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클 크리크
앤지 김 지음, 이동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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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쓸 때의 박 유는 한국어를 쓸 때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겠거니 생각했던 대로, 언어의 유창함이 한풀 꺾이면서 유능함이나 성숙함도 한 꺼풀 같이 벗겨지는 이민자들은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 버전의 그들이 되고 만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 그는 자신이 맞닥뜨리리라 예상한 어려움들에 대한 대비를 했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번역해야 하는 논리적 어색함이나, 맥락에서 단어의 뜻을 유추해야 하는 지적 부담감, 한국어에는 없는 소리를 내기 위해 혀를 익숙하지 않은 위치에 두어야 하는 신체적 난관. 하지만 그가 알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건, 이런 언어적 불완전성이 바이러스처럼, 발화 능력을 넘어 다른 부분들까지 오염시킨다는 사실이었다.     p.235

 

버지니아 주의 작은 마을 미라클 크리크, 워싱턴 D.C.에서 겨우 한 시간 거리인 그곳은 문명에서 몇 시간은 떨어진 것 같은 외딴 촌락의 분위기를 풍겼다. 자동차 대신 소들이 다니고, 고층빌딩 대신 허름한 나무 헛간이 있는, 마치 흐릿한 흑백영화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미라클'이라는 이름이 기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기적이 일어날 곳 같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 한국인 이민자 가족이 운영하는 고압산소 치료 시설인 미라클 서브마린이 있었다. ‘기적의 잠수함’이란 뜻의 마치 잠수함처럼 생긴 체임버 형태의 의료기기를 갖춘 미라클 서브마린은 고압산소요법을 이용해 자폐, 뇌성마비, 불임 등을 치료하는 일종의 대체의학 치료 시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미라클 서브마린의 산소 탱크가 폭발했고, 그로 인해 걷잡을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한다. 당시 서브마린 내부에는 자폐 등의 치료를 받는 아이 셋과 부모 둘, 그리고 불임치료를 받던 성인 남성 한 명이 있었다. 그리고 치료 시설의 주인인 박 유와 아내 영 유, 딸 메리가 인접 지역에 있었다. 사고로 두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네 명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 신체가 마비되거나 절단되어 몇 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 치료 시설 주위에서 비과학적인 자폐 치료는 아동 학대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사건의 용의자는 사망한 자폐 아이의 엄마였다. 항상 치료 시에 아들과 함께 산소 탱크에 들어갔던 그녀가 몸이 좋지 않다며 들어가지 않았고, 하필 그녀가 피운 담배와 성냥이 화재를 일으킨 것과 동일한 브랜드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은 이후 하루에 두 번 왕복 몇 시간 거리를 오가며 고압산소 치료를 받게 하는 등 아이의 치료에만 매달린 열성적인 엄마였다. 정말 그녀가 방화를 저질러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것일까?

 

 

 

다른 '더 큰' 일이 많았기에 이 정도로 징징거려서는 안 되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런 일상적인 수치들, 뭉텅이로 허비되는 몇 분들이 그녀를 무너뜨렸고, '일반' 부모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모를 거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젖먹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그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지만 한시적일 때는 뭐든 참을 만하다. 하지만 이 짓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매일같이 해봐라. 팔순이 넘어서도 쉰 살 먹은 아픈 딸을 데리고 그때는 또 무슨 치료인지도 모를 치료실에 데려가는 길에... 내가 죽으면 누가 내 딸을 돌봐주나 걱정한다고 생각해보란 말이다.       p.400

 

이야기는 사건이 발생하고 일 년 후 벌어진 나흘간의 재판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다. 미라클 서브마린을 운영하는 박 유와 아내 영 유, 그들의 딸 메리, 그리고 화재 발생 당시 산소 탱크에 있었던 이들의 시점으로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2020년 에드거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전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앤지 김은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고, 하버르 로스쿨을 거쳐 법정 변호사로 일했다. 그녀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는 변호사로 일했던 작가의 경험과 병치레가 잦았던 아이를 키운 엄마로서의 경험, 그리고 영어를 말하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채로 이국땅에서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법정극으로서도 매혹적이지만, 무엇보다 각각의 인물들의 입장에서 섬세하고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는 심리 묘사가 압도적이다. 특히나 장애아동을 키운다는 것이 단순히 삶이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바뀌고 중력의 축이 변경된 평행 우주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일상의 에피소드들로 차곡차곡 쌓아서 보여주고 있어 진짜 현실로 체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민자의 가족이 타국에서 겪게 되는 그 모든 것들 또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한국어를 쓰는 박이 배울 만큼 배운, 존경받아 마땅한 권위적인 남자였다면, 영어를 쓰는 그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못하며, 매사에 자신 없고, 걱정하고, 서투른 머저리'였다는 문장처럼 예리하게 그려내는 묘사들이 심장을 툭툭 건드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덕분에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포스트잇 플래그를 많이 붙인 작품이 되었다. 문장도, 묘사도 뛰어 나고, 서사와 구성, 반전, 플롯과 묵직한 감동까지 뭐 하나 놓치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날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만들어 내는 서스펜스와 저마다의 ‘진실’과 '비밀', 그리고 각자의 사정과 입장에서 오는 차이에서 오는 극적인 긴장감, 부모로서의 죄책감과 자괴감,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희망이 사라져버리는 순간의 안타까움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 내는 드라마의 감동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한 동안 여운처럼 남는다. 그 어떤 찬사를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근사한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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