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빛의 일기 - 상
박은령 원작, 손현경 각색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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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4(1519) 8. 자연 만물이 그렇듯 바다도 계절마다 제 얼굴색을 바꾼다. 8월의 바다는 진청색이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시작된 은빛 물비늘이 파도에 끌려 육지로 가까워지면서 점점 자리를 넓힌다. 열네 살의 소녀 사임당은 짙푸른 바다 위로 쏟아지는 은빛을 황홀하다는 듯 바라본다. 저 청연한 바다색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롯이 빛나는 자연 그대로의 색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자연에서 채취된 색이지만 인간의 손이 닿는 순간 색은 자연 그대로의 빛깔을 잃어버린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대학교의 강사인 지윤, 그녀는 교수 임용을 앞두고 여러 차례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미술사학계의 실세인 민정학 교수를 위해 그의 집안일이며 연구실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오백 년 된 안견 선생의 <금강산도>를 발견한 민교수가 그것이 진품임을 입증하는 논문 작업을 지윤에게 맡기게 된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미술작품을 대하는 안목만큼은 남달랐던 그녀였지만, 말로만 듣던 <금강산도>는 뭔가 이상하기만 했다. 그 의심은 학술회장에서 무심코 내뱉은 대답 때문에 일파만파 커지게 되고, 그 일로 민교수는 이탈리아 학회까지 데려가서 지윤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녀는 연구원 해직에 시간강사 자리까지 잃어 버리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펀드 매니저로 일하는 남편 민석을 찾는 채권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난리가 난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우연히 이탈리아 고서점에서 발견한 사임당 신씨의 일기로 추정되는 고서인데, 그 속에 금강산도에 대한 언급이 있었기에 진품에 대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어쨌거나 삶은 지속되었고, 사는 동안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현재의 지윤이 그렇게 가정과 직장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이야기는 훌쩍 과거로 간다. 때는 중종 14(1519), 열네 살 소녀 사임당이 색에 대한 관심으로 진사댁 자제로서 비단옷을 걸치고도 색을 구하려고 나무를 올라타고 산으로 강으로 들로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녀는 진보적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 신명화 덕분에 여자인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안견 선생의 <금강산도>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간 헌원장에서 장난기 가득한 눈빛의 낯선 도령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겸이다. 그들은 그림을 좋아하는 공통점 덕분에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두 어린 예술가는 서로의 영혼을 이해하고 예술을 견인하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시대는 두 연인을 갈라놓고 마는데, 기묘사화의 여파를 무심코 그림에 담았던 사임당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이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임당은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게 된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의 엄마가 된 사임당과 첫사랑 이겸이 다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이어지고, 그들 사이에 질투에 눈이 먼 휘음당과 권력의 화신 민치형이 끼어 들면서 과거사는 파도에 휘청거리며 급 물살을 타게 흘러간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유민들을 바라보던 사임당은 이내 생각에 잠긴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신분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어째서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굴복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부와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진 세상을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도, 산에 굴러다니는 칡넝쿨이라도 캐서 허기를 달래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세상은 바꿀 수 없어도 사람의 인생은 바꿀 수 있다.

현재의 지윤이 발견한 고서를 복원해서, 그 한자들을 해석하는 이야기가 과거 사임당의 일상을 담은 일기로 교차 진행되는 스토리는, 굳이 타임 슬립 소재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만큼 임팩트는 적지만 그 자체로 흥미로운 부분은 많다. 현재의 지윤은 여덟 살 아이를 둔 엄마이고, 그림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고, 남편이 가정을 어렵게 만들어 시부모와 가족들 모두의 생계를 그녀가 갑자기 떠안게 된 상태이다. 과거의 사임당은 네 명의 아이를 둔 엄마이고, 사랑 없이 결혼한 남편은 벌이가 수월치 않았고, 집까지 날려먹는 등 사고만 쳤고, 그녀의 힘으로 아이들과 함께 폐가에서 겨우 살아내야 하는 처지였다. 지윤은 사임당의 일기를 읽으며 과거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사라지고 나앉게 생긴 처지가 마치 자신의 일 같았고, 사임당의 셋째 아들 현룡은 하는 말이며 행동이 꼭 자신의 아들 은수 같았으며, 일만 저질러놓고 사라진 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지금 자신의 남편 민석과 닮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사임당이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갔을지 다음 내용이 궁금해졌다. 현실이 너무도 참담했고,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눈앞에 놓은 문제는 해결해야 했으니 말이다. 삶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이영애, 송승헌 주연의 드라마 사임당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만 읽어도 왜 사임당 역할에 이영애인지 알 것만 같았다. 사임당이 보여주고 있는 엄마로서의 모습, 예술인으로서의 모습, 아내로서, 여성으로서의 모습들 모두에서 단아하고, 기품 있는 그녀의 선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배우로서 오랜만의 복귀 작이라 엄청난 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자체의 반응이 막 뜨겁지는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꼭 드라마가 아니어도 이 작품은 소설로서도 그 자체 매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것만 읽어도 누구나 그녀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어머니상으로서의 사임당뿐만 아니라 그녀의 예술혼까지 보여주는 보석 같은 이야기라서 더욱 가치가 있을 테고 말이다. 단순히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임당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이렇게 세련된 필치로 풀어내는 방식이라면, 위인들에게 관심 없는 청소년들에게 추천해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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