가 원하는 게 서로 다르다니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사실 우리도 다 아는 바입니다. 내가 내 마음같지 않다는 것, 행동, 욕구, 당위를 관장하는 기제가 다 달라서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이 매우 잦다는 것. 


저자는 "우리의 뇌가 게으른 녀석"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어른들은 이 점을 알고 노력이라도 하지만, 십대들은 그걸 모르고 게으른 (자신의) 뇌가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기 때문에 어른들은 "애들이 게으르다"라고 지레 단정을 해 버리는 거죠. 사실 게으른 건 사람(어른이든 애들이든)이 아니라 "뇌"입니다. 여기서 "뇌"가 대체 뭘 뜻하는 건지 먼저 정리하자면, 저자는 "내장이나 호흡기관을 움직이기,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정보를 해석하기, 걷거나 달리면서 균형 잡기" 등을 하는 기관이 바로 "뇌"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 "아 내가 지금 이러면 안 되는데, 회사에서 시킨 일을 해야 하는데" 라며 나 자신을 다그치고 통제하려 드는 정신, 초자아, 자아 등을 가리키는 말이 (이 책에서는) 아니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순수하게 자연과학적 의미에서 신경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이 뭐가 되었든 간에 얘를 잘 길들여야 애들이든 우리 자신이든 "안 게을러지고 원하던 일을 제때 잘 해 낼 수" 있겠습니다. 


"갈망이 행동을 유발한다." 우리의 뇌는 이유, 동기, 계기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것을 갈망해야 행동을 유발하게 합니다. 이것은 애들 같으면 또래 집단에서 뭐가 유행이다, 이런 게 가장 큰 갈망의 생성 이유겠죠.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주식해서 코인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하면 나도 해야지 같은 갈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보상"이 안 생기더라, 이려면 이 갈망은 일회성입니다. 따라서 이런 행동은 "습관"으로 바뀌질 않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제임스 클리어의 주장을 인용하며 단서→갈망→습관→보상→단서의 순환이 잘 이뤄지는 게 핵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특정행동을 막기 위해 부모가 애한테 겁을 준다, 그래서 아이가 행동을 한다, 상황이 마무리된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상황을 마무리하는 행동은 한 번이면 되는데(세수, 옷매무새 정리, 문단속, 마지막으로 재검토), 이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강박"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뇌가 겁을 먹어서 쪼그라든 탓에, 침착성을 잃고, 두려움을 그저 없애기 위해서 반복하는 것이며 심하면 정신과에 가 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물론 필요도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게 문제이지, 과업이 중요하고 난도가 높으면 몇 번을 재검토해도 무방하며 오히려 결과에 유익합니다.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자가 자신의 열등감을 무마하기 위해 잘하는 사람더러 "강박" 타령을 하는 건 정말 한심하죠. 


여튼 저자는 이런 말로 1장을 마무리 짓는데요, "두려움을 채찍질하는 건 오히려 진짜 답에서 멀어지는 것이다(p52)." 애들한테 좋은 습관을 들이고 나쁜 습관을 끊기 위해 다그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어른들이 꼭 명심해야 할 바입니다. 어른 입장에서는 "이 정도야 뭐" 하며 혼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애들은 안 그럴 수도 있고 평생 트라우마로 남거나 이상한 강박이 생길 수도 있죠.


"생각하는 것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이 말은, 지금 이 책은 10대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는 방법에 대해 우리 독자에게 가르치는 책이지만, 그런 맥락을 떠나서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그저 생각에 머물 뿐 우리들을 전혀 실제로 바꿔주는 바가 없습니다. 이 책에서도 처음부터 "뇌"와 "우리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고 논의를 전개하지 않습니까? "나는 이렇게 진심을 다해서 말하는데 왜 너희들은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니?" 아무리 친구들에게 호소해도 이 사람의 전적을 알기 때문에 말이 씨가 안 먹힙니다. 이게 지금 이 책에 실제 나오는 예입니다. 다들 이런 사람 예를 하나 정도는 보았지 않습니까? 어른도 이러한데 하물며 애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에도 오늘은 뭘 해야지 라며 몇 번이고 결심하지만 작심삼일입니다. 무엇이 나에게 이로운지 이론적으로 감성적으로 100% 납득하는데 실천에 옮기지를 못하며, 에휴 나는 그저 이렇게 생겨먹었나 보지 하며 나중에는 자포자기합니다. 이러니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십대도 십대이지만 저는 어른들 역시 이 책을 보고 똑같은 방법으로 습관 교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오히려 중학생 고등학생들 보는 책을 보고 겸허한 마음으로 공부를 새로 시작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애들 책이 쉽게 쓰였다는 장점도 있겠고 말입니다. 


"동기는 감정이고 감정은 (곧) 변덕이다" 진짜 맞는 말입니다. 누구한테나 동기는 생기며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 한 번 안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도 행동에는 안 옮겨집니다. 이게 그저 감정에만 머물고, 그건 정말로 변덕스러워서 행동으로 굳기 힘들고 따라서 결과가 성과가 안 나옵니다. 앞에서 말한 순환체계를 제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긍정적인 행동 습관"이 감정 중에서도 가장 "변동성이 적은" 감정을 채워 주는데, 그 감정이 바로 "자신감"이라고 합니다. 자신감은 쉽게 치솟지도 않고, 한번 근거가 있게 마련된 자신감은 쉽게 죽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말합니다. "순환체계와 자신감! 이 둘을 통해서만 우리는 긍정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p75)."


저자는 마크 그리피스 박사의 이론을 인용하며, 나쁜 습관이 그저 나쁜 습관에 그치지 않고 아주 심각한 수준까지 왔을 때 나타나는 게 행동 중독(p108)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진짜 만족감이 뭔지를 몰라서, 순간의 공허감을 그저 채우기 위해서 이런 행동 중독에 빠진다고 하네요.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대충 하는 습관, 스마트폰 중독, 늦잠 자고 늦게 일어나기" 이런 것들을 책에서 예시하며, "대부분은 이런 행동이 자신도 잘못임을 알고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건 즉시, 마음 먹은 즉시,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서 내 몸에서 끊어내지 않으면 인생 전체를 망칩니다. 


그렇다고 무모한 싸움에 도전하여 거창하게 패배한 후 자신감도 상실하고 "역시 난 안 돼" 같은 패배감만 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 작은 것 여러 개를 골라 이긴 후 그 결과 좋은 것을 몸에 습관으로 붙이고 더 큰 싸움(힘들지만 좋은 습관 길들이기, 아주 나쁜 습관 끊어내기)을 준비하자는 겁니다.


책에서는 이런 예도 듭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기는 싸움만 하는 기회주의자였다" 물론 민족의 성웅에 대한 폄하나 모독이 아니라, 오히려 저렇게 영리하셨기 때문에 더 위대하셨다는 겁니다. 11배나 병력이 더 많은 명량은 그럼 어떻게 된 건가? 우리는 가망없었겠다고 여기지만, 그분 눈에는 이 싸움이 충분히 이길 가망이 있다고 보여서 그렇게 한 것이고 또 실제로 이긴 것입니다. 사실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을 하면 부하들부터 제 목숨 살려고 다 도망갑니다. 이분 시키는 대로 하면 이기겠다는 확신이 있었으니 휘하 장졸들도 일심동체로 싸운 거죠. 반대로 가등(=가토)의 목을 베어 오라는 명령은 임금이 시켰는데도 안 따랐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왜 가망 없는 전투에 아까운 화력, 병력을 낭비하겠습니까? 우리도 성웅이신 이 충무공처럼 이기는 싸움을 해야지, 빤히 지는 싸움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우리도 잘 아는 스키너 박사의 이론을 인용하며 "보상을 주되, 자주가 아닌 드물게, 또 나중이 아닌 즉시, 보상을 주게 하라"고 합니다. 시간적/공간적 인접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게 아니면 행동과 보상 사이의 거리가 멀어져서 습관화가 어렵습니다. 또 드물게 줘야 하는데, 이건 예를 들어 저 스키너 박사의 실험에서 쥐한테 레버를 매번 누를 때마다 보상을 주면 "배가 불러서" 더 이상 행동을 안 한다고 합니다. 배가 고플 때쯤 맞춰서 줘야 지속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죠. 우리가 스포츠 선수들의 나태하고 성의 없는 플레이를 볼 때마다 "저 새x 이제 배가 불렀구만!" 하고 욕을 하는 걸 떠올려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워크에식이 뛰어난 선수들도 많고 인터뷰에서 그게 팍팍 느껴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어제 롯데 손아섭 선수처럼 말입니다. 


습관을 잘 들이기 위해서는 소통이 효과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눈 똑바로 맞추기"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저자는 하다못해 식당에서 서빙하는 분들에게도 "꼭 눈을 맞추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독자들도 다 짐작하지만 아예 눈을 안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 둘이 눈을 마주치면 거의 반드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더라고 하네요. 심지어 저자는 청소년들에게, 혹 누구한테 맞을 때 한번 때리는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라고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더 맞을 수도 있지만(ㅋ)"... 저는 예전에, 음, 좀 끔찍한 이야기지만 청나라 때 능지처참을 행하는 형리가, 당하는 죄수의 눈꺼풀을 얇게 잘라(이것도 끔찍하지만) 눈을 덮는 게 관례였다고 하는데 이유는 형리 자신이 죄수의 눈을 보면 차마 형을 집행할 마음이 안 들어서였다고 합니다(이 역시 이기적인 행동이지만). 물론 눈만 맞춘다고 다가 아니라 예를 들어 나이 드신 분들에게 아이컨택한답시고 눈을 빤히 보면 무례하다고 혼 날 수 있다는 말도 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자주 가져서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하고, 혼자 된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한 사람이 되며, 매사에 너무 기대를 크게 갖지 말며, 수업 시간에는 최대한 집중하는 게 이후에 이중으로 시간을 쓰지 않는 비결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의 특징은 항상 거창하게 결심하고 너무 높은 목표를 세운 후 쉽게 포기하고 쉽게 타협합니다. 집요하게 결심하고 작은 것부터 성취하며 나 자신을 여튼 좋게 좋게 바꿔 보려는 사람이 진정 인생을 아름답게 가꿔 나갈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
성지혜 지음 / 문이당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나를 이겨라>에는 작가 성지혜님과 고 박경리 선생 사이의 여러 인연, 또 유명한 문인들의 사연이 나옵니다. 소설의 형식이지만 회고담이나 마찬가지인 듯 보입니다. 박경리 선생뿐 아니라 <등신불>, <무녀도>, <화랑의 후예> 등 훨씬 앞선 시기에 걸작을 남긴 거장 김동리 선생도 등장하며, 거제와 통영이 낳은 위대한 시인인 청마 유치환 선생이라든가 이영도 선생, 교과서에도 작품이 여럿 실린 시조시인 이호우 선생 등 전설적인 문학가들이 두루 언급됩니다(실명 언급은 없으나 "사위분"인 김지하 시인도 아주 잠시 출현). 바로 다음에 나오는 작품에 쓰이기도 한 단어(동음이의어)인데, 유치환 선생은 특히 시 <깃발>에서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란 명 구절로 사랑 받은 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영도 선생에 대해서는 "섬섬옥수가 아닌 손"이란 묘사가 특히 기억에 남네요. 작가님은 ㅈ여고 출신이라고 나오며 독자인 저도 개인적으로 진주 출신 지인들이 꽤 되는데(고교 은사님 포함) 하나같이 자부심이 높고 명문교를 나온 엘리트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고장 자체가 교육을 중시하고 문장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뿌리 깊다 보니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진주, 통영, 고성 일대가 다 그러하죠. 


작가님이 언니처럼 따른다는 김지연 작가님도 원래 이름이 "명자"이셨으며 성 작가님도 본명인 "명숙(밝을 명이 아니라 숨 명 자라고 나옵니다)" 대신 김시종 선생에게 새 이름 "효장"을 받습니다. 이처럼 젊은 시절에 거장에게 손수 필명을 지어 받은 체험이 정말 큰 영광이었을 듯합니다.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 창작을 둘러싼 비화도 소개되는데... 이 <나를 이겨라>는 30쪽 남짓 분량입니다만 사연과 인물들이 묵직해서인지 읽으면서 아주 긴 장편처럼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저희 모친이 통영여고 졸업자라서 더 관심 깊게 읽었습니다. 


<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는 이 책의 표제작입니다. 냄새에 관해 개인적으로 특별한 사연이 있는 화자 새미와 그 딸 토리, 또 남편분 항조, 돈 많은 70대 과부이신 "마님", 이분이 키우는 개 린드버그, 돌아가신 남편 루이 등이 등장합니다. 터키에는 터키석이 없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으며 새미가 모으는 향수병에는 정작 향수가 없습니다. 왜 컨텐트인 향수는 간혹 버리기까지 하며 병만 모은 컬렉션인지는 작품만 읽어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 있으며 최대한 돌려 말하는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주제에 대한 감도 잡힙니다. 수집가들이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발견했으나 현금이 부족할 때 자신의 다른 수집품과 교환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습니다. 향수는 香水이며 鄕愁가 아니지만. 


오동은 왜 그저 오동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느티는 항상 뒤에 "나무"가 붙어야 하는가. 한남동 회장님 댁에서 정원사를 지낸 기현은 미조 앞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내내 "나를 낳은... 생모"라 지칭하며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대화의 말투라든가 인생에 대한 씁쓸한 관조 어린 그 내용만 보면 인생의 황혼을 벌써 지난 두 분이 나누는 말 같습니다만 사실 두 사람 다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이입니다. 미조는 자신이 근무하는 유치원에 일일 강사로 기현을 초빙합니다. 원아들에게 들려 줄 강연치고는 좀 내용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만. 여튼 앞 작품의 새미처럼 미조도 크리스천인지 예루살렘 등 성지 순례 이야기가 또 등장합니다. 맨 앞 작품 <나를 이겨라>에도 민족주의 관련 언급이 자주 나왔는데 여기서도 가상의 원로 목사님 설교를 통해 단 지파와 우리 민족 사이의 연관이 짧게 코멘트됩니다. 두 사람 다 생계가 막막할 뻔한 상황에서 부유한 인척 등의 연줄로 직업을 마련한 사연도 비슷합니다. 서신 교류 말고 몸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어디서 별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요. 김광섭 시인 作 <저녁에>의 한 구절처럼. 


<청백리의 숨결>에는 오리 이원익, 미수 허목, 그리고 서애 류성룡 세 분 재상의 생애가 화자 류담을 통해 이야기됩니다. 잘 알려진 예송 이야기도 있고, 우암한테 미수가 비상을 처방해 준 이야기 등등 해서 마치 예전 벽초나 월탄의 작품에 구수한 옛 야사가 실린 작품을 읽는 느낌인데... 안현철 박사, 장규호 화백 등 가상의 인물들이 가끔 한 마디씩 거드는 속에 작가의 진짜 의도(?)가 숨어 있는 듯도 하네요. 이처럼 뛰어난 지성인들, 유능한 관료들이 조심스럽게 그 초석을 놓은 나라였기에 조선이 가난할망정 그 시대 다른 나라들을 고려할 때 비교적 태평성대를 누린 건데... 작품 마무리는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는 풍요 예찬"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미우새의 날개는 어디로 갔을까>. 레게머리... 1990년대에 크게 유행한 스타일인데 dreadlock(p146)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이야기는 성경 속의 나실인(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까지 미쳐 삼손과 들릴라(데릴라)까지 나옵니다. 지혜가 두개골에 있다, 머리털은 그 알곡이다... 삼손이라고 하면 그저 힘만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이나 겨레나 그 생존의 비결은 지혜에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분(문맥상 심인성 같습니다만), 지성이 약간 미발달한 청소년... 그런데도 분위기는 어둡지 않고 오히려 럭셔리에 가까운 건 저만의 착각인지. 이 작품도 <향수병...>에서처럼 방대한 인문 지식이 수놓아졌습니다.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맨 앞 작품만 빼고 외국인들이 꼭 얼굴을 내밉니다. 인물들은 외국을 자주 다니거나 외국인과 깊이 교류하거나 해서 글로벌한 감성(마인드까지는 모르겠지만)을 가진 이들입니다. <그 남자가 마냥 귀여워>에서는 한국형 미남, 외국에서 두루 통할 아름다운 얼굴에 대한 품평과 논의 끝에 혼혈아 이슈, 혈육에 대한 보편적인 그리움과 애정 문제까지 차분히 착륙합니다. 다른 작가 같으면 굉장히 심각하게, 그러나 뻔하게 발전할(퇴보할?) 주제인데도 말입니다. 


<결을 향(向)한 단상>에서는 신화인지 기독교 성경인지 아리송한 이야기가 많은 결, 이런 결 저런 결 들을 건드리며 몽환적으로 펼쳐집니다. 번식은 사실 야만적이고 무섭지만 생명에게는 유일한 진리이죠.


"신의 손"은 보통 귀신 같이 골을 잘 잡아내는 축구 골키퍼를 칭송하는 단어인데(반대로 뻔뻔스러운 반칙에 대한 비꼼이거나), 여기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입니다. 에피그래프에 이사야서 49장 일부가 인용되는데... 이 작품은 이 책에 실린 중 저한테는 가장 서사가 뚜렷이 다가왔으며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 싶었습니다.  


문학수첩 이덕화 주간이 쓴 권말의 작품해설을 보면 "소설은 어떤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과 관계에 의한 긴장을 유발하는 서사(p265)"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와 비슷하게 "희곡은 의지와 의지 사이 갈등의 집약"이란 정의도 있죠. 그 갈등이라든가 긴장은 그리스 고전에서처럼 영웅들, 혹은 신들 사이에 벌어지는 거창한 것만은 아닙니다. 한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작은 망설임이라든가, 기분 상함이라든가, 괜한 젠체함이라든가, 무료하기 짝이 없어서 나 혹은 내 지인의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에 던진 작은 돌 하나가 빚은 소소한 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갈등이고 긴장인데, 때로는 이것이 거대한 역사와 사건과 작은 접점을 빚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작은 개인의 새초롬한 내면으로 별 파문 없이 복귀했다 해도 얼마든지 명작 소설의 멋진 성취가 될 수 있겠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의 쓸모 - 상한 마음으로 힘겨운 당신에게 바칩니다
홍선화 지음 / 메이트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정은 더하기와 빼기가 분명하다는 말이 있다(p25)." 예를 들어 뭘 배울 때, 그게 지식이든 세상 사는 요령이든 간에, 머리에 들어와도 들어온 것 같지가 않고, 또 분명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까맣게 잊혔고... 머리로 다루는 사항은 본래 더하기와 빼기가 불분명합니다. 이게 분명하다면 그건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이죠. 그런데 감정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상처를 입었으면 그 감정의 상처가 오래갑니다. 반면, 좋은 일이 있으면 감정적으로 분명히 반응합니다. 이걸 해 냈다 싶으면 뛸 듯이 기쁘지 그냥 무덤덤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감정은 다 버겁게만 느껴져 거부하고 싶다." 사람이 기쁠 일이 있으면 또 슬플 일도 있다는 건데, 그럴 바에는 기쁜 일(이라기보다 기쁜 감정)도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거죠. 


"우울증은 누적된 상처와 결핍의 결과인 셈이다. 그러니 집중해야 할 건 우울증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 상처와 결핍으로 다친 마음이겠다." 작은 상처라도 매번 소독하고 아물게 다스려줘야지 방치하면 그게 쌓이고 쌓여 큰 병 된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어디서나 면역력을 강조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팬데믹 이후에는 너도나도 면역력에 신경 씁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노이로제는 면역력을 떨어뜨린다(p32)." 비유적 표현인데 여기서 면역력이라 하면 신체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걸 뜻합니다. "정신적 면역력이 약해지면 스트레스에 쥐약해지고 작은 일에도 민감해진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아홉 살인데 자꾸 자기 손목을 커터칼로 긋는 아이가 있습니다. 일본에 이런 증후군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한국에 이런 경우가 있다니 확실히 어떤 기제가 있긴 한가 봅니다. 엄마 아빠가 무섭게 싸우고 나서 엄마가 병원에 실려 갔고, 그 후로 두 분이 별거한다고 합니다. 부모가 싸우는 것만 봐도 아이는 불안하고 무섭겠는데, 이런 일이 있었으니... 손목을 긋는 이유는 아이가 직접 말하는데 "내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하기 위해(p35)"라고 하네요. 한편으로 "그랬구나" 하고 수긍이 되면서도 여전히 가슴이 아프고 섬뜩합니다. 그 예민한 곳에 칼이 가까이 간다는 것만으로도 무섭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렸을 때 주기철 목사의 생애를 다룬 영화를 본 적 있는데 거기서 (일제 당국이 저지른) 주 목사의 살해 장면에 그 비슷한 설정이 나와서 지금까지도 섬뜩한 기분이 듭니다. 저희 부모님은 왜 그런 무서운 영화를 애한테 보여 줬는지 원... (살아 있다는 건 다른 방법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여튼 이 대목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소아 우울의 위험성, 심각성에 대한 것입니다. 아이를 둔 부모님들은 꼭 참고하실 만합니다. 


요즘은 메타인지를 많이들 강조합니다. 이 책에서도 p47 "마음살핌"에서 초인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어떤 청중은 "초인지는 스캔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답니다. 나 자신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죽 훑는 일. 여튼 여기서 중요한 건 "내 생각에 시비를 걸지 말자"는 겁니다. 자꾸 "걱정하고 시름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 초인지는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감정 낭비, 학대 상태로 복귀할 테니 말입니다. 초인지는 내가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있는 그대로 (일단은) 바라보는 것이니까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반복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자신 속에 블랙홀을 만들게 하지 말라(p46)."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건 "셀프 논박"입니다. 책에 나온 예를 그대로 옮겨 보자면 "울면 안 된다"를 "울어도 된다"로 뒤집는 건 셀프 논박이 아닙니다. 그냥 부정이죠. 이게 아니라, 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그 맥락, 상황(이게 중요합니다)을 떠올려 보고, 마치 제3자처럼, 상담자처럼, 내가 내 자신을 다독이라는 거죠. 이때 나오는 말이 "울어도 괜찮아"입니다. 이렇게 (저자의 말에 따르면) 어느 정도 마음의 힘이 강해졌을 때, 내가 내 자신을 달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블랙홀이라는 표현이 실감 납니다. 부정적인 감정의 덫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그런 구멍이 간혹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상처를 입으면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기제를 만들어 낸다.(p77)" 이런 걸 보면 그저 유기체의 대사 작용만으로 육신이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게 효율적이든 그렇지 않든 심리적인 무엇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사람이라는 동물이 무척 신기합니다. 아마 동물도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망상이란 무엇인가, 이 방어체계가 이떤 이유에서든 뚫리면 만들어지는 거라고 합니다. p79에서는 정신분석가 윌프레드 비온의 말 "Descent into a state of Reverie!"가 인용됩니다. descent가 동사로 쓰인 예죠. 저자가 이 앞 페이지에서 인용한 <정신적 은신처>는 검색해 보니 구순을 바라보는 존 스타이너 교수의 유명한 저작이더군요. 독자인 저도 다음 기회에 읽어 보고 싶었습니다.


"조절력을 상실한 사람의 최선의 선택은 조절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p106)."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미 상실된 능력으로 뭘 하려 해 봐야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더 나빠질 데가 없다." 이 말도 참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인데 말이 쉽지 실제로 그렇게 되겠냐는 의심도 들었습니다만 저자는 실제로 바닥을 치면 그 반작용으로 올라오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올라오긴 하는데, 방향이 바뀌기는 하는데 실제로 얼마까지 다시 회복되느냐는 또 별개 문제고 일단 방향 전환의 동력을 얻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거죠. "그런 다음에야 그걸 끊어낼 마음을 먹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강조합니다. 정신적으로 어디가 아픈 사람, 알코올 등에 중독된 사람은 당연한 말이지만 혼자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일단은 전문가나 전문 기관을 찾아가 상담을 받아야 하며, 저자는 또한 "자율학습"도 권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을 찾아서 읽으라는 겁니다. 이때, 물론 당사자가 스스로 책을 읽고 문제 해결을 모색하면 좋겠으나, 옆에 있는 가족도 책을 찾아 주고 같이 읽으며 길을 함께 찾아나가는 걸 이 책 여러 군데에서 저자는 권하는 듯했습니다. 


대략 몇 년 전에 어느 정신질환자가 아직 어린 아이(생판 남)를 창 밖으로 던지는 사고가 났는데, 보통 매체에서는 정신질환자에게 편견을 갖지 말자고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대체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지 억울해하는 어느 어머니의 하소연을 접한 적 있습니다. 이 경우 법적으로는 오래 전에 이미 결론이 나 있고 문명 세계 공통의 해법이긴 합니다만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매우 부족하죠. 한편으로 그 가해자(...)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에 무슨 죄나 지은 것 같고... p140에 사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이런 경우는 참 답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저 당사자끼리 조금씩 양보해서 역지사지하는 수밖에....


우리 나라에는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남의 장점이 보이면 내가 괴로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타입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해코지에 나서는 인간도 있는데 당하는 사람도 그걸 가만 참고 볼 리가 없으므로 결국 아무 관계도 없는 남을 시기하는 못난 본인 손해입니다. 법으로 된통 당하면 그때 가서 물질적 손해가 나는 건 일단 별개로 하고, 시기하며 배알이 뒤틀려하는 그 순간도 결국 본인의 감정 대미지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 모든 시기심에 감정의 깊은 뿌리가 있으며 일단 남과 나를 비교하는 습관 자체를 멈추라고 충고합니다. 


어떤 자계서에서는 "당신이 백만장자가 되고 싶으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걸로는 불충분하다. 이미 된 것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하던데 이게 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돈을 쓰고 거드름을 피우라는 뜻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절실한 마음가짐이 있으면 마인드셋과 행동 자체가 모두 달라진다는 건데, 사실 가난한 사람은 애초에 가난뱅이의 습관과 사고 방식이 몸에 물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쩌다 큰 돈이 생겨도 이를 잘 간수하지 못하고 날리는 일이 많죠. 부자는 돈을 펑펑 쓰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돈을 필요한 곳에만 쓰는 사람입니다. 비슷한 논리로, 저자는 알코올 중독자 등 각종 질환자들에게 "당신이 이미 병을 고친 것처럼 행동하라(p174)"고 합니다. 중독자 중에는 자신에게 셀프 단죄를 하는 유형이 있어서, 잘못인 걸 알면서도 중독자의 분수에 맞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평생 중독에서 못 벗어나죠. 다이어트를 시도하는 사람이, 이미 날씬한 몸짱이 다 된 것처럼 행동한다면 아마 겁나서, 몸매가 아까워서 음식을 더 이상 못 먹을 것입니다....라고 여기며 독자인 저도 이미 날씬한 사람이 다 된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사람이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마음을 잃고서는 그럴 줄을 도통 모른다. 학문의 도는 다른 게 아니라 그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뿐이다."(p207)


어디 학문뿐이겠습니까? 우리들이 성실하고 보람된 일상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을 바로 다스리고 있어야 할 곳, 가야 할 길에 제대로 놓는 게 최우선입니다. 마음을 챙기는 방법을 자꾸 소홀히하면 결국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환우들처럼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분들도 꼭 제 자리로 돌아오셔야 하겠고, 우리들도 부쩍 경각심을 가지며, 먼저 내 마음 내 감정을 잘 돌보는 게 가장 우선순위가 높고 큰 일 하는 것이라는 점 다시 새겨야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