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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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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안도는 잠시, 병원에서 눈을 뜬 오기는 자신이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신 불구 상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내와 짧은 여행을 떠나려던 차에 벌어진 교통사고로 아내는 죽고 오기만 겨우 살아 남았다.

어떻게 삶은 한 순간에 뒤 바뀔까. 완전히 무너지고 사라져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릴까.

이 작품은 한 남자의 삶이 한 순간 달라져버린 그날 이후를 그리고 있다. 살면서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풍경 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 평온해 보이던 그의 일상에 스며있던 불길한 그것을 자신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묵묵히 슬픔을 끌어 올리는 장모를 보면 오기는 함께 울고 싶어졌다. 턱을 움직여 소리 낼 수 있다면 같이 울었을 것이다. 제 슬픔을 장모에게 전달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아내는 죽고 자신이 살아남은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함께 아내에 대해 말할 수 없어 미안했다. 가슴속에서 통증이 일었다. 뜨겁게 끓었고 토할 것처럼 목구멍이 꽉 막혀왔다. 그 때문에 오기는 제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흐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침이었다. 오기의 턱이 조금 움직였고 마른 입이 벌어졌고 그리로 슬픔 대신 침이 흘러내렸다. 오기는 계속 침을 흘렸다. 벌어진 턱을 제 힘으로 아물 수 없어서 그렇게 했다.

사고 전 오기는 유명한 교수였고, 정원을 갖춘 타운하우스에서 갈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자살했으며, 아버지 또한 결혼하기 3년 전 돌아가셨으니, 그에게 남아 있는 가족이란 말수가 적어 속을 알 수 없는 장모 한 사람뿐이었다. 장모는 하루에 한 번씩 들러 오기를 염려하는 표정으로 보았고, 오기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자 입주 간병인도 구해주었다. 장모는 정체 모를 종교 모임의 목사님과 기도원 사람들을 집으로 물러 기도와 찬송을 들려주며 오기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기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꾸준한 재활이었지만, 물론 그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었다.

간병인은 장모가 없을 때 게을렀으며, 오기를 함부로 대했고, 철없고 무례한 젊은 아들을 데려와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오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다 간병인이 반지를 훔친 걸 계기로 그녀를 내쫓고, 당분간 간병비를 줄여야겠다며 장모가 직접 오기의 간호를 하게 된다. 하지만 장모는 점점 더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오기를 찾아온 동료들에게 무례한 언사를 한다거나, 오기의 재활훈련을 못하게 한다거나,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인부들을 불러 좁은 정원에 엄청나게 크고 깊은 구덩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어떤 가정도 낙관적이지 않았다. 이 순간을 무사히 넘기더라도 얼마 후 비슷한 일이 끝없이 반복될 것 같았다.

오기는 무력해졌고 내부의 공동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그 구멍 속으로 자신이 아예 빠져버릴 것 같았다. 시야를 가로막은 커다란 앞차가 구멍처럼 보였다. 호흡하기 힘들어졌고 가슴의 압박감이 심해졌다. 어지럽고 탈진할 것처럼 의식이 흐려졌다. 오기는 삶에 애착이 심했지만, 그 순간의 무력감 역시 오기의 것이었다.

사고가 나기 전 아내가 쓰던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 유일하게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아내는 그것을 인간이 어떻게 속물이 되는지, 그 관찰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극중에서 그 고발문의 내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전개되는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 대학 후배 제이와의 불륜을 끊임없이 의심하던 아내,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단점을 그대로 닮아가며 아내에게 훈계하던 오기의 모습 등 그들 부부의 관계는 결코 '행복'이라는 모습과 닮아 있지 않았다. 그저 오기 자신만 자각하지 못했을 뿐. 아내가 알고 있던 걸 장모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영국식 정원을 만들겠다며 정원 만들기에 몰두하던 아내의 공간은 그녀의 죽음 이후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황폐한 곳으로 바뀌어 버린다.

남겨진 오기의 삶 역시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덩굴식물과도 같이 서서히 변해버리고 만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에 대해서 우리는 대부분 살면서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법한 일들이 벌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삶을 돌아보게 마련이니 말이다. 특별한 일 없이 매일 계속되던 일상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엉망이 되어 버리기도 하는 게 삶이다. 누구나 상상해본 적도 없는 구멍 속으로 단숨에 끌려갈 수도 있는 일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섬뜩함과 그로테스크함은 빛을 발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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