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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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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어디 일까. 말도 안 되는 미신을 철썩 같이 믿는 사람들이 있고, 침팬지가 웨이터의 흰색 조끼를 입고 서빙을 하며, 흑인이 중심가에서 신발을 신고 있지 않으면 경찰이 체포하는, 미신과 두려움, 기만과 아첨이 섞여 있는, 거짓말이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 이 도시에서 살을 빼려면 우유에 촌충 한 마리를 넣어 마시기만 하면 된다. 촌충은 몸 안에서 최고 5미터까지 자라서 사람이 먹은 음식의 대부분을 갉아먹어 그를 날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방법도 남다르다. 특수한 달팽이의 껍질을 빻은 다음 19년에 한 번 개화하는 나무의 꽃잎을 말려 섞은 것을 먹으면 나비 같은 날개가 생겨난단다. 그래서 감옥에 있는 사람이 훨훨 날아 감옥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1904, 이곳은 바로 아프리카이다. 오직 백인들만이 과장되게 크게 웃는 슬픈 대륙, 흑인들의 눈에는 적의와 슬픔, 백인들의 웃음에는 금세 두려움으로 번질 수 있는 염려가 담겨 있는 이상한 나라.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흑인들과 현재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백인들이 공존하는, 거짓말과 위선 위에 세워진 나라.

"흑인들은 노예일 뿐이라고요. 이곳처럼 잔인한 사람들 천지인 곳도 드물어요. 그리고 그들은 죄다 백인이죠. 당신이나 나처럼."

그가 다시 고개를 젓고 자리를 떴다.

그녀는 그의 말에서 혐오감을 읽었다. 며칠 전 흑인 인부들의 눈에서 분노와 증오를 읽었듯이.

스웨덴 북부 산간벽지의 열일곱 한나는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집안의 장녀였기에, 온종일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극심한 여름 가뭄은 그들 가족에게 극한의 곤궁을 가져왔고, 한나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집을 떠날 것을 권한다. 아이 셋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지만, 넷은 어렵다고. 넌 이제 다 자랐고 네 한 몸쯤은 챙길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한나는 자신이 해안으로 나간다고 해서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겠냐며, 자신을 내쫓으려는 거냐고 되묻는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녀는 갑작스레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세상에 홀로 남았다는 것. 이곳을 떠나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되었고 친척들이 살고 있는 먼 해안도시를 향해 집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먼 친척들과는 연락을 할 수 없고, 그녀는 우연히 호주 왕복 항해선에서 선상 요리사로 일하게 된다. 그 여정에서 2등 항해사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그는 치명적인 열병에 감염되어 주고, 그녀는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미망인이 되고 만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배가 아프리카 도시에 정박했을 때 아무도 몰래 배를 떠나기로 한다. 항해를 계속하는 한, 죽은 남편이 아직도 배에 남아 있었으므로 자신이 슬픔에 굴복하고 말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나 렌스트룀이었던 여성이 한나 룬드마르크가되어 낯선 도시에 발을 내딛는다. 그곳은 포르투갈 령 동아프리카의 로우렌소 마르케스라는 항구 도시였다.

"그들 말을 믿지 말아요. 하나도 안 믿는 게 좋아요. 여기 흑인들이 할 줄 아는 건 거짓말뿐이에요."

한나는 아프리카에서의 첫 밤을 숨 막히는 더위와 끈질긴 복통으로 사경을 헤매며 보낸다. 무심코 투숙한 호텔의 매춘부가 그녀를 보살펴주었고, 한나는 조기 유산을 하고 겨우 기력을 회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이름만 호텔일 뿐 실제로는 매음굴이었고, 그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그녀는 포르투갈인 매음굴 주인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그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또 몇 달 만에 그가 죽게 되어 미망인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렇게 한나 룬드마르크는 한나 바즈가 되어 남편이 남긴 매음굴과 그곳에 소속된 여자들에 대한 책임감을 떠맡게 되고, 더불어 엄청난 부도 함께 가지게 된다. 그녀의 인생은 너무도 짧은 시간에 마치 폭풍우를 만나기라도 한 듯이 휘청대며 그녀를 변화시킨다. 삶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이 미약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왜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나도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듯 보이는 이 도시의 사람들과 닮아가기 시작한 것일까? 처음에는 한나도 흑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세뇨르 바즈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차츰 그 주장은 백인들에게도 인도인들에게도 아랍인들에게도 모두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식은 서로 다를지 몰라도 어쨌든 모두가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거짓말과 위선 위에 세워진 나라에 살고 있었다.

헤닝 만켈은 다들 알다시피 작가로 성공한 뒤 아프리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작품의 배경이기도 한 모잠비크에 극단을 세워 운영했고, 죽기 전까지 평생 아프리카의 현실과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헌신적으로 몰두했다. 백 년 전 당시 동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20세기 후반까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흑인들은 단지 피부색이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열등 인종이 되어 백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는 인종과 문화적 편견, 탐욕이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지고 두려움이 서로를 지배하는 세계를 한 여인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흑인들은 불필요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백인들은 현재의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다른 사람들,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진실이 파고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

아프리카에 익숙해지면서, 한나는 백인들의 위선과 기만을 낯설고 이상하게 느끼다가 자신도 모르게 어느순간 익숙해지기도 한다. 흑인들은 당연히 열등한 존재라고 믿는 백인들은 흑인들을 자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둠속에서 그들을 보지 않아도 되게 신이 흑인들을 검게 만들었으니 그들에게는 색깔이 없다며 말이다. 그런 백인들의 행동이 곤혹스러웠던 한나는, 남편이 죽고 매음굴의 여자들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자신만의 기준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처음 들은 말이 흑인들이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는 거였지만, 사실 백인들도, 인도인들도, 아랍인들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나지만 소동은 다시 잠잠해지고, 남편의 배신으로 그를 죽여 감옥에 갇힌 한 흑인 여인을 목격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다시 한번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렇게 그녀는 한나 바즈로서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아나 브랑카로 남편의 살해 혐의로 투옥된 흑인 여인을 사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에게 이것은 불가능한 것을 얻으려면 불가능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전조 같은 사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결의는 백인 사회의 공분을 사고, 거기다 흑인들로부터도 소외된다. 왜냐하면 흑인들은 언제나 백인들의 보이지 않는 보복을 느끼며 살고 있기에, 자신들을 위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애를 쓰는 그녀를 지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백인들이 스스로와 흑인들을 기만하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하는 흑인 세계에서 살고 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은 백인 없이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흑인들은 돌과 나무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열등한 인종이라고 생각해. 반면에 흑인들은 어떻게 신의 아들을 모질게 학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지. 그리고 백인들이 심장이 곧 멎어버릴 만큼 늘 바쁘게 움직이며 부와 권력을 향한 끝도 없는 추구에 휘둘리는 걸 보고 놀라기도 해. 백인들은 삶을 사랑하지 않아. 대신 시간을, 언제나 부족하기만 한 시간을 사랑해.

우리를 망치는 것은 바로 그 모든 거짓말들이야.

 

결국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받은 모든 재산을 매음굴 여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아프리카를 떠나기로 한다. 그곳에서는 백인인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흑인들과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기에 말이다. 그녀가 배에 오르는 마지막 장면은 뭐랄까,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해야 하나. 분명 슬픈 장면도, 감동적인 장면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내가 함께 살아낸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겁고 숙연해졌다. 그렇다. 이렇게 줄거리 요약만 길게 늘어놓고 말았지만, 이것은 그저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이었다. 피부색만으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학대하는 그런 세상이, 실제로 존재했었으니 말이다.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착취하고, 온갖 부를 독점했던 백인들 조차 마냥 행복하지 만은 않았던 이상한 세계, 가진 자도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세계, 영혼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택해야 했던 슬픈 세계, 침묵이 정말 엄청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무서운 세계, 나는 그런 이상한 세계를 이곳에서 경험했다. 이곳은 바로 세계의 끝, 아프리카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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