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네시아, 나의 푸른 영혼 - 세계일주 단독 항해기
알랭 제르보 지음, 정진국 옮김 / 파람북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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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은 터전 안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 대양을 향해 나아가는 결단은 실로 대단합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보면 이른바 남만인, 홍모인 들을 평하며 "야만인들이기는 하나 그 먼 곳에서 험한 파고를 헤치고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대단하지 않냐"는 말을 합니다. 사실 이야말로 코미디 같은 품평이며, 서양인들이 19세기 한때 서세동점을 주도하며 세계의 패권을 잡은 건 15세기부터 꾸준히 시도해 온 저런 모험 정신, 탐구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만인은 제 좁은 방구석에 머물며 밖에 나갈 줄 모른 채 남을 평가하는 일에만 맛이 들린 종족들을 가리키는 게 맞습니다. 


이 책은 프랑스인 알랭 제르보가 1929년에 쓴 기행문이자 에세이입니다. 알랭 제르보는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이런 명저를 지을 만큼 폭 넓고 정확한 인문 지리 지식을 보유한 매우 뛰어난 지성인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 소리를 들을 만한, 공부도 잘하고 운동 실력도 빼어난 만능인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당대에 국민영웅으로 사랑 받았겠죠. 이 저자분에 대해서는 책 말미 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역자 정진국씨의 "귀로에서"라는 해설을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도 엄청 유익하고 재미있지만 해설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멋진 책의 제목은 "폴리네시아, 나의 푸른 영혼(이 구절도 제목으로 멋지죠)"이지만 원제 Sur la route du retour 역시 프랑스어로 "귀로에서"라는 뜻입니다. 


이런 저자들을 보면 인문 지리 지식도 빼어나지만 언어학적 호기심과 감각, 습득력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르보 자신이 타고난 머리 자체가 대단해서이겠지만, 생소한 언어를 접했을 때 일단 배우고 싶어하고, 어떤 사전의 체계적 지식도 없이 네이티브의 말을 듣는 즉시 형태소와 음운을 분석하고, 그것을 모국어나 자신이 아는 다른 외국어와 대조하고... 이런 과정이 거의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듯합니다. 이 책 p17 같은 곳에서 제르보는 현지인의 ng 발음 같은 것을, 자신이 전에 들었던 동폴리네시아에서는 못 듣던 것이라며 즉시 분석하려 듭니다. 사실 한국인 입장에서는 프랑스어 특유의 ng 역시 어말의 자음이 아니라 모음과 일체화하여 발성되는 그 자체가 신기합니다. 중국어도 이를 운모로 처리하며 별개의 자음으로 취급하지 않죠.


"건강하고 잘생긴 인종이다.(p20)" 제르보보다 훨씬 앞선 시기 프랑스인들이나 영국인들도 미지의 세계(그들 입장에서)를 탐험하며, 그저 현지인을 무지하고 추하다며 무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처럼 훌륭하고 강건한 육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이들은 존중했습니다. 이를테면 인도 북서부의 펀자브인, 네팔의 구르카인, 또 시크 교도 등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에게 특별 대우를 받았고 일부 탐험가들의 눈에 비친 마사시족도 그러했습니다. 조선인들에 대해서도 비숍 부인이 대체로 칭찬을 했었죠. 잘난 건 누구 눈으로 봐도 잘난 것입니다.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에 성공했을 때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 등의 "우주인"들도 다 신체 강건하고 빼어난 지능, 상황 대처 능력을 갖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이 책 p48 같은 곳에서 제르보와 그의 동료들이 겪는 고초를 보면, 오늘날 무슨 호화 크루즈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며 즐기는 항해 같은 것은 그저 도락이나 호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뭐 간혹 뱃멀미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고작 그 정도이며, 제르보가 활약하던 시기만 해도 먼 거리 항해는 목숨을 걸거나 신체 일부가 크게 다칠 각오를 하지 않으면 감행할 수 없던 "모험"이었죠. 제르보는 20세기 초반 사람이라서 그 전 세기와 상황이 같지는 않았겠지만 여튼 책에서 보듯 이런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선교단이란 사실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길에서 아주 간혹 마주치곤 하는 이들을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대하지는 않겠지만, 15세기 이래 해외에 파견되는 선교단은 대단한 자질로 무장한 인재들이었고 현지에 자리를 잡거나 했을 때 누리게 되는 특권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이 책에도 p55 같은 곳에 "왕의 권력은 허울뿐이었다. 모든 일을, 마리스트 선교단이 선택한 토착귀족 장관들이 선택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단 토착 귀족과 협력하게 된 선교단은 정치, 행정, 경제 모든 면에서 그 지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거고 조선의 경우 이재수의 난도 따지고 보면 이런 배경이 있죠. 혹은 18세기 과라니 족의 사정도 이것과 비슷했을 겁니다. 선교단은 아주 간혹 로마의 본진(Holy See. 당시에는 바티칸이 그저 지명이었으므로)이나 식민 본국과 충돌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르보 자신이 운동이나 잡기에 능하고 두뇌도 영리했던 만큼 현지 마타우투의 청년들과도 쉽게 친해졌을 겁니다. 평판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거지 소수의 친분을 의식적으로 조작해서 어울리지 않는 외투처럼 걸칠 수 있는 게 아니죠. 제대로 된 한 사람의 관찰자만 나타나도 "엉터리"라는 게 바로 판명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모자란 분수에 맞게 정직하게 살면 되지 뭐하러 그렇게 불안하게 사는지 모를 일이죠. "황토색 분장을 칠하고, 꽃잎을 엮어 목에 걸고 화관을 썼다. 춤은 활기와 야성미가 넘쳤다." 예를 들어 스트리트 워먼 파이터 같은 프로그램을 볼 때 우리가 받는 느낌 같은 걸까요?


"불 위를 걷는 사람들"의 능력은 봐도봐도 신기합니다. 저자도 그리 생각했지만, "교묘하게 위장된 환상일 것이다"라며 역시 지성인다운 분석력을 발휘하려 듭니다. 12일이 지나 그 유명한 부갱빌이 인상 깊게 보았던 에로망고 섬에 도착합니다. 부갱빌이 누구인지 모를 독자를 위해 책에서는 따로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의 행적은, 그보다 앞서 태어난 또하나의 두드러진 인물의 전철과 궤가 겹치곤 하죠. 패튼은 생전에 자신이 한니발의 환생이라며 큰소리 쳤는데 비록 픽션상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이 제르보를 20세기의 오디세우스라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그리 과장만은 아닙니다. 


섬들에는 영국 정부도 있고 프랑스 정부도 있다고 합니다. "멀티플 주리스딕션"이기라도 할까요? "각자 자기네 정부의 일을 보았는데 분쟁이 생기면 희한하게도 에스파냐 판사가 주재하는 국제법원이 맡았다" 독자가 읽기에도 정말 희한합니다. 이 정부와 법정이 자리한 콘도미니엄을 현지에서 판데모니엄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우습습니다. 제르보는 "태평양의 프랑스 총독 기용 씨"의 초대를 받았으나 일정을 수정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아직 전간기의 풍요를 누릴 프랑스, 그 식민지의 한 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스프레이호의 유명한 슬로컴 선장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곳을 30여년 전에 지나갔을 것이다." 촌장이 진짜 순종 양키라면서 늘씬하게 말랐다고 감탄하면서 전해 주는 이야기에 저자 제르보가 답을 하는 대목입니다. "벌써 30년이 지났어? 하긴." 옆에는 루이스라는 소년이 타는 듯한 호기심(책의 표현입니다)으로 눈을 반짝이며 제르보와 아빠인 촌장의 말을 듣습니다. 촌장은 제르보에게 부탁합니다. 아들을 데려가 달라고. 이 촌장은 현지인과 프랑스인의 혼혈들과 오래 섞여 살았는데 낭트 태생이라고 하니 본인은 순수 프랑스인인 셈입니다. 그래도 피부가 검게 그을렸고 현지의 풍토에 적응하다 보니 혼혈인지 헷갈리게 하나 봅니다. 프랑스인인데도 모국어를 거의 잊고 어설픈 영어와 현지어를 씁니다. 제르보는 여기서도 자신이 더 익숙한 폴리네시아를 떠올립니다. 촌장의 딸 하나가 시중을 드는데 정말 예전 영화에서 보듯 외지인에게 딸을 애써 주려는 현지인 추장의 클리셰 같은 행태를 보는 듯합니다. 물론 이 시점은 20세기 전반이라서 그런 풍습의 일환은 아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태평양 상의 섬까지 건너와 살게 된 사람들은 매우 강건한 육신에 총명한 정신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책 곳곳에는 훌륭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감탄이 자주 나옵니다. 또 아무래도 인구 수가 많다 보니 여기까지 건너 온 말레이 인들의 목격도 언급되는데 "남자 같지 않다"는 게 그의 평가입니다. 칭찬은 아니겠으나 이때로부터 몇 년 후 아인슈타인도 중국 근방의 사람들을 보고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죠. 


인도양을 통과하여 제르보는 무려 희망봉에까지 이릅니다. 이것은 사적인 항해이다 보니 위도 경도 등을 일일이 본인이 다 점검해야 하고 이 일정이 얼마나 고달프며 또 고도의 기술을 요할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세인트헬레나까지 와서 현지 군인들과 축구도 한 판 합니다. 프랑스의 만능 스포츠맨과 축구 종주국 청년 병사들과의 대결이 볼만했을 듯합니다. 


카보 베르데를 지나 대서양에 진입한 그는 북위 5도(즉 적도 근방이라는 뜻이죠)상에서 상어떼를 만납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우리 흑산도 앞바다에서 보곤 하는 홍어와 달리 몸집이 매우 큰 외투홍어도 목격합니다. 산 빈센테에서 그는 거의 좌초하여 여기서 피레크레를 잃을 뻔합니다. 책 처음부터 활유화하여 내내 언급되는 피레크레는 역주에 친절히 설명되었듯 파이어크레스트, 즉 그가 몰고 다니는 배 이름입니다. 배의 그림도 자세히 책에 그려져 있으니 배의 모양을 떠올려 가며 이 책을 읽어야 실감 만점입니다.


그는 긴 항해를 마치고 르아브르 항에 진입합니다. 혹시 그에게 사고나 나지 않았는지 영사관원과 기자들이 미리 알아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이 무렵 미국의 린드버그라는 비행사가 큰 화제를 모아 가며 대서양을 비행기로 횡단한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알랭 제르보란 이름이 낯선 독자라면 그 린드버그 비슷한 위상의, 프랑스 태생 셀럽이 펼친, 훨씬 더 어렵고 장거리에 걸친 항해였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용감한 사람의 위대한 모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 환영, 감탄, 열광을 모으게 마련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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