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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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미하루는 미다가하라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게. ......하지만 진짜 지옥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야... 지옥은 꼭 땅 밑에만 있는 게 아니야. 이 세상 어디에나 있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각각 존재하고 있지. 평범하게 사는 사람의 바로 옆에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이 있는 거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 '아귀의 논' 중에서, p.14


미하루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사원여행을 간다. 이번 가을 여행은 다테야마로 와서 케이블카도 타고, 단풍으로 물든 무로도다이라도 산책한 뒤 숙소에서 일박을 하는 중이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낯익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아오타였기에, 미하루는 재빨리 운동복을 걸치고 산책로로 나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산책을 하게 되는데, 아오타는 아귀의 논이라 불리는 못둑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준다. 평소 괴담이나 공포 영화를 매우 좋아했던 미하루는 관심있게 듣지만, 점점 아오타의 담담한 말투 에서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느낌을 받는다. 급기야 아오타는 자신이 전생에 아귀였다는 뜻밖의 사실을 고백하는데... 설레임으로 시작되었던 두 사람의 산책은 어떻게 될까.


가을장마가 시작되면서 벌서 사흘째 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날, 편집부의 마쓰나미는 원고를 늦게 주기로 유명한 작가인 아오야마에게 독촉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것은 아오야마 본인이 아니라 그의 비서 겸 애인인 아키였다. 작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아키는 컴퓨터를 확인 후 미완의 원고를 보내준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자신의 생각에 이 원고는 실화 같다고, 원고를 다 읽고 나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달라고 한다. 호러물일 텐데 실화라니, 게다가 작가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라니 이거 큰일이다 싶은 마음으로 마쓰나미는 원고를 읽기 시작한다. 원고에는 그가 매일 밤 겪은 악몽에 대해 쓰여 있었는데, 기묘한 꿈을 꾸면서 순간이동을 하고, 그러다 아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그에 맞서기로 결심하는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점점 더 이상해지는 이야기에 혹시 작가가 정신질환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들지만, 직접 작가의 집에 찾아가 그가 사라진 침실을 보고는 말이 안 되는 그 이야기를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사라진 작가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매우 드물게 근처를 떠돌던 저급 영혼이나 동물 영혼을 불러내는 일이 있어서, 그런 성공 사례(어디의 개뼈다귀인지 모르는 영혼이 나온 것뿐이지만) 덕분에 고쿠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무시무시한 악령을 소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고쿠리상은 누군가를 제물로 삼지 않는 한 돌아가지 않아서, 현실에서는 지옥 그림이 펼쳐진다.            - '고쿠리상' 중에서, p.219


정말 오랜 만에 만나는 기시 유스케의 신작이다. <검은 집>이라는 작품으로 최고의 호러소설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기시 유스케는 이후 SF 소설, 추리, 미스터리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그가 호러 작품을 내놓은 것은 약 9년만이라고 하니, 기시 유스케의 공포소설을 좋아했다면 이번 신작은 놓치지 말아야겠다. 이 책에 수록된 네 편의 공포담은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오싹한 공포가 아니라,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를 보여준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주술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절망하고, 일상에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마주하는 등 현실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공포 그 자체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일본 설화문학의 진수로 꼽히는 에도시대의 고전 <우게쓰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우게쓰 이야기>는 아홉 가지 초자연적 이야기의 모음집으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하다. 기시 유스케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데뷔작 <13번째 인격 ISOLA>를 쓰기도 했는데,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를 '비'를 주제로 해 두 권의 소설집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2009년부터 쓰기 시작한 글들을 2022년이 되어서 마무리하고 출간된 것이 바로 이 작품 <가을비 이야기>이다. 다음 작품인 <여름비 이야기>에서는 또 어떤 공포의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는 네 가지 공포와 네 가지 절망을 만나보자. '진짜 지옥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라는 사실이 와 닿는 순간, 다차원의 공포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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