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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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가로등, 작은 물웅덩이, 다리, 교회, 1층에 난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광경들에 자신이 녹아서 스며드는 느낌 말이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이국적인 디테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개를 퍼덕이는 평범한 비둘기마저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거리를 걷는다. 어딘가 시적이다.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거리를 누비면 마법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p.38~39


7만 평의 공간, 300만 점의 작품, 매년 700만 명의 관람객들이 찾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책의 저자인 패트릭 브링리는 어느 날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이곳에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암으로 투병하던 친형이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더 이상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공간 중 가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상실감과 슬픔 속에서 도피하듯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 그는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온종일 걸작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삶의 이면들을 관찰하며 멈췄던 인생의 걸음을 다시 내딛기 시작한다. 


플립북을 넘기듯 그림들을 스쳐 지나가며 수세기를 넘나드는 경험은 오직 미술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에서 프랑스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였다가 다시 이탈리아가 되며, 신성과 세속을 오가는 그림 여행을 매일 할 수 있다니 관람객으로 몇 시간 잠깐 구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미술 애호가들, 관광객들, 뉴요커들은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곳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더 이상 짧은 시간에 구애 받을 필요 없이 마음껏 작품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뉴욕 평균 크기 아파트 약 3천 개를 합친 면적의 미술관은 너무도 장황하게 펼쳐져 있지만,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수 시간씩 존재하며 저자는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점차 깨닫게 된다. 





양탄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보니 수만 개의 매듭과 실이 마치 현재와 과거, 현실의 엄청난 밀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때는 이 네 귀퉁이 너머로 펼쳐졌던 세상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디테일로 가득한, 모든 찬란하고 평범한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가... 양탄자를 내려다보자니 초월적인 질문들에 추상적인 답을 구하려는 노력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더 많이 탐구할수록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테고, 그럴수록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서로 섞이기를 거부하는 세밀한 부분들로 가득한 것이리라.             p.216~217


예술 작품, 그 중에서도 명화에 대한 책은 정말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다. 나 역시 미술사, 그림 읽기, 명화 감상, 미술관 등 여러 주제를 다룬 많은 종류의 책들을 만나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술 전공자가 아닌 저자가 쓴 이 책을 통해 예술을 감상하는 것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게 된 것 같다. 모든 그림이 '짠' 하고 커튼을 열어 안을 보여주는 건물 1층의 창문들처럼 보였다는 그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작품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예술은 입을 헤 벌린 채 쳐다보는 것 혹은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하려는 시도와 달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책으로 읽는 것과 예술품을 직접 보는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번 느끼고, 예술의 본질적인 특성을 배우게 된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미술관 곳곳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으며, 관람객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구석구석을 다니며 작품을 바라보면 그 시간들이 손에 잡힐 것처럼 체감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날이면 날마다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한다는 것부터 이 빠른 세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의 선택이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랬다. 그렇게 상실감을 극복하고 마침내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이 여정은 일상과 예술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점에서 내밀한 고백이자 예술에 대한 지적인 통찰들을 보여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더라도, 책을 읽는 내내 마치 가본 것처럼 경험하게 해주는 경이로운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위로와 감동, 그리고 예술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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