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인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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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 마법소녀야. 콤팩트를 이용해서 변신도 하고, 요술봉으로 마법도 쓸 수 있어."
"어떤 마법인데?"
"여러 가지! 제일 멋진 건 적을 쓰러뜨리는 마법이야."
"적?"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적이 아주 많아. 나쁜 마녀나 괴물 같은 거. 난 언제나 적을 해치우며 지구를 지키고 있어."           p.10

 

초등학교 5학년인 나쓰키에게는 가족들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바로 요술봉과 변신 콤팩트, 고슴도치 인형 퓨트와 함께 지구의 위기를 지키는 '마법소녀'라는 점이다. 유일하게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사촌인 유우뿐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는 아키시나의 웅장한 산속에 있는 집에서 매년 백중절에만 만날 수 있었지만 말이다. 함께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면 일 년간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유우와는 비밀 연인 사이이기도 하다. 나쓰키의 엄마는 유난스러운 성격의 모범생 언니 비위 맞추기에만 급급하고, 아빠는 모든 가정사에 그저 방관할 뿐이다. 나쓰키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외롭게 보낸다. 그래서 나쓰키는 가끔 '사라지기' 마법을 쓴다. 진짜 사라지는 건 아니고, 숨을 죽이고 기척을 숨긴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집 안의 쓰레기통이라고 여기면서 사는 삶은 어떤 걸까. 아빠도, 엄마도, 언니도, 불쾌한 감정이 부풀어 오르면 나쓰키에게 고스란히 표출해버린다.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나쓰키의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상한 건 가족들의 태도만이 아니었다.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와 닮아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학원 선생님은 아무도 모르게 나쓰키를 불러 쉽게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일삼는다. 그게 성적인 학대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렇게 가족과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오랜 세월 언어적으로, 물리적으로 학대를 당해온 나쓰키는 스스로를 포하피핀포보피아별의 마법소녀라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마법을 써야 한다. 온몸을 텅 비우고 복종해야 한다... 엄마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슬리퍼로 내 얼굴을, 머리를, 목을, 등을 내리쳤다. 나는 마음의 스위치가 꺼진 상태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숨을 죽이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땅에 묻힌 타임캡슐처럼 나를 껍데기에 가두고, 묵묵히 견디며 목숨을 부지해 미래로 보낸다.
얼마나 먼 미래까지 목숨을 보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p.66

 

이 작품은 무라타 사야카가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후 단 일 년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요술봉과 달콤한 젤리 등 아기자기하고 화사한 표지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스스로를 마법소녀라고 생각하는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단순히 아름답고, 상상력이 지나쳐 현실과 환상을 넘나 드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충격을 안겨주는 대단한 문제작이었다. 폭력적인 상황에 처할 때마다 유체이탈 마법을 써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소녀의 마음이 안타깝게 느껴지다가도, 정상을 약간 벗어난 것 같은 소녀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파란 덩어리의 인간, 금빛 액체로 된 피 등 현실이 끔찍할 수록 구현되는 이미지는 점점 더 동화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소녀가 어른이 된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가 더 분량도 많고, 더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라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독보적이고, 도발적인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가 궁금할 만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충격이 더해가는 그런 작품이었다. 세상의 상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비정상과 정상의 경계에 대한 해석은 놀랍게도 현실과 맞닿아 있다. 세상을 번식을 위한 '인간 공장'으로 인식하는 것이 근미래적이라거나, SF적인 설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무런 대책 없이 저출생을 지탄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떠올려본다면 소설 속 이야기를 허구의 그것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금기를 넘어서 미친 짓처럼 보이지만, 사실 점점 정상에서 벗어나 이상해지는 이들의 행동 또한 모두 사회가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미친 것은 이들인가, 사회인가,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달콤한 이미지 뒤에 숨겨져 있는 파괴적인 상상력의 끝판왕이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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