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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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샌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바닥에 등을 댄 자세(좋아하는 자세는 아니었다)를 유지하며 아연실색하여 멀리 있는 발들과 부족한 다리들을 바라 보았다. 다리가 네 개뿐이었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벌써 그리워지는 원래의 작은 갈색 다리들이었다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허공에서 경쾌하게 흔들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는 공황에 빠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p.13

 

누구나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기시감이 들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벌레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을 보며 침대에 누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에서는 반대로 벌레가 사람으로 변신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다.

 

바퀴벌레 짐 샌스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다리가 네 개뿐인 거대 생물체로 변신했다는 것을 알아 차린다.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도 걱정스러운데, 그는 자신이 단독임무를 수행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물론 지금은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일을 당하다니 억울하고, 너무 불공평하다고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보좌관인 것 같은 여자가 들어와 일정을 말해주면서, 우리는 짐 샌스가 총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각료 회의에 참석한 그는 참석한 각료들 거의 모두가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 차린다. 국가 최정예 부대 이삼십 마리가 지도부의 몸으로 들어가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소하고도 거슬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외무장관만은 원래 인간이었던 것이다.

 

 

 

우리 종의 역사는 최소 삼억 년입니다. 불과 사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이 도시에서 소외집단으로 멸시당했으며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최선의 경우가 무시당하는 것이었고, 최악의 경우엔 혐오에 시달렸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원칙에 충실했고 우리의 신념은 처음엔 아주 느리게, 하지만 점점 가속도가 붙으며 굳어졌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핵심 신념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라틴명 블라토데아가 암시하듯, 우리는 빛을 피하는 생물입니다. 우리는 어둠을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p.122

 

국가 최정예 부대 이삼십 마리가 지도부의 몸으로 들어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인간이 된 바퀴벌레 짐 샌스는 종족의 미래를 위해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낼 수 있을까. 영국의 수뇌부를 장악한 최정예 바퀴벌레 군단은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 외무장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이언 매큐언은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로 브렉시트 사태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한다. 브렉시트는 영국(Britain)과 탈퇴(Exit)의 합성어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한다. 2016년 국민투표로 결정되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합류한 지 47년 만인 2020년 1월 31일 영국은 공식적으로 유럽연합을 떠났다. 브렉시트는 찬반 국민투표에서 투표에 참여한 영국 국민 51.9%가 찬성에 표를 던지면서 결정됐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여러 쟁점으로 의회에서 잇따라 부결됐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연기됐다. 그 과정에서 총리가 사퇴하고, 조기 총선을 하는 등 포퓰리즘 정치의 모습을 보였다. 

 

이 사태를 보며 이언 매큐언은 '엄청나게 절망했다'고 밝혔으며, '유머와 풍자가 현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 작품은 브렉시트 사태에 대한 그의 목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자기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정치인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비단 브렉시트 시대 영국 사회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정치의 모습은 비슷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영국 의회를 장악한 바퀴벌레들의 활약을 만나 보자. 정치 풍자와 우화로서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언 매큐언의 유머와 상상력만으로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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