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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꿈속이긴 해도 그나마 당신은 아들을 만났구려, 공주. 어떻게 생겼던가요?"
"건강하고 잘생긴 얼굴이었어요, 그건 기억나요. 하지만 눈 색깔이며 뺨 모양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난 그 애 얼굴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요." 액슬이 말했다.
"분명 모든 게 이 안개 때문일 거요. 사라져서 좋은 것도 많지만 이렇게 소중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건 잔인한 일이오."
얼어붙은 안개가 강과 습지 위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는 고대 잉글랜드의 황야에 있는 토끼 굴 언덕 마을에 사는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있다. 이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거의 없다. 어찌 된 일인지 습지를 뒤덮은 짙은 안개가 사람들의 기억을 모두 사라져 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일이라고 해도 마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흐릿한 기억 저편에서 생각나는 아들을 보러 가기로 여행길을 떠나기로 한다. 가끔 아들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날도 있지만, 다음 날이면 그런 기억 위로 베일이 덮인 것 같기에 얼굴 조차 떠오르지 않는, 왜 자신들과 함께 살지 않는지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 그들의 아들을 찾아가기로 말이다.
가족과 함께한 추억은커녕, 자식 조차 생각나지 않는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사라져서 괜찮은 것도 있겠지만, 나빴던 기억도, 괴로웠던 기억도 내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니 가지고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과거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내가 쌓아온 시간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과도 같을 텐데, 오로지 현재 만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공허한 일일까.
"어떤 이들에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신부님. 액슬과 저는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들을 되찾고 싶어요. 그런 순간들을 빼앗긴다는 건 밤중에 도둑이 들어와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간 것과 같아요."
"하지만 안개는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나쁜 기억까지 모두 덮고 있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부인?"
"우리에게 나쁜 기억도 되살아나겠지요. 그 기억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분노로 몸을 떨기도 할 거고요. 그래도 그건 우리가 함께했던 삶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재미있는 건 액슬과 비어트리스 부부이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마치 자신들이 아기 때부터 줄곧 함께 지낸 것처럼 느낄 정도로, 그들이 서로를 알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서로에 대한 신뢰는 서로에게 쌓인 시간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노부부인데도 말이다. 여행 초반 그들이 만났던 누더기 차림의 여자가 비어트리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라고. 이 질문은 내가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의문이기도 하다. 격렬하게 싸웠던 일도, 함께 소중히 즐겼던 순간들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유지시킨다는 말인가.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액슬은 '내가 기억을 하든 잊어버리든 내 마음속에서 당신을 향한 감정은 늘 똑같이 그 자리에 있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서 그 기억들을 하나씩 찾을 거라고 말이다.
이들의 여정에서 도깨비나 용, 기사가 등장하는데도, 그게 너무도 자연스러워 전혀 판타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이기도 하다. 길을 가면서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노부부의 모습 또한 따스하면서도 어딘지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은 명성만 듣다 직접 만나게 된 것이 처음인데, 이 책을 덮자마자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