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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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는 그 책방에 오래 머물렀다. 어떤 도시를 그곳에 있는 책을 통해 알아가는 것, 이는 그가 언제나 해오던 일이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처음 가본 외국 도시는 런던이었다. 칼레로 돌아오는 배에서, 지난 사흘 동안 유스호스텔과 대영박물관과 무수히 많은 책방과 그 주변만 빼고는 이 도시를 거의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잖아!"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넌 여기서 아주 많은 것을 놓쳤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책들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에 있잖아.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p.94~95

 

때로 인생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저 매일을 성실하게, 눈 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멈추고 뒤돌아 보면 깨닫게 된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살거야,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하겠지, 해보고 싶었던 것들, 시간이 없어 미뤘던 것들을 배우고 해볼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 삶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내가 꿈꾸던 많은 것들 없이 내 인생이 앞으로도 계속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느끼는 순간, 그 동안 쌓아온 모든 삶을 박차고 일어나 다른 생을 선택하기 위해 훌쩍 떠날 수 있을까.

 

15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만나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매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는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도시로 향한다. 우연히 포르투갈어로 적인 책 속에서 발견한 문장 때문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의 긴 여정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문장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보여준다. 충동적으로 수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낯선 도시로 가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언어를 읽기 위해 어학원을 다니고, 사전을 뒤져가며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그레고리우스는 또 다른 자기 자신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흘러간 역사를 관통하는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p.339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처음 읽었던 것은 두 권으로 출간되었던 2007년이다. 이번에 나온 것은 세 번째 개정판으로 합본이라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양장본이다. 이미 많이들 읽어 봤을 만한 작품이라 현대의 고전 같은 느낌도 드는데, 이번 개정판은 감각적이고 무게감 있는 표지로 새롭게 단장했고 본문의 시작부터 끝까지 세심히 살펴 오늘의 감수성으로 다듬었기에 새롭게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자신의 본명인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인문, 철학서도 저술했는데 국내에도 여러 권 번역 소개되어 있다. 소설을 집필할 때는 두 명의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의 이름을 조합한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사용하한다. 작가의 최근작인 소설 《언어의 무게Das Gewicht der Worte》도 비채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기 전에는 세세한 내용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려 15년 전에 읽었던 작품이니 말이다. 다만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가 어느 날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여자를 구한 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타게 된다는 서두의 이야기만은 여전히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반복되는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켜켜이 쌓인 시간과 경험으로 알게 된 지금, 이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불안함과 혼란스러움,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과 철학적 사유, 역사와 미스터리를 넘나드는 비밀스러운 매력이 가득한 작품이다.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조용하고 우아하며, 고풍스럽게 아름다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낯선 곳을 여행하고, 흘러가는 삶을 붙잡고 사유해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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