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아시자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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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 의지로 시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등을 꼿꼿이 펴고 차분히 진술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망설임은 없었다. 깊이 반성하는 것처럼도,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도 보였다. 
할머니의 그 말을 계기로 재판은 결판이 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할머니가 살인이라는 불합리한 행위를 선택했다는 점은 살인이 어디까지나 충동적이었음을 증명하는 논거로 사용됐다.        -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중에서, p. 46

 

영업부의 만년 꼴찌인 슈야는 처음으로 괜찮은 성적을 받게 되자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영업 성적표의 매상액란에 늘어선 숫자를 보다가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지난달에 작성한 매상 전표를 확인해보니 자신의 입력 실수로 한 개 주문인데, 열한 개를 수주했다고 입력한 것이다. 무려 35만엔이 매상에 추가됐으니 성적이 달라지는 게 당연했다. 고민 끝에 슈야는 자신의 실수를 은폐해버리기로 한다. 어차피 실수가 드러나면 상여금도 깎일 테고 변상해야 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개인 사비로 35만 엔어치를 구입하고, 업체에는 원래 수주한 개수 만큼 배송해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운송 기사 역할까지 해가면서 일을 겨우 무마했는데, 배송 당시에 목격한 교통 사고로 인해 이 모든 일이 들통날 처지가 되고 만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선 모른 척 해야 했지만, 그럴 경우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슈야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땐 굴뚝엔 연기는>과 <죄의 여백>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아시자와 요의 신작이다. 실제의 지역과 출판사를 배경으로 현실감을 부여해 괴이한 현상들을 이야기로 풀어내어 오싹한 재미를 선사했던 <아니땐 굴뚝엔 연기는>, 학교 폭력과 왕따를 소재로 저지른 죄에 맞게 주어져야 할 처벌,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죄의 여백'에 대해서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죄의 여백>에 이어 이번 작품에는 범죄의 계기와 동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잖아. 안, 잘 생각해봐. 이건 되는 일이야, 안 되는 일이야?” 평소 야단칠 때의 어조로 말하자 안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입매를 누그러뜨렸다. “장난을 한번 쳐보고 싶었던 거지? 괜찮아. 안이 반성했다면 할머니도 화 안 낼게.”
...되묻는 것과 동시에 안이 고개를 들었다. 안의 얼굴에 풀죽은 기색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알아듣지 못한 말이 형태를 이루었다.
—되는 일.           - '고마워, 할머니' 중에서, p.131

 

배타적인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당하며 치매가 걸린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할머니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욕을 퍼붓고 심술을 부려도 말대꾸를 하거나 반발하지 않았던 할머니는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냥 버려두고 마을을 떠나거나, 죽음을 위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일흔 살에 가까웠던 할머니는 자신의 의지로 시아버지를 죽였다고,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고 진술한다. 사실 할머니의 행동과 진술에는 놀라운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표제작인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의 업무 실수를 은폐하기 위해 증언을 거부하는 남자, 손녀를 아역 배우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려다 어린 손녀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는 할머니, 늘 언니처럼 되고 싶었던 동생이 갑작스럽게 밝혀진 언니의 범죄 사실로 인해 무너져 내리게 되는 이야기 등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어 주인공을 궁지에 몰리게 하는 범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시자와 요는 독자들이 책을 덮은 후 바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 책을 덮어도 기억에 남아 독자의 일상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극중의 이야기를 통해 '살인자가 만인이 이해할 법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게 더 이상합니다.'라고 말한다. 살인의 동기는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하고, 어쩐지 그럴싸하다 싶은 건 그저 전례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돈이 궁해서, 원한을 품어서,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비밀이 폭로될 뻔했기 때문에, 배신을 당해서.. 등등... 누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말에 어떻게든 수긍하게 되는 건 결국 남의 일이기 때문이지, 보통의 사람들은 살인이라는 선을 넘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 따위는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평생, 그 자신까지도 말이다. 이 작품은 그 틈새의 어둠과 내면을 비집고 들어가 사람들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된 진짜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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