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체보 씨네 식료품 가게
브리타 뢰스트룬트 지음, 박지선 옮김 / 레드스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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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체보는 지루했다. 28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싫증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일을 맡게 된 뒤로 하루가 길어졌다. 아이들 몇이 가게에 와서 비스킷을 사고 공짜 수첩을 받아간 것 말고는 조용했다.

만체보는 평소처럼 의자에 앉아 대로를 유심히 살폈다. 캣에게 의뢰받은 일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 바티뇰 대로 73번지에는 작은 식료품 가게가 있다. 관광객들은 대개 이곳을 '아랍인 가게'라고 부른다. 주인인 만체보가 아랍계인 까닭이다. 그는 이 별칭을 좋아하지 않지만 입을 꾹 다물고 만다. 관광객들은 주로 샹젤리제,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개선문으로 가기에, 어차피 그곳을 찾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다. 만체보는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하고, 그 규칙적인 생활에 전혀 불만이 없다. 그가 일주일 내내 일을 하는 동안 항상 집에 있는 아내가 요리 말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잘 모르고, 묻지도 않는다. 사촌인 타리크는 바로 길 건너에 있는 구두수선 가게에서 일을 하고, 그들 가족은 사는 곳도 같은 건물이다. 매일 새벽에 파리 남족으로 가서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사고 8시까지 돌아온 다음 커피를 마신 뒤, 아침 9시 정각에 셔터를 올리고, 9시가 되면 셔터가 마지막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하루가 또 끝나고 그는 가족들과 식사 중이었다. 그런데 셔터가 내려진 가게 문을 절박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을 캣이라 소개한 그녀는 만체보에게 이상한 일을 제안한다.

"부탁이 있어요. 아니, 그보다 일을 제안하고 싶어요....제 남편을 감시해주세요."

뜬금없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 일을 만체보만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는 길 건너편, 타리크의 구두수선집이 있는 건물 맨 위층에 살고 있었던 거다. 얼마 전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는데, 자신은 승무원이라 출장이 잦고 남편은 작가라 집에서 일을 한단다. 아침부터 밤까지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있어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을 만하기에, 만체보에게 남편이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등을 관찰해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상당한 금액의 비용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 작품 속 또 다른 화자인 ''의 이야기 역시 뜬금없이 진행된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나는 자금 은닉 사건을 취재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누군가를 찾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자신이 그가 찾던 여자라고 말해 버린다. 그리고 얼결에 프랑스 굴지의 에너지 기업에서 독특한 업무를 진행하게 되고, 그 일은 고용인에게 그저 이메일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퇴근하면서 안내데스크에서 매일 예쁜 꽃다발을 받게 된다. 그녀는 그 난감한 꽃다발을 매일같이 처리하기 위해 이름 모를 누군가의 무덤 앞에 놓아주기도 하고,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체스에서는 흑과 백이 중요하거든. 인생에서처럼 말이다. 승자는 한 사람뿐이야. 흑이나 백 중 하나지. 인생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체스에서는 몇 번을 움직였는지, 그 작은 움직임의 총량에 따라 승자가 결정돼. 인생에서처럼. 기회도 많이 주어지고 실수하는 건 당연해. 한두 번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인간적이지만....거듭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패배하고 말지."

작품 속의 ''와 만체보의 이야기는 전혀 교집합 없이 각자 별도로 진행된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서야 겹쳐지면서 두 사람의 일상에 드리운 미스터리의 정체가 그제야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28년 동안 평범하고 규칙적인 자신의 일상에 만족하며 지내던 만체보는 갑작스런 스파이 미션을 맡게 되자, 오히려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 지루해지기도 하고, 이 일을 의뢰 받기 전에는 자신이 어떻게 무료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그의 사설탐정 활동은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놀라운 비밀들을 알게 해주고, 그의 평화로운 일상을 위협하는 낯선 남자들도 등장하게 된다. 남편과 이혼 후 아들을 홀로 키우며 외롭게 살아가던 ''는 비밀스러운 업무를 하는 회사의 출입증에는 익숙해지지만 꽃다발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꽃다발의 정체와 자신을 고용한 인물에 대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조사를 하지만,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환갑이 다 되도록 평생 꺼림칙한 일을 해본 적이 없었던 만체보는 스파이 활동의 대가로 받게 된 금액이 너무 커서 당황스럽고, 점점 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일에 빠져 든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종이약국> 팬들이 열광할 소설! 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이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그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색다르고 독특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굉장히 뜬금없이 전개되는 상황인데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묘하게 몰입되어 파리의 소소한 일상들을 함께 하게 된다. 20년째 파리에 살고 있는 스웨덴 출신 작가의 독특한 시선이 듬뿍 묻어난 작가의 시선 덕분인지, 파리에서의 삶을 그리는 소소한 묘사들과 풍경들이 색다른 분위기의 파리를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이라도 내가 모르는 각자의 사정과 상황이 있을 수 있고, 생각지도 못한 비밀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상한 의뢰와 이상한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알 수 없는 만남들과 상황들은 파리라는 매혹적인 도시 아래 숨겨진 이야기들을 페이지 바깥으로 끌어내고 있다. 그러니까 관광객은 알 수 없는 파리의 골목 골목에 깃들어 있는 일상들의 모습이랄까.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두 인물이 겪는 파란만장한 모험 속으로 함께 해보자. 파리라는 도시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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