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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
벤저민 스티븐슨 지음, 이수이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평점 :
어떤 것 혹은 누군가에 관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이에요.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아는 게 낫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조금 안다는 이유로 착각하고 오해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는 벤저민 스티븐슨의 장편소설이에요.
제목도 인상적이지만 도입부가 특이해요. 애거사 크리스티, G.K. 체스터턴, 로널드 녹스, 도러시 L. 세이어스가 속한 미스터리 소설 작가들의 비밀 조직 '추리 클럽' (1930)의 회원 서약과 함께 로널드 녹스의 「탐정소설 십계명」(1929)이 나와 있어요.
"당신의 탐정이 당신이 즐거이 부여한 기지를 발휘하며 신성한 계시와 여성적 직관, 미신적 주술, 속임수, 우연의 일치, 불가항력에 의존하지 않고 주어진 범죄 사건의 진상을 충실하고 진실하게 탐지해나갈 것을 약속합니까?" (8p)
영국 추리작가들의 모임인 '추리 클럽'은 책과 독자 사이의 공정한 게임을 규칙으로 삼고 있으며, 작가가 충분한 단서를 독자에게 제공해 함께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규칙의 핵심인데 이를 어겨서 반칙 논란에 휩싸인 것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라는 점이 강력한 힌트를 주고 있네요.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 어니스트 커닝햄이, "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 심지어 성과가 뛰어난 몇몇은 살인을 여러 번 저질렀다." (11p)라면서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모두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며, '믿을 수 있는 화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요. 앞으로 사건을 서술하면서 오직 진실만을, 적어도 진실을 안다고 생각했던 그 당시에 진실이라 여겼던 정보만 말하겠다는 다짐을 하네요. "내가 이 책 속에서 탐정이자 왓슨이므로, 단서를 발견하고 더불어 내 생각을 숨김없이 드러내야 한다는 의무가 내게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속임수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12p)
어쩐지 속된 말로 혀가 길어서 미심쩍지만 어니스트의 화려한 입담은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어니스트는 형 마이클부터 전 형수 루시, 의붓누이 소피아, 아내 에린, 아빠 로버트, 엄마 오드리, 새아버지 , 고모 캐서린, 고모부 앤디, 동생 제레미까지 가족들의 과거와 비밀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어요. 어니스트는 가족 모임에 초대받았고 장소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스키장 리조트예요. 이번 가족 모임은 형의 석방을 환영하기 위한 것인데, 어니스트는 3년 전 형 마이클의 살인을 목격하고 경찰에 제보해 가족들로부터 배신자 낙인이 찍혔던 터라 껄끄러워도 피할 수 없는 자리예요. 형이 도착하기 전, 스키장 옆 산비탈에 남자 시신이 발견되면서 경찰이 출동하면서 뭔가 불길한 기운이 퍼지네요. 주인공 어니스트의 가족들은 "커닝햄 사람들은 경찰과 대화하지 않는다"라는 가훈이 있는데, 외과의사인 소피아가 동상 때문에 까매진 시신을 불에 타 죽은 거라고 경찰에게 말하면서 꼬인 거죠. 살인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커닝햄 가족의 이야기,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추리 과정이 참으로 독특한 것 같아요.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진짜 미스터리를 보여줬다는 거예요.
"가족들이 널 어떻게 대했는지 봐봐.
아직도 네가 가족들한테 빚졌다고 생각해?
언젠가 알게 될 거야. 같은 핏줄이라고 해서 가족인 건 아니야.
네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릴 것인가가 가족을 결정하는 거지." (7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