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40일 - 손으로 쓰고 그린
밥장 지음 / 시루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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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다녀본 곳 중에서 가장 마음을 움켜잡는다. 동틀 때는 또 어떨지.

벌써부터 설렌다. 평생 우려먹을 이야기 하나를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워낙 여행을 좋아해서 많이 다니기도 하고, 관련 에세이들도 많이 읽어본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 없이, 글과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여행기는 난생 처음이다. 이 책은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여행일기이자관찰일기로서 손으로 쓰고 그린 호주의 구석구석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현장에서 손으로 쓰고 그린 페이지들이 고스란히 실려 있어, 더욱 현장감 넘치고 생생한 일기같은 느낌이다. 여행 에세이이자, 함께 여행하는 인물들의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는 르포르타주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이 탄생했다.

밥장은 올해 초 허영만 화백과 저녁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호주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메신저로 왕복 항공권을 받는다. 알고 보니 허영만 화백과 일행들은 오래 전부터 '집단 가출'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었단다. 요트로 우리나라 해안을 한 바퀴 돌기도 했고,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하기도 했고, 뉴질랜드와 캐나다도 다녀왔다고 한다. 올해는 캠퍼밴을 타고 멜버른에서 사막을 가로지른 뒤 다윈을 거쳐 퍼스까지 가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멤버로 밥장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멤버는 총 여섯 명, 형님(허영만), 봉주르(형님의 오랜 친구 김봉주), 총무(아웃도어 브랜드에서 갓 퇴사한 정상욱), 용권 형(사진과 동영상을 맡은 정용권), 태훈 작가(일정 챙기고 글 쓰려고 뉴질랜드에서 온 김태훈) 그리고 막내 밥장까지. 이들은 40일 동안 24시간 내내 차 안에서 먹고 자야 한다. 얼결에 합류하게 된 여행에서 사십 대 후반에 막내 역할을 맡게 된 밥장은, 이 참에 허영만과 형님들을 관찰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캠퍼밴 생활은 결혼 생활과 몹시 닮았다.

좋아도 같은 공간, 싫어도 같은 공간에서 버텨야 한다.

문제가 생겨도 외부 전문가를 모시거나, 충고를 하거나, 투정을 들어줄 이도 없다.

마치 달 기지에 남은 우주인처럼 같은 물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

이들의 여행에 관한 스토리는 허영만 화백의 블로그에서도 만나볼 수 있고, 책으로도 출간되어 있다. 밥장의 책보다 한 달 먼저 나왔다.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여정은 사진으로 기록된 스토리가 메인이고 중간중간 허영만 화백의 만화 일러스트가 추가되어 있는 스토리라.. 밥장의 책과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호주는 자연이 잘 보존된 아웃백(오지)를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여행지이기도 한데, 이곳에서는 빛나는 밤하늘의 은하수, 그랜드캐니언 마운틴,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룰루와 붉은 사막에서의 석양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캠퍼밴을 통한 여행이라니...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멋지게만 느껴진다. 물론 밥장의 기록을 통해 만나게 되는 정말 리얼하고 상세한 여행기를 보면, 여행이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현실적인 부분들이 더욱 여행에 대한 생생한 그림이 그려져서 흥미진진했다.

이들의 여행은 멜버른, 애들레이드, 앨리스스피링스, 다윈, 퍼스를 거치는 약 9,000km의 대장정으로 호주 남부에서 중심을 거쳐 북부, 그리고 다시 서부로 내려오는 긴 여정이었다. 밥장이 막내인 덕에 본의 아니게 요리를 거의 담당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자잘한 에피소드들도 너무 재미있었다. 여행이란 진짜 자잘한 허드렛일이 모인 것뿐이라는 그의 멘트가 고스란히 공감되는 에피소드들이었다. 그리고 밥장의 일기 중간 중간에 '영만짤'이라고 허영만 화백이 그날 던진 명대사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우스갯소리처럼 보이지만 너무도 예리하고 은유적인 부분들이 많아 그것만 따로 찾아서 읽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나도 여행을 꽤 다녀봤지만, 항상 '남는 건 사진 밖에 없어.'라면서 어디를 가든, 어느 순간이든 사진 찍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더 예쁜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더 멋진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 카메라 앵글 너머로만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물론 그게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생각만큼 대단하지 않아서, 시간이 지나면 정말 사진으로만 확인되는 순간이 생기게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다 보면, 그 순간을 눈에 담고, 마음에 기록하지는 못하게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나도 다음 번 여행지에서는, 밥장처럼 손으로 쓰고,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조금 더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고, 맛있는 음식들을 눈에도 담아 보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들을 가슴으로도 기억해 보는 거다. 손으로 쓰고 그린 이 여행 에세이는, 내가 그 동안 만나왔던 그 어떤 여행에 관련된 책과도 달랐던 것 같다. 특별한 경험을 통해, 나의 다음 번 여행도 조금 달라지길, 그리고 이렇게 특별해지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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