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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평점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낯선 도시를 향해 나아갔던 여인, 블랑쉬는 현대인의 욕망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보여지던 캐릭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추구하고, 그것 앞에서 흔들리다 결국 굴복하고 만다. 그래서 혹자는 욕망을 삼키는 건 독약을 삼키는 것과도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자의 기준으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이 그들이 가진 욕망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독약을 삼키게 되더라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또 당연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 자신의 욕망에 순수하게 충실했던 또 한 명의 여인이 있다. 스토리만 보자면 신파, 통속 멜로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감춰진 것들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도발적이며, 사실적이고, 무자비하고, 날카롭다.
행복한 가정 분위기는 이 세상의 꽃이다. 그보다 더 부드럽고 섬세한 것은 없으며, 그 안에서 보살피고 키워야 할 본성들을 강하고 올바르게 만들기 위해 그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은 세상에 없다. 이러한 행복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어째서 눈가에 눈물이 반짝이게 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 나라 국민들의 마음을 묶어주고 황홀하게 하는 신비스러운 화음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의 기본 플롯은 다소 평범하다. 대도시로 상경한 시골 처녀가 배우로 성공 하기까지를 그리고 있는데, 19세기 말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순진한 소녀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지와 젊음의 환상으로 가득 찬, 수줍으면서도 밝은 열여덟 처녀 캐리는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향한다. 여행 경험이 전무한 그녀에게 난생처음으로 경험하는 대도시는 그 자체로 굉장한 사건이다. 그녀는 언니네 집에 거주하면서 일자리를 구하기로 하는데, 언니네 역시 궁핍하고 팍팍한 생활의 고단함에 그녀를 딱히 반기는 기색은 아니다. 언니인 미나도, 형부인 핸슨도 캐리가 일자리를 얻어서 숙식비를 낸다는 조건 하에 그녀를 받아들인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경력직을 구하는 터라 아무 것도 해본 적이 없는 촌뜨기 시골 소녀를 환대해 줄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다 경우 구두공장에 주급 사 달러 오십 센트에 취직을 하게 되지만, 언니에게 숙식비로 사 달러를 주고 남은 오십 센트로 일주일을 버텨 내는 것 또한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일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저속한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사내들의 추파도 부담스러웠으며, 함께 일하는 여자 동료들 또한 가깝게 지내고 싶은 부류가 아니었다. 퇴근해서 언니에게 일에 대한 불평을 해도 그녀를 위로해주는 말 한마디 들을 수 없었으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캐리에게는 당장 겨울 옷을 살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다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그나마 구했던 일자리마저 잃게 되고, 그녀는 어깨가 축 처져서 사흘 동안 거리를 헤매며 일자리를 찾으러 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거리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삶이 그 순간 이후로 조금 다른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시카고로 오는 열차에서 만나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던 드루에는 그녀를 데리고 최고의 요리와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크고 안락한 식당으로 데려가 식사를 하게 해주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녀의 처지를 듣고는 옷부터 사야겠다며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잠시 거절했지만 결국 그에게 매혹적인 십 달러짜리 초록색 지폐 두 장을 받는다. 캐리는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희망차고 다 잘 될거라는 낙관적인 분위기에 휩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가 자신을 곤란에서 끌어내준 듯한 느낌에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는 형부와 언니네에 더 이상 함께 있기도 어려운 상황에, 고향에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던 그녀에게 드루에와의 만남은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직 본능을 대신하여 인간을 완벽하게 이끌어줄 수 있을 만큼 발전하지 못했고, 인간은 본능과 욕망에만 귀 기울이기에는 너무 현명해졌으나 본능과 욕망을 압도하기에는 여전히 너무 나약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과연 누가, 이 어린 처녀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그녀가 욕망에 눈이 멀어 누군가를 속이거나,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려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앞에 다가온 손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캐리가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이 좋았다. 그녀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본능과 이성, 욕망과 이해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 싸우고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 중에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이들이 얼마나 있겠느냐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이 방대한 이야기의 아주 미약한 시작에 불과하다. 그녀가 드루에와 어떻게 지내고, 그를 통해 알게 된 허스트우드와 또 어떤 관계로 발전하고, 그것이 결국 두 남자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변하게 만들지, 그리고 예쁘지만 촌스러웠던 시골 처녀가 어떻게 대도시의 유명 배우로 성공하게 되는지에 관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직접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될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애정의 영역에 속하는 욕망에 있어서는 돈도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중에 백오십 달러를 쥐고도 딱히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돈 그 자체는 만질 수도 있고 바라볼 수도 있는 분명한 실체를 지닌 것으로, 며칠간은 기분 좋게 해주었지만, 그런 기분도 곧 사그라졌다. 호텔 요금으로 돈을 쓸 필요는 없었고, 옷도 당분간은 충분했다. 며칠 지나면 또 백오십 달러가 들어올 것이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데 그 돈은 놀랄 만큼 별 필요가 없었다. 더 나은 일을 하고 싶고 더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무려 1900년에 쓰인 작품이다. 그런데 2016년인 지금 읽기에도 현대적이고, 감각적이며, 공감적이다. 게다가 이 작품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첫 작품이란다. 세상에 첫 작품을 이렇게 써내다니! 놀랍고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페이지 내내 밑줄 긋고 싶은 섬세한 문장들, 그리고 행간 속에 숨겨져 있는 인물들의 감정들, 가슴을 두근거리고 만드는 순진한 처녀의 욕망과 설레임을 가장한 내면의 치열한 전쟁, 본능과 이성, 욕망과 이해가 다투는 세밀한 심리 묘사들이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세트처럼 가득 들어 차 있다. 이렇게나 평범하고 단순한 플롯으로, 이렇게나 뻔하고 예측 가능한 인물들로, 이렇게나 노골적으로 사회를 보여주고, 직설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그려내다니,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도덕성도 지성도 완벽하지 않은, 나약함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물이라서 더욱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고, 연민이 들어 감정 이입이 되는 것도 있다. 그 누구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우리 모두는 한때 캐리였던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때 단순히 개인의 능력으로 모든 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해 있는 환경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비도덕적이라는 여론의 비난에 작가가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자살까지 결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무려 10년 후에야 두 번째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작가의 어마어마한 이 작품은 단연코 올해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상위에 놓아 두고 싶을 만한 매혹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급히 찾아 봤더니 다행히도 그의 다른 작품이 아직 판매 중인 걸로 확인된다. 무려 1999년에 출간되었던 <미국의 비극> 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다른 작품들도 국내에서 더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