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뉴욕
이디스 워튼 지음, 정유선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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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어머니가 얼버무리고 은근히 암시하다가 체념의 미소와 함께 전해주는 성서 구절, 결혼식의 화려함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순종하라”는 당부를 상기시키는 구절이 있었다. 한 주 또는 한 달간 이어지는 화끈거리는 고통과 혼란, 부끄러운 쾌락, 그리고 습관이 되어 어느덧 잠잠해진 당연한 행위, 커다란 흰 침대에서 깊이 잠든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고는 아기들이 태어났다. "모든 것을 보상"할 것 같았던 아기들은 그런 보상을 주지 않았다. 아기들은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사람들은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보상받아야 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노처녀' 중에서, p.89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한 이디스 워튼의 단편집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번역본 네 편이 담겨 있는 책이다. 위선과 허위로 가득 찬 당시 뉴욕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을 보여주었던 <순수의 시대>, 20세기 초 뉴욕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신데렐라를 꿈꾸었던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그렸던 <기쁨의 집>, 그리고 최근에는 <기도하는 공작 부인>과 <밤의 승리>라는 고딕 소설 두 편을 통해 이디스 워튼의 작품을 만났다. 이디스 워튼과 호러 문학이라니 다소 낯설기도 했지만, 역시나 고딕 소설에서도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사로잡힌 여성한테 결혼 생활이 얼마나 큰 공포가 될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여성의 이야기'를 너무도 섬세하게 잘 그려내는 것은 여전했다.

 

이번에 만나게 된 소설집에는 <헛된 기대>, <노처녀>, <불꽃>, <새해 첫날>이라는 네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네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노처녀>와 <새해 첫날> 이었다. 우선 <노처녀>에서는 옛 뉴욕에서 성실하고 부유한 몇 개의 가문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주인공이 속해 있는 랄스턴 가문도 그중 하나였다. 델리아 로벨은 스무 살에 제임스 랄스턴과 결혼했고, 스물여섯 살에 제대로 기반을 잡았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남편에게 후한 용돈을 받았으며 모두가 인정하듯이 가장 멋지고 가장 인기 있는 '젊은 부인'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델리아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촌 샬롯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처녀인 샬롯이 몰래 낳은 아기를 아동보호소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기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샬롯은 남자가 아기에 관해 알지도 못하며, 자신은 그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졌을 때 델리아는 더 충격을 받게 되는데..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샬롯의 딸이 성인이 되고 결혼식을 하루 앞둔 어느 날까지 이어진다.

 

 

그녀는 몇 년의 과부 생활 끝에 남편이 그토록 힘겹게 제공하고 싶어 한 모든 호사를 누릴 만큼 많은 재산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유혹의 위험이 다 지나간 뒤에 유혹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기이한 역설이었다. 장담하건대 그녀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호사를 누리기 위해 남자에게 손을 내민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돈 자체를 소중히 여기지는 않았더라도 돈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고독을 달랠 수도 그 고독을 사소한 오락거리로 채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위력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했을 것이다.    -'새해 첫날' 중에서, p.324

 

<새해 첫날>은 호기심으로 남들의 신파적인 관계에 대해 시시콜콜 떠드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녀는 항상 행실이 나빴지. 그들은 5번가 호텔에서 만나곤 했어.” 누군지는 알지만 그들에 대해서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나쁜 행실이나 과거를 폭로하는 것은 사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당시 열세 살이었던 그 날의 일을 기억의 한 지점에서 찾아낸다. 새해 첫날, 마침 방학 기간이라 집에 와 있던 나는 가족들과 함께 오찬 식탁에 앉아 평화롭게 식사 중이었다. 그때 하인이 달려 들어와 5번가 호텔에 불이 났다고 말했고, 그들은 길 건너편에서 신년 파티에 참석했던 이들이 혼비백산해서 뛰쳐나오는 모습을 구경한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황급히 뛰쳐나오던 여자의 이름은 리지 하젤딘, 그리고 뒤따라 나온 남자는 뉴욕의 미혼 여성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던 헨리 프레스트였다. 리지가 유부녀였기에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불륜으로 치부하고, 뉴욕의 보수적인 사교계는 오랜 시간 그녀를 배척한다. 나는 여러 해가 지난 뒤 우연한 기회에 그 장면 이전에 일어난 일과 이후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디스 워튼은 뉴욕 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작품 속에서 당시 상류사회를 상당히 현실감 있게 묘사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상류사회의 부조리함과 위선 등을 비판적 측면에서도 곧잘 묘사하고 있어 읽다 보면 통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던 대목들이 많다. “모든 처녀들이 언니 말처럼 다 참한 건 아니야.”(p.144) 라든지, 사람들은 마흔다섯 살에 용감한 일을 하는 게 스물다섯 살에 하는 것보다 끔찍하게 더 힘들다는 걸 죽어서야 깨닫는다죠.”(p.158), “오래된 과거는 죽은 것으로 여기는 거 말일세. 과거는 죽었어. 지금 우리에게 그런 건 아무 쓸모가 없네."(p.220), “어쩔 수 없지만, 사실이에요. 여자는 아주 쉽게 그럴 수 있어요. 남자들은 종종 그런 사실을 잊더군요. 당신은 나를 사랑에 우는 정부로 여겼고 나는 값비싼 매춘부였을 뿐이에요.”(p.304) 등의 대사에서도 보여지듯이 욕망과 도덕, 이성과 감정, 전통과 변화 사이를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디스 워튼의 전작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이번 작품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전들은 딱딱하고 고루하다는 편견과 달리 매우 현대적으로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그려내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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