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평생을 수치심과 싸워온 우리의 이야기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으로 뭘 할 건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좋은 의도 또는 성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핑계로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가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묵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것, 당신만의 것이다. 그것은 진짜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이 목록들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유산, 우리의 일부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것의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9

 

한 여자는 상사의 성희롱에 겁먹어서 이직할 자리를 구하지도 않고 직장을 그만뒀다. 어느 성 노동자는 강간을 신고하려다가 경찰관에게 비웃음을 샀다. 한 여학생은 학교에 가던 도중에 성인 남자들이 자신을 향해 외설적인 표현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으며, 한 자매는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다가 낯선 남자의 신체 부위를 강제로 봐야 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경험담 중 극히 일부인 이러한 사례들은 결코 머나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공공기관 간부가 여성 직원들에게 화장 좀 하고 다니라는 성차별 발언을 해 파면 당했고, 학교에서, 회사에서, 지하철에서 거의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풍경이다.

 

이 책의 저자인 로라 베이츠는 2012년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라는 사이트(everydaysexism.com)를 만들었다. 2015년 전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사연은 10만 건에 이르렀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 왔다. 이 책에 수록된 온갖 불평등 이야기들, 성차별적인 농담, 부적절한 신체 접촉,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직장 내 차별, 성추행 등의 사건은 여성들 각자의 ‘목록’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이것은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한테도 말해본 적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라 베이츠는 생각한다. 여성의 삶이 오직 성별 때문에 공포, 학대, 괴롭힘, 차별로 얼룩지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라고 우리는 반복해서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 서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슬퍼하고 애도하고 화내고,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우리가 겪은 괴롭힘과 억압이 아니라 그런 일이 없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가 무력하고 상처 입고 웅크린 피해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중 다수, 아니, 대다수가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뜻이다.            p.240~241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일상화된 불평등의 원인을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 시스템에서 찾는다. 그 누구보다 평등을 지향해야 할 교육, 경찰, 사법, 정치, 언론이 어떤 식으로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그들의 입을 막고 좌절하게 하는지 들여다본다. 여성들이 제일 먼저 취해야 할 가장 작고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이 바로 목록을 만드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더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의 일축으로 인해 잊고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순간들을 깨닫고 분노해 그 순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이야기 목록을 거의 모든 여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자초한 것일 수도 있다고, 운이 나빴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바꿀 이유와 힘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길을 걷다가 남자들이 모여 있으면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조명이 어둡거나 나무가 우거진 곳을 피하기 위해 멀리 돌아가기, 혼자 살지 않는 척하려고 자동응답기에 남자 목소리 녹음해놓기, 가짜 결혼반지 끼기, 친구나 연인에게 내 위치를 전송하는 앱 사용하기, 화장실에 여럿이 같이 가기, 호루라기나 경보기 가지고 다니기,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옷차림 바꾸기 등등... 이는 여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습관들의 목록이다. 이는 거의 매 순간 내 안위를 걱정해야 함을 경험으로 배우는 세상,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고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믿게끔 사회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란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새삼 개탄하게 된다.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그들의 세계를 깨부수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들이여, 지금 당신의 목록을 만들기를.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당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목록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