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반려동물 장례사로 일하고 있는 나카하라는 형사로부터 헤어진 전부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그들 부부가 헤어진 원인은 20년 전, 빈 집에 침입한 강도로부터 딸인 미나미가 죽게 된 사건 때문이었다. 이혼 후 그들은 서로 연락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당시 사건 조사를 했던 형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당신의 전 부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나카하라의 딸과 아내 사요코가 모두 아무 이유 없는 우발적인 범행 동기로 살해당했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일까? 혹시 누군가 그에게 원한을 품고 저지른 사건일까?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숱한 사건과 사고 모두, 우연히, 아무 이유 없이, 단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던 이유로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에서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사형은 정의의 실현인가, 개인적 복수인가?

범죄자는 죄를 뉘우치고 갱생할 수 있는가?

사요코를 죽인 범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수를 한다. 일흔 살 정도된 백발이 무성하고 야윈 노인이었고, 사요코의 가족들과도, 나카하라와도 전혀 일면식이 없는 노인이었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돈이 필요해서, 그저 우발적으로 저질렀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의 사위로부터장인의 범행을 용서해달라는 편지가 도착한다. 딸도 아니고 사위가 피해자 가족한테 용서를 구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나카하라는 그녀의 장례식에 조문을 가고, ‘사요코는 최근까지 도벽증 환자들에 대해 취재하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내가 가장 마지막에 쓴 원고를 읽게 되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어딘가 석연치 못한 의문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요코가 친언니처럼 이야기를 들어준 사오리의 고향이 후지노미야이고, 후미야의 고향도 후지노미야. 그 후미야가 근무하는 병원의 안내장을 사요코가 가지고 있고, 후미야가 상담실에 나온 것이 사건이 일어나기 사흘 전. 또한 사건이 일어나기 열흘 전에는 사요코가 수해를 촬영하러 가고, 사오리의 방에도 수해 사진이 걸려 있고."

"취재하기 위해 당신을 만난 사요코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거리에서 살해당했다, 그 범인은 옛날에 당신이 사귀었던 남자의 장인이다....... 난 말이죠, 이게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니, 나만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죠. 사오리 씨, 혹시 아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시겠어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의문점들이 하나씩 모여서 거대한 퍼즐이 완성된다. 퍼즐의 조각을 맞추는 것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므로 자세한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던지는 질문이다. 과연 사람을 죽인 범인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 말이다. 사실 극중 히루카와 처럼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사형을 형벌로 여기지 않고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여, 아무런 반성도 없이,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다만 사형이 집행될 날을 기다리는 범죄자들이 숱하게 많은 것이다. 혹은 사형 선고를 받지 않더라도, 수감되어 있는 동안 진정한 의미의 반성에 이르지 못했기에 출소 후에 또 비슷한 범죄 행각을 벌이게 되는 재범들이 많은 것일 테고 말이다. 징역의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은 재범률이 높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니 갱생했느냐 안 했느냐를 완벽하게 판단할 방법이 없다면, 갱생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형벌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는 형벌을 내리면, 그 범인은 다시는 그 누구도 죽이지 못하는 것이 되니 말이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히루카와 지만, 그를 살려서 다시 사회로 돌려보낸 것은 국가이다.

, 내 딸은 국가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강력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도 존폐에 관해서 논란이 일고는 한다. 갈수록 흉악한 범죄들이 많아지니, 사람들 모두 보다 강력한 처벌로 재범 방지와 유사한 다른 사건을 막고 싶어한다. 물론 국가가 사람을 죽일 권한은 없고, 사법부가 오판을 할 가능성도 있으며, 범죄자의 인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사형제도의 법적 근거는 헌법에 기초한 것이고, 그 법적인 근거를 믿지 못한다면 애초에 사법부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형폐지론자들은 죄값을 목숨을 빼앗는 걸로 치르는 것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은 아니므로 정의실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있을 경우 사형이란 결국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 것이고, 사형제도고 존속이 된다고 하더라도 강력범죄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므로, 굳이 국가의 이름으로 살인을 행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존치론자들은 억울한 사형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수사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이지 사형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피해자 유족들도 물론 알고 있다. 살인범이 죽는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가 치뤄 지지 않고,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수 십 년간 매일, 매 시간, 죽은 가족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그들에겐 내일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증오하는 감정을 흘려 보내고, 슬픔과 회환, 안도의 감정과 함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는 간다.

사형제도는 무고한 국민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극적인 정의 실현으로 인해 이후 벌어질 각종 범죄들에 대한 예방책이 될 수도 있다. 사실 가해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떠들면서, 정작 피해자의 보상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언론이든 경찰 측이든 배려가 그만큼 되고 있지 못한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무조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사형으로 판결이 나는 것도 아니고, 죄질에 따라서 합당하게 판결이 나는 것이므로, 사형제도는 정의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범죄자가 뉘우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혹시 모를 개과천선만을 기다리며 피해자가 받아야 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사회적 혼란을 묵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살인자를 그런 공허한 십자가로 묶어두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십자가라도, 적어도 감옥 안에서 등에 지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반대로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텐데,  교도소에서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과 구속은 되지 않았지만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면서 사는 것, 무엇이 진정한 속죄라고 할 수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극중 인물의 말을 빌려 처음에는 사형 제도가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다, 결국에는 사형을 넘어서 진정한 처벌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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