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숨결
박상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살아 보이까, 후회를 안 하는 게 중요한 기라. 우리 동네 아들 이제 내 빼고 다 저세상 가 삐렸는데 금마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지가 다시 태어나믄 뭘 할 끼고, 이건 안 할 끼고 다들 이칸다 아이가. 그란데 그게 무슨 소용이고. 진작에 그랬어야재. 안 그러나?"
오랜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의 얼굴을 푸근한 미소가 데웠다.
"어르신은 후회하시는 거 없으세요?"
"내라꼬 와 없겠노. 그래도 이제는 마, 혜림이 이렇게 만나 봤으이 내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p.184~185

 

대학생 수아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로 실려 간다. 하필 그녀가 도착한 병원은 혜성대학교병원으로, 그곳은 다섯 달 전 아빠가 뇌출혈로 돌아가신 곳이었다. 게다가 수아는 아빠가 뇌출혈로 죽은 게 아니라, 그 죽음의 배후에 엄마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수아의 병명은 급성 충수돌기염으로 다음달 수술 일정이 잡혔고, 그녀의 주치의로 외과 레지던트 1년차 현우가 배정되었다. 현우는 수아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평소 그녀의 성격과 달리 너무 적대적이라 이상했고, 아빠의 죽음 이후로 갑자기 수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아는 현우에게 아빠가 엄마 때문에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리를 하면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한다. 현우는 수아의 엄마가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 없다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모녀 사이를 회복시켜주고 싶다는 마음에 한 가지 제안을 한다. 그날 밤의 진실을 알아내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라고, 자신에게 과거 기록에 접근할 권한이 있으니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홀로 조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확실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정확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환자들이 갑작스럽게 사망을 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과에서 지난 일을 뒤지고 다니는 레지던트를 좋게 볼 리 없었고, 여기 저기서 항의가 들어오자 담당교수에게 불려가 혼이 나기 일쑤였다. 진실을 밝히려는 그를 도와주는 이 아무도 없는 병원에서, 과연 그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까.

 

 

방 안에 들리는 거라고는 그녀의 광기 어린 목소리뿐이었다.
"진실이 항상 옳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천만의 말씀. 주변을 둘러봐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알고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네? 당장 쌤도 고작 그놈의 진실 땜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실 예정이구. 쯧쯧."
이렇게 죽는 걸까. 이것은 그가 원하던 평화로운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생명의 빛을 잃어 가는 것만큼이나 비극적인 죽음이 또 어디 있을까.    p.403

 

이 작품은 우선 '현직 의사가 쓴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국내에서는 아마도 처음 시도되는 장르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로빈 쿡이나 치넨 미키토 등 일본이나 영미권에는 현직 의사이면서 미스터리, 추리물을 쓰는 유명 작가들이 있지만, 국내에는 의사로서의 경험담을 쓴 에세이는 몇몇 있었어도 메디컬 미스터리로 풀어나가는 경우는 거의 못 보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이 작품을 쓴 박상민 작가는 한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도 수상하신 이력이 있어, 제대로 된 메디컬 미스터리를 보여주시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우선 현직 의사로서 대학병원에서의 근무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쓴 거라, 현실성과 리얼리티는 디테일하게 잘 그려져 있었다. 물론 기존의 메디컬 미스터리들과는 다르게 '감성' 메디컬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조금 분위기가 다르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여대생과 레지던트의 로맨스를 부각시키거나 하는 식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미스터리보다는 휴먼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꽤 두툼한 페이지 내내 의료계 내부의 문제를 폭로하는 식으로 진행되던 서사는 후반부에 이르러 의외의 범인이 등장하며 전혀 다른 느낌의 결말로 마무리가 되었고, 두 가지 버전의 엔딩 또한 색다른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시종일관 진행되던 서사의 방향대로 풀어나가서 사회파 미스터리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해서 전부 비슷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메디컬 미스터리, 휴먼 드라마에 로맨스까지 다양한 장르를 만날 수 있는 퓨전 미스터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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