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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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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그 모든 것을 확실히 이해하곤 하는 경험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젊은 법학 교수 안토니오 얌마라가 우연히 만나 한때 시간을 같이 보내었던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에 대해 기억하고 그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일을 경험했던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의 의미를 나중에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현재, 당시에는 없었던 이해력에 기반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현재, 그 대화를 되새기고 있는 나는 당시 내가 그 대화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우리가 현재 순간에 대한 최악의 심판관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사실 현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은 기억인데, 내가 방금 전에 쓴 이 문장도 이제는 기억이 되고, 독자 여러분이 방금 전에 읽은 이 단어도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얌마라가 리카르도를 처음 만난 것은 스물여섯 살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의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어느 날이었다. 얌마라는 이년 전에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으며, 실제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아주 적었지만, 이론적 세계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던 (혹은 그렇다고 믿었던) 젊은 대학교수이기도 했다. 그와 짧은 우정 (혹은 그 비슷한 관계)을 맺고, 그가 거리에서 정체 모를 괴한에게 살해당할 당시에 함께 있었던 탓에 자신도 역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정신적으로도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사건에 대해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스테리한 이력을 지닌 리카르도의 과거를 밝혀내는 일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리카르도의 삶을 추적하던 어느 날, 그의 딸에게서 연락이 온다. 당신은 아빠와 함께 며칠을 보냈으니까, 당신이 아빠의 마지막 며칠에 대해 이야기해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리카르도의 딸 마야를 만난 얌마라는 자신이 리카르도 라베르데에 관해 알고 있던 모든 것과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 그리고 기억하고 있던 모든 것과 잊어버렸다고 두려워하던 것, 리카르도가 자신에게 들려준 모든 것과 그가 죽은 뒤에 자신이 조사한 모든 것을 그녀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수많은 서신과 기록을 살펴보게 되고, 그녀와 함께 리카르도의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그를 점차 이해하게 된다.

미국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죽어가죠. 그게 가장 쉬워요. 가족들 가운데 그런 아둔패기가 있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 굴욕감과 싸우는 것보다 더 쉬운 거라고요. 그런 경우가 부지기수예요. 가짜 고아가 수백 명인데, 나는 그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에요. 그게 바로 콜롬비아가 지닌 좋은 점인데요, 누구든 자신의 운명을 결코 혼자 떠맡지는 않죠.

시시한 칼부림과 아무데나 마구잡이로 쏴대는 총질, 싸구려 장사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폭력 등등... 각종 뉴스 채널과 신문을 통해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으로 전달되는 이미지들 덕분에 사람들은 폭력에 매우 익숙해져 있었다. 오죽하면 범죄를 이 나라가 지닌 일종의 특이성, 혹은 시대가 자신들에게 남겨준 유산이라고 체념하고 애석해하며 살았을까. 공포가 지배하던 시대의 절정을 살다간 이들의 상처와 그 시대가 남긴 것들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모두 시대의 희생양이다. 역사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한 개인의 삶을 통해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어둡고 부패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콜롬비아 문학을 대표하는 신진 작가로, 이 작품을 통해 수많은 상을 받으며 세계 비평계의 호평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 마약과 폭력, 광기와 야만으로 점철된 콜롬비아의 현대사와 그러한 공포의 시대를 살아낸 개인의 운명을 절묘하게 교차시켜 직조한 작품으로, 의문에 휩싸인 한 남자의 죽음과 그의 과거를 되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콜롬비아 암흑기의 잔상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고 있다. 콜롬비아의 80, 90년대처럼 폭력의 시대를 직접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상황들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 세계가 낯설었지만, 문학을 통한 간접 경험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져서 이 작품의 묵직함을 어느 정도는 체감할 수 있었다. 특히나 등장 인물들이 역사 속 한 개인의 삶을 추적하면서 각자의 기억을 통해 그것을 구축한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삶이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는 마르케스의 말처럼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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