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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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네를 타는 그 사람의 표정이 말이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 거예요. 환한, 세상을 손에 넣은 것 같은 얼굴. 그런 표정은 다른 때의 히사코 아가씨한테서도, 다른 사람한테서도 본 적이 없어요. 그 얼굴을 봤을 때, 전 죄의식 같은 걸 느꼈어요. 어쩐지 인간이 보면 안 되는 걸 본 것 같았어요. 문득 발밑이 푹 꺼지는 것 같았어요. 한순간, 그 사람이 그네를 타면서 느끼는 세계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거든요.     p.134

 

이 책을 처음 만났던 것이 벌써 14년 전이지만, 나는 여름이 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 작품을 떠올렸었다. 계절과 함께 기억되는 이유는 내가 무더운 여름에 이 책을 읽었던 것도 있지만, 극중 이야기의 배경이 도시 전체가 찜통에 들어 있는 것 같은 한여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진 옷으로 갈아입고 만나게 된 개정판은 한겨울이라 색다른 느낌으로 읽었다. 이 작품은 한 저택의 잔칫날 벌어진 독살 사건을 배경으로, 무려 열일곱 명의 희생자를 낸 끔찍한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눈먼 소녀와 현장에 남겨진 편지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이야기이다. 기존에 출간되었던 버전의 표지에서는 소녀와 하얀색 백일홍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었다면, 전면 개정판에서는 붉은 빛 백일홍과 하얀 손의 이미지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한 사건에 대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당시의 모습에 대한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스토리는 온다리쿠 특유의 이미지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와 미스터리로서의 독특한 긴장감이 더해져 굉장히 매혹적이다. 사람들의 기억은 각기 조금씩 달랐고, 증언들 또한 같은 상황에 대해 묘하게 엇갈리면서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 가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이야기라 한 동안 이 작품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오랜 만에 읽으면서 과연 그때의 그 임팩트가 여전할까 기대도 되었는데, 다시 읽어도 이렇게 재미있다니 감탄하면서 읽었다. 아직도 포스트잇 플래그를 가득 붙여 놓고 싶을 만큼 좋은 문장들이 가득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의 여운도 여전했다. 온다 리쿠는 <유지니아> 이후에도 최근작까지 수많은 작품을 써왔지만, 이 작품은 정말 독보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새하얀 꽃이 잔뜩 피어 있었어요. 백일홍 꽃. 압도당할 것처럼 하얗더군요. 이렇게 꽃을 많이 피우는구나 싶을 정도로, 나무가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탐스럽게 피어 있었죠. 어쩐지 오싹했어요. 온몸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등골이 오싹했어요. 실제로 체온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때 느낀 그 한기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군요.       p.267

 

한 가지 사건에 대한 다각적인 시점을 볼 수 있는 인터뷰 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작품이라 재미있는 것은 피해자와 목격자 모두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지만, 같은 시간, 공간에 있었던 그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느끼고 그렇게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 '실제 벌어진 사실' 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인터뷰는 조각조각 모아져서 하나의 퍼즐로 완성이 되지만, 완성된 퍼즐의 그림은 모호하기만 하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과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는 미스터리는 온다 리쿠만의 독특한 색깔이자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한 여름을 배경으로 기억을 더듬어보는 여러 명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여름에 대한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이다. '도시 전체가 찜통에 들어 있는 것 같은, 후끈한 열기를 동반한 더위'라던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은 하얀 여름', 그리고 '사우나에 들어앉은 것 같은 피부의 감촉'과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하늘' 등등.. 마치 글을 눈으로만 읽는 게 아니라 오감으로 체험하게 만들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에, 이렇게 춥고 건조한 겨울에 읽으면 이야기 속으로 더 빠져 들게 될 것이다. 온다 리쿠의 반전 매력은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려내고,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으로 당황스럽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분명 미스터리 추리물 같은데 완벽하게 열린 결말 때문에 어딘가 모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이중성'에 있기도 하다. 거기서 오는 막연함과 불안감의 끝판왕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온다 리쿠의 매력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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