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날들을 위한 안내서
요아브 블룸 지음, 강동혁 옮김 / 푸른숲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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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순간이면 벤은 차라리 세상에 아무 의미가 없기를 바랐다. 그러면 모든 것이 훨씬 더 쉬워질 테니까.
그는 가방을 뒤져 전날 산 책을 꺼냈다. 누군가 그를 기억하고 지하실 문을 열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데 쓸 만한 책이 책장에 수십 권 있었지만, 온몸에 번진 무력감과 지하에 갇혀 있다는 엷은 우울함 때문에 손이 가방으로 향했다. 그는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p.171

 

첫 페이지부터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이상한 책이다. 당신은 한 손으로 이 책을 들고 다른 팔로는 머리를 괴고서 이 책을 읽고 있습니다.. 당신은 불과 한 시간 전에, 충동적으로 이 책을 샀습니다...다가올 날들에는 이 책이 당신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당신의 생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아주 중요해집니다.. 아니, 아뇨. 지금 책을 덮으면 안 되지요! 등등 이 책은 시작부터 읽는 이들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물론 이것은 극중 인물인 벤에게 책이 건네는 말이다. 일단 신뢰를 좀 쌓자는 문장으로 시작해서 때가 되면 뭘 해야 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는 식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안내 문구'같은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떤 책을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 속 내용이라는 것이 '당신이 지금 어디에서 어떤 자세로 책을 읽고 있는지, 방 안의 모습은 어떤지 하나 하나 묘사하고 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게다가 필요할 때마다 이 책을 가져다가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으라고 말을 건네는 책이라니.. 이 책의 정체는 도대체 뭔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점점 궁금해질 것이다.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책,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일들까지 훤히 알고 있는 책이라니... 어서 빨리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이 허구의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이 꼭 독자인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야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가닿을 수는 없으니까요. 당신은 조용히 그런 전제를 세웠습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을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듣고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은 오직 당신 안에서만 반향을 일으키는 의미로 여러 겹 싸여 있지요. 우리 모두의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무한의 틈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친구를 진정으로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늘 거의, 얼추, 그저 비슷하게 이해하는 것일 뿐이지요.         p.370~371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술집 같지만 세상 어디에도 팔지 않는 특이한 술을 파는 미스터리한 바가 있다. 그곳에는 이름 없는 술을 찾는 이상한 손님들이 종종 찾아온다. 사장인 벤처 부인은 그들에게 특별한 기술을 판매한다. 바로 '경험'이다. 어떤 경험이 하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경험자들 중 한 명에게 나 대신 그런 경험을 해달라고 부탁한 다음 그가 돌아오면 술을 한잔 같이 하면 되는 것이다. 경험자들은 신비로운 기술을 갖고 비밀리에 움직이는 사람들도, 자신의 경험을 음식에 녹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벤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노인 울프에게 받은 두 병의 위스키를 통해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극중 벤처 부인이 '사람들은 경험으로, 자신들이 겪어 온 모든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경험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해 온 경험과 선택이 내면과 행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곳에 가 볼 수도, 해보고 싶은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도 없다. 그러니 정말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해볼 수 있는 위스키가 있다면, 나 자신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책이 있다면 만나 보고 싶다. 난관에 부딪쳤을 때, 막막할 때, 절망에 빠졌을 때, 필요할 때 언제든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려주는 책이 있다면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 같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허무는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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