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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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돌릴 사이도 없이 재우치는 윤의현의 말에 규민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유서를 운운하는 것은 그녀가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대개 비슷하다. 울부짖고 오열하다가 죽음의 정황을 캔 후에는 반추하고 추론한다. 감성에서 이성으로 넘어오는 단계다. 규민은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의 다른 표현이라고 여겼다. 다만 윤의현이 슬픔을 극복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다소 놀랍긴 했다.     p.31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가평에 있는 해발 619미터의 청우산에서 변사자가 발견된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산기슭에 위치한 삼각바위 아래의 사체는 여자였다. 사망한 지 열흘은 넘은 듯한 시신은 산행 중 발을 헛디딘 것처럼 보였으나, 바위 위에서 신발과 그 속에 있던 유서가 발견되면서 사인은 '실족사'에서 '투신자살'로 바뀐다. 유서의 내용은 딱 한 줄이었다. '증오하면서 사랑한다.' 한글 문서로 작성된 것이었고, 유서라고 하기엔 애매모호한 문구였지만 그렇다고 유서가 아니라고 할 이유도 없었다.

 

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아 실종신고를 했던 의현은 동생으로 추측되는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사망자 오기현의 언니 윤의현, 성이 다른 두 자매. 의현은 동생이 자란 청평의 '꽃새미 화원'을 조사해 보라고, 그곳의 지역 유지인 기현의 의붓아버지가 의심이 된다고 암시하듯 말한다. 한편 의현에게는 문예창작과 시간 강사로 3년째 출강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일어난 문제도 있었다. 학생들을 성추행한 교수가 제대된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학교에 복귀한다는 소식에 그를 방송국에 폭로하겠다며 나선 학생을 의현이 도와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기현의 사건을 수사하는 규민의 시점과 동생의 죽음과 성추행 폭로 사건 사이를 오가는 의현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원래 사건이나 사고라는 게 퍼즐조각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흡사 각본이라도 있는 양 선명하게 드러나면 그게 더 의심스러운 법이죠."
그는 오기현의 죽음이 너무 선명했다고 했다. 과정 따위는 생략된, 일목요연한 '스케줄' 같은 죽음이라면서. 백규민 형사는 유서도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증오하면서 사랑한다'고요? 왠지 유서라기보다 급조된 문장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이 추상적인 것은 둘째치고 친필이 아닌 점도 이상했습니다. 필체를 확인해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윤의현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p.116~117

 

어릴 적부터 아들처럼 키운 지적장애인의 노동 착취와 학대, 딸이 다투고 집을 나갔는데도 실종 신고를 망설이는 아버지, '증오하면서 사랑한다'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유서, 자매라면서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 않은 언니의 침착함, 과연 동생의 죽음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이들 자매처럼 역시나 어린 시절 가정과 부모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던 아이는 자라서 형사가 되었고, 각각 별개처럼 보이는 사건들을 따라가며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 끝에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역사추리소설로 1억원 고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작가 이선영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그 동안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작품들을 선보여왔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불합리한 운명과 폭력에 순응하지 않는' 인물들의 분투기를 그려낸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등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들은 바로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숱하게 보도되고 있는 뉴스들을 통해서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비극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할 때마다 분노하게 되고, 슬픔을 금할 수가 없다. 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폭력의 한가운데서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다. 작가는 '지금도 음지에서 오기현과 김예나, 혹은 신명호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폭력에 시달리며 숨죽이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작은 용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봄이 성큼 다가왔나 싶었는데, 어느 새 여름이 가까워진 듯 무더운 날씨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누군가는 폭력 속에서 방치되어 계절이 흘러가는 것도, 봄의 화사함도, 여름의 청량함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작가의 섬세한 마음이 위로가 되어,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내어 보기를 바래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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