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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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탁기 옆에 우두커니 선 채, 어린 마음에도 확신했다. 내 출생과 관련해서 엄마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고. 그 비밀이 아빠와 관련된 일인지 아닌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조금 전 엄마 모습이 그날 밤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내 출생과 관련이 있고, 그래서 엄마가 괴로워하는 것일까. 내가 텔레비전에 출연했기 대문에,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라도 한 것일까.   p.54

 

홋카이도에서 나고 자란 대학생 우지이에 마리코는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어쩌면 엄마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왔다. 대학교수였던 아빠는 집에 있을 때도 서재에 틀어박혀 일할 때가 많았고, 언젠가부터 엄마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엄마와의 거리감이 생기게 된 것은 자신이 부모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고민한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집에 불이 나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만다. 마리코와 아빠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여러 정황상 엄마가 집에 불을 질러 동반 자살을 기도한 것처럼 보이는 사고였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마리코는 우연히 엄마의 유품 속에서 도쿄행 비행기 운항 시간표와 의문의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되고, 도쿄로 향하게 된다.

 

도쿄에서 엄마와 단둘이 사는 고바야시 후타바는 대학에서 록밴드 싱어로 활동 중이다. 그녀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텔레비전에 밴드의 멤버들과 출연을 하게 되고, 그날 이후 이상한 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진다. 후타바는 어릴 때부터 아빠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이야길 듣지 못했고,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서 엄마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에 대한 진실을 듣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엄마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게다가 뺑소니 교통사고의 배후에 의도적인 동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는, 엄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엄마가 젊은 시절을 보낸 홋카이도로 떠나게 된다. 이야기는 이렇게 우지이에 마리코와 고바야시 후타바, 두 사람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마리코와 후타바,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과거를 추적해 숨겨진 비밀에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상대가 숨겨진 쌍둥이도, 그저 비슷하게 닮은 것도 아닌 서로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긴장감 넘치게 전개된다.

 

 

나는 머리가 점점 아파 왔다. 마치 2천 조각짜리 직소 퍼즐이 눈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다. 게다가 이건 참고할 만한 밑그림조차 없다. 각각의 조각이 제멋대로 존재한다. 가로로도 세로로도 연결되지 않고 어떤 식으로 늘어놓아도 형태가 맞춰지지 않아 도무지 진전이 없다.     p.227

 

이 작품은 히시가노 게이고의 1993년 작으로, 국내에는 <레몬>이라는 이름으로 2005년에 출간된 적이 있다. 이번에 새롭게 옷을 갈아 입고, 원제인 <분신>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금단의 영역을 넘본 인간의 지나친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비극을 그린 장편 ‘메디컬 스릴러’로 현대과학, 첨단의학을 소재로 다수의 작품을 발표해왔던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이번 작품 역시 매우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일본에서는 2012년에 5부작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고 한다.

 

과연 '나는 이 세상에 유일하지 않다'는 느낌은 어떤 걸까. 누군가의 복제품, 혹은 귀중한 실험의 결과가 나라는 존재라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들의 두 인물의 여정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말투도 기질도 재능도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 그런데 외모는 놀라울 정도로 흡사해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이다.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레몬을 먹는 방법이 같다는 것 정도인데.. 도쿄와 홋카이도에서 각자 출생의 비밀을 찾아가면서 맞춰지는 퍼즐의 조각들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복제 인간, 도플 갱어 등 최첨단 과학과 의학을 다루고 있지만, 소설의 거의 대부분은 미스터리 스릴러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거의 사백 여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퍼즐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고, 후반부에 마주하게 되는 인간의 지나친 탐욕과 오만이 초래한 비극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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