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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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장강명 작가가 <댓글부대>로 수상했던 '제주 4.3 평화문학상'을 이번에는 <아몬드>의 손원평 작가가 수상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만년 인턴'을 하고 있는 1988년생, 서른 살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8090세대 젋은이들의 아픈 현실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2 <82년생 김지영>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감사하게도 가제본으로 미리 만나볼 수 있었는데, 표지가 얼마나 예쁜지 요즘은 가제본도 퀄리티가 굉장한 것 같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1988년생, 서른 살 여성으로 당시 88올림픽을 즈음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혜이다. 학창시절 언제나 주변에 지혜가 산적해 있었기에, 큰 지혜, 작은 지혜, 하얀 지혜 등등으로 구분되어 불린 시절을 거쳐, 현재는 수많은 입사시험에 떨어지고 대기업 계열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자신의 삶에는, 무수한 익명 속에 숨을 수 있는 그 평범한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그녀가 일하는 곳은 문화센터와는 달리 '수준 높은 교양'을 차별점으로 두고 있는 아카데미이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각종 복사와 강의실 의자 정리, 강사들의 잡다한 심부름 등등 정직원이 아닌 인턴이기에, 거의 아르바이트 수준의 일들뿐이다. 반지하 방에 월세로 살면서 아카데미에 인턴으로 온 지도 아홉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자신의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면서, 그러나 그것을 위해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없는 사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없는 사람이다. 늘 소리치고 있는데도 없는 사람이다. 수면 위에 올라있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다. 반지하방에 살면 없는 사람이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없는 사람이고, 인생과의 게임에서 지면 없는 사람이다.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 동안 대체 무얼 한 걸까. 이들과 어울리는 내내 나는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만 발버둥쳤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아카데미의 새로운 인턴으로 들어온 규옥의 등장부터였다. 그는 아카데미의 인기 강사였던 교수에게 대학원을 다니던 당시 책을 다 써주고 나서 원고만 뺐기고 알바비도 못 받았던 남자였다. 그가 커피숍에서 그 교수에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면 언젠가 인생 전체가 창피해질 날이 온다'고 사람들 앞에 그를 창피 주던 순간, 하필 같은 장소에 있던 지혜가 그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던 과거가 있다. 지혜는 규옥과 함께 아카데미 직원에게 제공되는 공짜 강의로 우쿨렐레 강좌를 함께 듣게 되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에 남은 사람들과 뜻밖에 모임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지만 공모전에서 대기업에 의해 작품만 뺏긴 문화 백수에, 식당 일을 하다 모종의 억울한 이유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던 아저씨 등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규옥은 말한다.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전복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경범죄로 보기엔 약하고 명예훼손이라 칭하기엔 너무 짧고 애매한 장난스러운 반격들을 시작한다.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경직되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세상을 바꿀 용기도 꿈도 없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통쾌했고,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그들과 한 부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동질감과 위로를 느끼지만,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는 달리 위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고학력 백수, 편의점 알바생, 한국이 너무 싫은 회사원까지. 이 시대 청춘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은 그 동안에도 있어 왔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이들이 세상을 향해 '반격'을 시도한다는 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세상 전체를 바꾸거나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만한 반격은 아닐지라도, 통쾌하고 짜릿했다. 아마도 살면서 억울하고 화나도 참고 삼켜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겪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이 들 것이다. 이들의 반격이 비장하거나 영웅적이거나, 거창하고 원론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마치 가벼운 놀이처럼,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싱그럽고 유쾌하게 이들이 벌이는 반격의 한방들이 너무도 시원했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그들의 고민도 너무 공감이 되었고, 그들이 벌이는 저항의 몸짓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으니 말이다. 우리, 약자일지언정 세상에 '없는 사람'은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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