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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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 가면서 이런 게 얄미웠어요. 가해를 했던 애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요. 어떤 애들은 잘 안 풀리는데, 그러면 뭐 좋은 마음이 들진 않아도 최소한 화는 덜 나요. 근데 너무 잘 풀린 애들을 많이 봤어요. 누가 들어도 알 만한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애도 있고, 굉장히 좋은 친구로 평판이 나는 애도 있고, 허탈해지는 느낌 있잖아요. 저지른 사람은 없고 당한 사람만 있구나, 결국에는. 그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p.50~51

최근에 유명 연예인의 과거 학교폭력 행적을 피해자들이 폭로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연예인들 중 일부는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며 잘못을 부인하거나, 피해자와의 사이에서 오해가 있었다는 식으로 변명하거나, 혹은 그 모든 것들을 인정하고 활동을 중단하기도 한다. 고등래퍼, 프로듀스 101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것이 밝혀져 논란을 불러 일으켜 소속사에서 방출되거나 프로그램에서 하차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 출연할 생각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해자들에게는 그 당시가 그저 어리석은 날들의 실수 내지는 이미 지나가 버린 순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피해자들은 학교폭력 경험의 순간을 10, 20년 계속 끌어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가해자는 사라지고 피해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10대 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이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고 있다. 인터뷰어이자 이 시리즈를 기획한 최윤제 피디를 비롯해, 인터뷰이 10명 모두가 학창 시절 왕따였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그 일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간진한 채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들뿐만 아니라 그외 392명의 설문 응답자들이 모두 학창 시절 왕따였으며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다.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상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으며, 어른이 된 후에도 지독한 트라우마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소외를 경험한 이들 대부분이 당시 무너졌던 존엄성이 회복되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정신과 의사들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 사실 왕따였어."라는 고백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유가 있든지 간에 폭력을 정당화해선 안 돼요, 절대로. 그리고 내 편 없이 힘들 때 그래도 믿어요, 자신을. 이렇게 같이 싸워 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혼자 있지 마요. 내가 겪은 아픔들을 조금이나마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꼭 우리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누군가에게 말해 줘요. 숨 막힌다고. 괴롭고 힘들다고. 살려 달라고. 같이 있어 줄게요. 포기하지 마요. 그리고 미안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요. 더 노력할게요. 힘내요. 우리.     p.259

<왕따였던 어른들 Stop Bullying> 프로젝트는이렇게 시작되었다. 2019 4월 유튜브,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던 끔찍한 기억을 여린 몸에 새긴 채 그대로 어른으로 커 버린 이들 10명이 모여 각자 자기 경험담을 털어 놓는 방식의 이 인터뷰 영상 2편이 올려진다. 이 인터뷰 영상물들은 순식간에 조회 수 300만 회를 넘기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힘입어 2편의 영상물이 더 제작되었다. 이 시리즈는 6개월여가 지난 지금까지 누적 조회 수 300만 회를 기록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퍼져 나가고 있다. <나의 가해자들에게>는 바로 이 영상물에 담긴 인터뷰 전문을 다듬어 실은 책이다. 영상물들의 재생 시간은 고작 20여 분 남짓이지만, 실제 인터뷰하고 이야기 나눈 시간은 5시간이 훌쩍 넘는다.

학교폭력은 점점 더 은밀해지고, 잔혹해지고 있다. 가끔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끔찍해졌는지 무섭기도 하다. 게다가 피해학생이 학교폭력 사실을 털어놓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부모님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서, 문제를 더 키우기 싫어서,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체념해서, 더 큰 보복이 두려워서 등등의 이유로 입은 다무는 아이들이 많다. 하지만 침묵은 가장 나쁜 대응 방식이다. 학교폭력을 남의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학교와 사회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피해자들이 날것 그대로 전하는 생생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왕따가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실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같은 아픔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더 없는 공감과 위로가 되어준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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